아내 버리고 도망간 남편... 그에게 닥친 기이한 운명

<어우야담> 속 홍도-정씨 부부의 기구한 사연... 조선시대 이산가족의 극적 상봉

등록 2016.02.09 16:12수정 2016.02.0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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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저우역. 2008년 하반기에 찍은 사진. ⓒ 김종성


해마다 음력 설날이 되면 한국과 중국에서는 민족대이동이 펼쳐진다. 한국도 한국이지만 중국은 훨씬 더하다. 춘절 즉 설날이 시작되기 보름 전부터, 가게 문을 닫고 고향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 늘어난다.


지난 2일 중국 남부 광저우역에서는 10만 귀성객이 한꺼번에 몰린 데다가 기차마저 제때 출발하지 못해, 역사 구내는 물론이고 주변까지 혼란스러워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 바람에 10만 인파가 10시간 동안이나 기차역에서 추위에 벌벌 떨었다.

이런 풍경으로 상징되듯, 오늘날에는 가족들이 멀리 떨어져 있다가 정기적으로 모이는 풍경이 매우 친숙하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10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그림이었다.

20년 만에 온 가족이 상봉한 이야기

100년 전만 해도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교통과 통신도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이 일생 동안 이동할 수 있는 범위가 지금의 군(郡) 단위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상인·군인·관료가 돼 외지나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가 아니면, 일반 농민이 출신지 군(郡)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농업사회였던지라 개인이 국가의 승인 없이 토지를 벗어나는 건 지극히 힘들었다. 처벌을 각오하지 않고는 힘든 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가족이 헤어질 일이 별로 없었다. 어떻게 해서 헤어진 경우에는, 다시 만날 길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 시절 사람들의 눈에는, 평소 떨어져 살던 가족이 1년에 한두 번 재회하는 지금의 풍경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화제가 된 에피소드가 있다. 전쟁 통에 우연히 헤어진 가족이 조선·명나라·청나라·일본은 물론이고 동남아까지 헤매다가 20년을 훨씬 넘긴 뒤에야 극적으로 상봉하는 사건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화제가 될 만한 일이지만, 옛날에는 더욱 더 그럴 만한 일이었다. 광해군의 최측근이자 대학자인 어우당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 나오는 홍도-정씨 부부가 이 사연의 주인공이다. 

남편 찾아 남장하고 군영에 잠입한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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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우는 조선 여성들의 모습.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홍도는 성이 아니라 이름이다. 부인의 경우에는, 성은 안 나오고 이름만 나온다. 남편의 경우에는 '정'이라는 성만 나오고 이름은 안 나온다. 정씨가 나라 정(鄭)자를 쓰고 아들 대가 꿈 몽(夢)을 돌림자로 사용한 걸 감안하면, 정씨 대(代)는 영원할 영(永)을 돌림자로 썼을 수도 있다.

정씨는 음악적 재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작사·작곡은 기본이고 퉁소도 직접 연주할 정도였다. 노래도 어느 정도 했다. '싱어송라이터'였던 셈이다. 만약 16세기에 태어나지 않고 20세기에 태어났고, 음악적 재질이 아닌 사업적 재질을 갖고 태어났다면, 어쩌면 아주 '현대적'인 재벌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정○영'이라고 적힌 명함을 들고 건설 현장을 뛰어다니는 기업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홍도와 정씨는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으로부터 최소 2년 이전에 결혼해서 몽석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보통 10대 후반에 결혼했으므로, 1592년 당시 부부의 나이는 20세 전후였을 것이다.

임진왜란 후반기에 일본군이 전라도에 들어오자, 정씨는 군대에 징집돼 남원성 방어작전에 참가했다. 종전 1년 전인 1597년에 그는 조선·명나라 연합군에 편성돼서 남원성을 지키게 됐다.

이때 부인 홍도가 대담한 일을 벌였다. 의리가 좋다는 평가를 받던 그는, 남장을 하고 남편의 군영에 몰래 잠입했다. 남편과 함께 병영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막사에서 함께 잠자는 다른 병사들은 정씨 옆에 누워 있는 낯선 병사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일본군이 남원성 밖에 있고 백성들이 마구 징집되는 상황이라, 명나라군은 물론이고 조선군에서도 정씨 부부가 막사에서 동거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남편은 명나라로... 아내는 일본으로

그런 상태에서 남원성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됐다. 일본군이 남원성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의리는 상황이 좋을 때보다는 나쁠 때 드러나기 쉽다. 정씨가 홍도를 사랑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긴박해지자 정씨는 옆에 있는 홍도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일본군을 피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는 명나라군 사령관의 꽁무니만 뒤쫓았다. 그 사람을 따라가야 안전하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성 밖으로 무사히 나온 뒤에야 정씨는 부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퉁소만 챙기고 부인은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행동이 후회됐다. 그래서 부인을 찾아 나섰다.

