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묵시위 제안자 용혜인, 총선 출마 선언

"그들과 다른 우리와 함께 수레바퀴 들어올리겠다", 노동당 비례대표 경선 참여 예정

등록 2016.02.06 12:37수정 2016.02.06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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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와 무책임한 정부를 규탄하는 시민들이 지난 2014년 5월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가만히 있으라'가 적힌 손피켓과 국화꽃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세월호 참사 추모 침묵행진 '가만히 있으라' 제안자인 용혜인(25) 4.16연대 운영위원이 20대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오는 3월 11일까지 열리는 노동당 비례대표 경선에 참여할 예정이다.

용 운영위원은 지난 5일 자신의 페이스북 등을 통해 "넘을 수 없는 벽을 기어이 넘기 위해, 수레바퀴를 이고, 단호하고 정직하게 나아가겠다"라며 출마의 변을 밝혔다. '가만히 있으라'라고 강요하는 수레바퀴에 깔린 '우리'를 대변하여, 국회에서 '거리의 정치'를 이고 가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수레바퀴를 이고, 단호하고 정직하게 나아가겠다"

그는 먼저 자신이 대학 입학 후 강남에 있는 예식장에서 법정 최저 시급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일했던 일, "침대에 누우면 다리가 책상 밑으로 들어가는 작은" 고시원에서 생활했던 일 등을 말하며 "당연한 것이거나 개인적인 불행"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작은 수레바퀴 아래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라고도 고백했다.

그러나 알바노동자들과의 만남, 한진중공업 사태,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개인적인 불행으로 보였던 각자의 수레바퀴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수레바퀴로 보이기 시작했다"라고 토로했다. 특히 세월호 참사 추모 침묵행진 '가만히 있으라' 때에 '우리'를 찾았다고 밝혔다.

또 "<절망라디오>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수레바퀴 밑에 깔린 우리를 발견했고, '청년좌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넘을 수 없는 벽을 향해서 계속 나아갔던 우리, 수레바퀴 밑에서 도망치지 않았던 사람들을 발견했다"라고도 덧붙였다.

용 운영위원은 그러한 "'우리'와 함께 수레바퀴를 이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의 안에 '우리'가 없었을 뿐"이라며 세월호 특별법 협상 당시를 예로 들었다. 구체적으로 "세월호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600만 명의 서명을 모아 냈지만 3만 명의 표를 받아 당선된 여당의 대표는 '협상의 전권을 야당에 주시라'며 거들먹거렸고 제1야당의 대표는 여당과 마음대로 합의한 후 유가족들과 '협상'하려 했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언제나 정치는 정치가가 하는 무엇이었다, 정치가는 하나의 직업이었고 '나'와 '우리'와는 다른 '그'였다"라면서 "우리가 하는 일은 긍정적인 태도를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하는 일은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총선 출마는 그 같은 수레바퀴를 들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용 운영위원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IS 같은 행위'라는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해져 버린 오늘, 수레바퀴는 차별과 혐오와 배제와 착취를 먹고 무럭무럭 커져가고 있다"라면서 "저는 더 이상 수레바퀴 밑에서 빠져나가겠다고 마음먹지 않게 됐다, '우리'와 함께 수레바퀴를 들어올리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지향하는 바가 "거리의 정치를 이고 가는 것"임도 분명히 했다. 용 운영위원은 "거리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정치에서는 존재 자체가 지워진 이들을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몸부림쳐왔다"라며 "차별과 혐오와 배제와 착취를 먹고 자라는 정치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함을 잃지 않기 위해 거리의 정치를 이어왔다"라고 밝혔다.

아울러, "이제 거리의 정치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진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리의 정치를 이고 갈 셈"이라며 "노동자의 당을 대표하여, 우리를 대표하여 대한민국 20대 국회의원 입후보를 선언한다"라고 밝혔다.

용혜인 4.16 운영위원, 20대 총선 출마선언문 전문
수레바퀴에 깔린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스무 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을 때는 인생게임에서 한 칸을 더 나간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영화에나 나올듯한 파격적인 신분상승을 꿈꾼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좋은 연인을 만나 결혼하는 정도의 좋은 엔딩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도와 대학은 분명 그런 상징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즈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강남에 있는 예식장에서 알바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그저 이게 사회경험을 위한 일시적인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바가 아니라 직원이 되고 싶다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20대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그의 꿈은 나와는 다른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레바퀴 밑에서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계속 알바를 해야 했습니다. 법정 최저 시급이 3,800원이던 시기에 저는 3,500원을 받고 일했습니다. 하루 14시간 동안 구두를 신고 7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날랐습니다. 그렇게 온종일 일하면 4만5천 원 정도를 벌 수 있었습니다.

2학년 즈음에는 안산에서 서울 회기동까지 통학하기가 너무 힘들어 고시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창문이 없지만 다른 방보다 조금 넓은 방이어서 3만 원 더 비싼 27만 원짜리 방이었습니다. 비록 침대에 누우면 다리가 책상 밑으로 들어가는 작은 방이었지만 처음에는 나 혼자만의 공간이 생겼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남녀공용이었던 고시원이라 어쩌다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던 남성과 마주쳐야 했고, 아침마다 복도 끝 방에서 누군가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지 않으면 함께 잠에서 깨야 했고, 옆방에 살던 사람이 새벽에 들어와 씻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면 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 저와 고시원에 살던 누군가는 저의 핸드폰 벨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을 겁니다. 그렇다 해도 누구한테 따질 수도 없는 방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당연한 것'이거나, '개인적인 불행'이었습니다. 저는 우연히 굴러온 수레바퀴 밑에 홀로 깔렸을 뿐이고, 여전히 한 칸 전진한 상태라고 믿었습니다.

