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이 널 찾았어야 했는데..."
부천 여중생 시신... 내 조카였다

[기획- 아이들이 죽어간다②] 독일 빌레펠트에서 시작된 아픈 기억

등록 2016.02.11 07:16수정 2016.02.1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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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아이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참혹한 소식에 참담해 하면서도 우리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 잊기를 반복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아이들이 죽어간다' 기획기사를 통해 곳곳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학대를 고발하고 이런 끔찍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봅니다. [편집자말]
지난 2월 3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퇴근해서 자기 전에 스마트 폰으로 이것 저것 보다가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슬픈 예감처럼 적중한 충격적인 기사

<부천 소사에서 목사가 딸 살해 후 방치>. 무언가 기분이 싸했다. 기사 내용은 A목사가 딸을 훈육 명목으로 빗자루와 빨래 건조대 봉으로 다섯 시간에 걸쳐서 체벌한 후 죽어버린 딸을 10개월 넘게 방치했다는 것이었다. 순간 내 뒤통수가 띵했다. 나이도 엇비슷했다. 전처가 암으로 사망한 후 재혼, 1남 2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기사를 더 검색했다. 확실했다.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이미 동생도 기사를 읽고 알고 있었다. 집으로 가서 주민등록등본과 대조해 본다고 일하다 말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슬픈 예감은 더욱 더 예리하게 우리를 찔렀다.

미O이를 처음 본 때는 2007년 화창한 4월이었다. 독일에 있는 누나가 이미 완치된 것으로 알았던 유방암이 재발했다고 연락해왔다. 전화를 받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회사에 휴가를 요청해서 4월 초에 독일로 향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누나에게 겨우 마련한 3000달러를 송금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출발해서 미국 뉴악(NEWARK)에서 환승한 후 베를린에 도착했다. 독일은 초행길이라 어디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물어 물어서 공항에서 유레일을 타고 빌레펠트로 향했다. 4월의 독일은 아름다웠다. 넓은 들판에는 한가하게 풍차가 돌았고 기차 안도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람들로 가득했다.

베른린에서 빌레펠트 가는 기차에서 본 들판 ⓒ 김유보


빌레펠트 역에 도착해서 누나가 머물고 있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찾아갔다. 누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있었고, 영어 한마디 못하시는 엄마 혼자서 한국에서 외국 국적 비행기를 타고 와서는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엄마와의 재회도 4년이 넘었다. 기쁜 티를 내지 못하고 어쭙잖은 재회를 끝내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누나를 만났다. 그렇게 간절했던 마음이었지만 누나를 눈 앞에서보자 난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뇌종양으로 전이된 암세포는 옛날 그렇게 이뻤던 누나를 전혀 다른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울컥거리는 마음에 어깨만 들썩였다. 옆에서 엄마가 자꾸 내 옆구리를 치는 바람에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 엄마를 따라 집으로 갔다. 집이라고 해봐야 학교에서 제공하는 조그마한 기숙사가 전부였다.

미O이와 아쿠아리움 방문 ⓒ 김유보


아픈 누나 찾아 독일로...미O이를 만나다

누나의 첫째와 둘째는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지냈다. 부산에서 서울로 취직해서 올라가면서 부천에서 6개월 넘게 누나 집에서 같이 살아서 더더욱 잘 알았다. 그런데 셋째는 독일에서 2002년에 태어 났다는 말만 들었지 직접 보지는 못했기에 상당히 궁금했다. 처음에는 미O이가 조금은 낯선 듯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이내 나한테 안겼고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연신 나를 쳐다봤다. 엄마는 조금 쉬면서 저녁거리를 준비하신다고 했다. 나보고 병원에 가있으라기에 미O이를 앞세우고 나섰다. 기숙사에서 호스피스 병동까지는 조그마한 오솔길로 3분 정도만 걸으면 되는 거리였다.


베델 신학대학 기숙사에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는 오솔길 ⓒ 김유보


아직 새싹이 채 올라오지 않은 썰렁한 길을 미O이가 총총거리며 뛰어갔다. 그 길을 다닌 지 8일 정도 지났을까. 숲은 순식간에 초록색으로 덮였다. 내 마음으로도 새싹이 이렇게 나는 것처럼 누나도 다시 일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엄마의 지극 정성 간호는 두말 할 것도 없었다. 약한 몸으로 금식을 하며 기도하는 엄마도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4월 10일쯤, 독일 지리도 모르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엄마를 프랑크푸르트로 모시고 갔다. 한국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서는 엄마의 어깨가 너무나도 초라해보였다. 한달 뒤 꼭 돌아오겠다는 병원 관계자와의 약속을 뒤로 하고 엄마가 떠났다.