정씨는 부인이 자기처럼 명나라 군인들 틈에 숨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명나라 군인들을 찾아다니다가, 어느덧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압록강을 넘은 그는 만주를 지나고 북중국을 지나 남중국으로 이동하면서 홍도를 찾아 헤맸다.

조·명 연합군이 남원성을 황급히 빠져나가던 그 시각, 홍도는 남편 옆에 있었다. 명나라 사령관만 쳐다보며 정신없이 쫓아가는 남편을 따라가다가 남편을 놓친 것이다. 홍도는 일본군에게 붙들렸다. 그는 그 상태로 일본 군함에 실려 일본 땅까지 끌려갔다. 정신없는 남편이 엉뚱한 명나라에까지 가서 자기를 찾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포로가 된 홍도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겼다. 일본군은 그런 줄로만 알고 홍도를 무역선의 노예로 팔았다. 이 배는 일본과 동남아를 오가는 상선이었다. 홍도는 이 배에서 뱃사람으로 살았다. 노를 젓는 일도 했다. 다들 홍도를 남자로 알았기 때문에 그런 일까지 시켰던 것이다. 힘든 중노동 속에서도 홍도는 자신의 신체적 특징이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그가 여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이야기는 잠시 뒤에 나온다.

퉁소 소리에 비명... 이국 바다 위에서 극적 상봉

아버지 정씨는 명나라로 흘러들고 어머니 홍도는 일본으로 끌려갈 때, 아들 정몽석은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지리산으로 피난했다. 당시 몽석은 최소한 여섯 살 이상이었다. 몽석은 목숨은 건졌지만, 전쟁고아의 비극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부모를 그리워하며 그렇게 성장했다.

명나라에 간 정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쪽을 향해서만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상하이가 있는 절강성(저장성)에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부인을 찾아 헤매던 그는 상하이 옆의 해안 지방까지 가게 됐다.

어느 날 한밤중, 정씨는 중국에서 알게 된 도교 성직자와 함께 배에 탑승했다. 그 배 위에서 그는 어둠침침한 하늘을 바라보며 퉁소를 연주했다. 조선에서 만든 자작곡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옆 배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부인 홍도의 목소리였다. 옆 배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던 홍도가 남편의 자작곡을 듣고 고함을 쳤던 것이다. 홍도는 "내 남편이다!"라고 고함쳤다. 홍도를 남자로만 알았던 뱃사람들은 다들 의아했을 것이다. 그제야 홍도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동행인이 부인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동한 도교 성직자는 자기 돈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홍도를 빼내왔다. 남원에서 헤어진 두 부부는 이렇게 동지나해 물결 위에서 우연찮게 만나게 됐다. 그 퉁소 소리가 결정적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이들의 헤어짐과 만남에는 꼭 이렇게 퉁소가 있었다. 300년 뒤에 태어나 사업을 잘해서 재벌이 되기보다는, 퉁소를 잘해 이국 바다 위에서 부인을 찾는 것도 이렇게 괜찮은 일이었을 게다.

또다시 전쟁의 격랑 속에 뛰어든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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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소형 군함인 코하야의 모습.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한일우호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홍도와 정씨는 이국 바다에서 극적 상봉을 했지만, 당장 조선으로 돌아갈 길이 없었다. 전쟁을 벌인 조선과 일본 간에는 포로송환 협상이 있었지만, 동맹국 간인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는 그런 협상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는 본인 의사에 따라 귀국할 수 있었지만, 정씨처럼 명나라에 간 사람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귀국이 힘들었다.

할 수 없이 부부는 절강성에 눌러 앉았다. 여기서 둘째아들 몽진을 낳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몽진이 열일곱 살이 되자, 부부는 몽진을 중국 여성과 혼인시켰다. 아버지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중국 여성이었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조선 남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때 홍도 부부는 50대 전후이거나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1618년이 됐다. 임진왜란 종전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여진족이 명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임진왜란으로 조선·명나라·일본 삼국이 약해진 틈을 타서 급성장을 거듭한 여진족이 명나라와 전쟁을 치른 것이다. 정씨는 이 전쟁에 자원했다. 명나라 병사가 돼 전쟁터에 나간 것이다.