나만 열심히 노력해서 내 처지를 바꾸면, 여전히 앞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짓누르고 있는 작은 수레바퀴 아래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한 칸 전진한 세상'에서 계속 마주쳐야 했던 사람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대학생들과 대도시의 빈민들이었습니다. 한 칸 뒤로 가건 심지어 한 칸 더 앞으로 가건, 다들 모양만 다른 수레바퀴 밑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태도로 깔려 있느냐 부정적인 태도로 깔려 있느냐의 차이 정도는 있고, 세상은 언제나 긍정적인 태도로 깔려 있으면 행복해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어느 칸에 와 있는지보다 수레바퀴에 집중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내 발밑에 있는 칸 보다, 내 앞에 보이는 다음 칸보다 다른 사람들을 짓누르는 수레바퀴들이 훨씬 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최저임금을 최고임금으로 받으며 야간알바를 하느라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알바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부산에서 두 명의 동료를 잃고도 또다시 불어 닥친 정리해고의 칼바람에 맞서, 동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크레인 위에 올라가 홀로 농성을 하는 여성노동자를 만났습니다. 삶의 터전을 지키고 싶다며 죽음의 핵발전을 멈추라고,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목숨을 던져 싸우던 밀양의 할매, 할배들을 만났습니다. '개인적인 불행'으로 보였던 '각자의 수레바퀴'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수레바퀴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났습니다

2014년, 수많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잊지 못하거나 애써 잊었던 세월호 참사를 만났습니다. 저 역시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매일 같이 뉴스를 검색하고 세월호 소식을 찾아보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며칠을 보냈습니다. 물론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곳이 안산이었던 탓도 있습니다. 제가 자랐고, 모든 관계들이 얽혀있는 곳이었으니까요. 여전히 제가 한 칸 더 전진했다고 믿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동정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강남의 예식장에서 20대 청년 알바를 만났을 때처럼 말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리에 나와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이 적힌 피켓을 들고 침묵행진을 시작했습니다. 100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해주었습니다. 수천 수만의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였습니다. 수레바퀴 밑에 깔린 사람들이 나와 너를 확인했을 때, 그들에게 붙여져야 할 진정한 이름은 '우리'였습니다.

'절망 라디오'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더 많은 '우리'를 만났습니다. 스무 살을 빚으로 시작해서 20대의 기간을 악성부채를 갚는데 다 써야 하는 우리, 허름한 자취방 월세를 알바로 유지하다가 하루아침에 철거민이 되어버린 우리, 가족이 일을 하다가 크레인 사고로 죽고 나서 배상금을 깎아서 재협상하자는 사장님에게 시달려야 하는 우리, 산업재해로 다치거나 입원했지만 누구도 책임질 필요 없다는 법정판결에 무너진 우리. 수레바퀴 밑에 깔린 우리.

'청년좌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또 다른 '우리'를 만났습니다. 경제성장이 지고의 가치인 시대에 "이윤보다 인간"이라고 말하는 우리. 노동개악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IS"나 마찬가지라고 꾸짖는 정부에 맞서 "정권의 평화가 아니라 노동자의 평화를"이라고 외쳤던 우리, 강력한 1인 통치의 정부가 들어선 지금 이 땅에 세상을 바꿀 "출구는 없다"고 진단하면서도, "넘을 수 없는 벽"을 향해서 계속 나아갔던 우리. 수레바퀴 밑에서 도망치지 않았던 사람들.

정치의 안에 '우리'가 없었을 뿐입니다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여-야의 원내대표와 세월호 유가족이 만났던 2014년의 하루를 기억합니다. 당시 세월호유가족들이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600만 명의 서명을 모아냈지만, 3만 명의 표를 받아 당선된 여당의 대표는 "협상의 전권을 야당에 주시라"며 거들먹거렸습니다. 제1야당의 대표는 여당과 마음대로 합의한 후, 유가족들과 '협상'하려 했습니다. '우리'를 위한 정치가 없었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정치의 안에 '우리'가 없었을 뿐입니다.

언제나 정치는 정치가가 하는 무엇이었습니다. 정치가는 하나의 직업이었고, '나'와 '우리'와는 다른 '그'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긍정적인 태도로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하는 일은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IS 같은 행위'라는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해져버린 오늘, 수레바퀴는 차별과 혐오와 배제와 착취를 먹고 무럭무럭 커져가고 있습니다.

스물 일곱이 된 지금, 저는 더 이상 수레바퀴 밑에서 빠져나가겠다고 마음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 칸 더 가겠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수레바퀴를 들어올리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과 같은 흔하고 의미 없는 수사로 '우리'를 지칭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가 누구인지 알고,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 알고, 이 글을 읽는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레바퀴를 이고 가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거리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정치에서는 존재 자체가 지워진 이들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몸부림쳐왔습니다. 수백 일씩 길바닥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을 자고, 광고탑 위에서 전자파와 싸우며 수백 일을 버티고, 물과 소금만으로 연명하며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고, 거리로 나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는 것이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었습니다.

차별과 혐오와 배제와 착취를 먹고 자라는 정치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함'을 잃지 않기 위해 거리의 정치를 이어왔습니다. 이제 거리의 정치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진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리의 정치를 이고 갈 셈입니다. 기어이 이고, 기어이 가야겠습니다.

노동자의 당을 대표하여, 우리를 대표하여
대한민국 20대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를 선언합니다.
넘을 수 없는 벽을 기어이 넘기 위해, 수레바퀴를 이고, 단호하고 정직하게 나아가겠습니다.


#용혜인 #노동당 #세월호 참사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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