이 전쟁에서 명나라는 패배했다. 정씨의 부대도 궤멸됐다. 다행히도 정씨는 목숨을 건져 여진족의 포로가 됐다. 그는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라고 외쳤다. 그러자 여진족은 그의 신분을 확인하고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조선군도 명나라 편에 가담해서 이 전쟁에 참여했지만, 조선군은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여진족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이래서 여진족이 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기에 정씨가 쉽게 풀려난 측면도 있다.

이렇게 해서 정씨는 2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첫째아들이 있는 고향에 가는 것은 좋았지만, 동시에 이것은 홍도와의 제2차 이별이었다. 퉁소를 항상 애지중지했으니, 이번에도 퉁소가 품속에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부인은 두고 떠나도 퉁소는 버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홍도가 걸렸지만, 발길을 되돌릴 길이 없었다. 그렇게 정씨는 압록강을 건너 전라도 남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충청도에 왔을 때였다. 다리가 너무 아파 현지 한약방을 찾았다. 치료 중에 의원과 대화를 나눠보니, 중국인이었다. 좀 더 대화해보니 그가 임진왜란 때 왔던 참전용사라는 사실과 절강성에 딸을 두고 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정씨의 사돈이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아랑곳없이 껴안고 한없이 울어댔다.

실컷 운 두 남자는 짐을 꾸려 남원으로 향했다. 남원에 가보니 첫째아들 몽석이 장성해서 가정을 이끌고 있었다. 정씨와 몽석은 20여 년 만에 그렇게 재회했다. 몽석은 아버지만 돌아오신 게 서운했겠지만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는 소식에 안도했을 것이다.

남원에서 벌어진 '다국적 가족상봉'

남편이 또다시 전쟁 중에 자신을 두고 떠났다는 사실을 들은 홍도는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그 남자는 전쟁만 나면 나를 두고 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남편이 조선으로 갔다는 소식은 반가웠을 것이다. 홍도는 결심했다. 중국 가족을 데리고 밀항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합법적인 출국의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가 1619년께다.

홍도는 얼마 되지 않은 재산을 처분해서 배 한 척을 구해 동지나해 망망대해에 올라섰다. 돈이 부족해 식량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탓에, 바다 위에서 먹는 문제로 심하게 고생했다. 그렇게 55일 정도를 바다 위에서 악전고투한 끝에, 전라도와 제주도의 중간인 추자도 부근에서 조선 군함에 발견돼 전라도에 상륙하게 됐다.

얼마 뒤, 남원에서는 '다국적 가족상봉'이라는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한쪽에서는 조선·일본·명나라·청나라·동남아를 전전하던 조선인 가족이 20여 년 만에 상봉하는 장면이 벌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조선과 명나라에 나눠 살던 중국인 부녀가 약 30년 만에 상봉하는 장면이 벌어졌다. 홍도 가족은 임진왜란 막판에 헤어졌지만 중국인 부녀는 임진왜란 직전에 헤어졌으므로, 중국인 쪽의 상봉은 약 30년 만의 상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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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야담> 표지.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이들의 가족상봉은 명절마다 가족이 집합하는 지금 시대에도 특이한 일이지만, 가족이 헤어질 일이 별로 없던 그 당시에는 훨씬 더 특별한 사건이었다.

가족이 헤어질 이유가 별로 없던 시대에 동아시아 차원의 이산가족이 됐다가 극적으로 상봉한 홍도 가족의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특이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유몽인이 <어우야담>에다가 이 사연을 장구하게 소개했던 것이다.

<어우야담>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들의 뒷이야기를 추측해볼 수 있다. 홍도와 정씨가 두 번 헤어진 것은 매번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만 나면 남편이 어디론가 떠나는 바람에, 부인은 남편의 통소 소리를 들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 부부가 재회한 뒤에도 동아시아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정묘호란도 있었고 병자호란도 있었다.

그때마다 홍도는 남편이 어디로 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근히 불안했을 것이다. 전쟁 중에 남편이 어딘가 가려고 할 때마다, 홍도는 남편의 통소를 숨겨두곤 했을지도 모른다.
#설날 #가족 #홍도 #이산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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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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