나도 이제 작별을 준비해야만 했다. 하루가 다르게 힘들어지는 누나를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회사에 매인 몸이라 정해진 시간에 돌아가야만 했다. 조카들을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조그마한 시계를 하나씩 사서 선물했다. 물론 덜렁이 첫째는 그날 바로 잃어버렸다. 누나와 매형 것도 샀다. 이것 저것을 사고 돌아오는 길, 미O이는 너무도 밝았다. 첫째와 둘째는 엄마의 상태를 알고 있는 듯 우울한 모습을 보이곤 했지만 미O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발랄했다. 가끔씩 엄마 병실에 같이 누워서 잠도 자곤했다. 누나도 미O이가 제일 맘에 드는 듯했다. 미O이 위로 두 명은 병실에도 잘 오려고 하지도 않았고 와도 금방 돌아가곤 했다. 엄마의 낯선 모습에 이미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모든 게 무서웠을 것이다. 옆에서 쌔근쌔근 자는 미O이를 보면 누나도 자신의 모습을 잊을 수 있다고 했다. 누나에게 변변한 선물 하나 해 본 적이 없었다. 누나는 시계를 받고 너무도 좋아했다. 매형 것과 커플시계였다.

나에게 나중에 잘 되면 돈 좀 빌려달라고 하던 누나의 말에는 7년간의 독일에서의 고단한 삶이 녹아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월 교통 정기권 하나만 끊으면 어디든 다닐 수 있는 독일에서 얼마 하지도 않는 정기권이 없어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 애들하고만 살았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가끔씩 꼭 나갈 일이 생기면 옆집에서 정기권을 빌려서 나갔단다.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시도한 사업이 연거푸 실패하면서 거의 억대에 가까운 빚을 진 상황에서 누나에게 도움이 될 수도 없었기에 마음만 더 아팠다.

마지막 날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하고 누나에게 꼭 일어나서 멕시코 칸쿤으로 놀러 오라는 말을 남겼다. 누워 있으라는데 기어이 병원 입구까지 와서 날 안는 누나를 난 쳐다보지 못했다. 마지막이라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난 위 아래로 심하게 흔들리는 어깨를 숨기지 못했고, 누나는  "유보야 잘 가라"라고 말을 던지고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저녁에 미O이와 ⓒ 김유보


대단한 일을 할 것처럼 달려온 독일에서 막상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첫째 조카는 축구하느라 늘 집에 없었고 둘째는 독일 친구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했다. 매형은 박사논문 막바지라 이리저리 바빴다. 결국 나는 미O이를 보는 일이 누나를 돕는 유일한 일이었다.  저녁내내 물고 빨고 놀고 미O이를 유치원에 데려갔다가 데려와서는 오후 내내 미O이랑 놀았다. 엄마가 챙겨주는 저녁을 조카들이랑 먹고 미O이를 안고 자는 일이 열흘 동안 독일에서 한 일이었다. 그런 미O이가 아빠랑 같이 나의 멕시코 귀국길을 배웅했다. 통통 거리며 오솔길을 내려갔고 노래를 부르며 목마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누나가 죽자 매형의 태도가 달라졌다

누나의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빠를지 몰랐다. 멕시코로 돌아온 지 보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조카들이 걱정되었다. 매형 혼자서 세 명을 살피기는 무리가 있었기에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누나의 유골이 한국으로 운반되어서 시댁 선산에 묻혔다. 그냥 산에 뿌리자는 것을 아버지가 간곡히 부탁해서 그 집안 선산에 묻었다.

그런데 누나의 사망 이후로 매형의 태도가 달라졌다. 우리 집에 전화 한 통 없었다. 우리 입장이지만 남의 집 귀한 딸을 고생만 시키다 타지에서 죽게 만들었다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는 필요했는데 일절 연락을 끊어버렸다. 가끔 손자손녀들이 궁금해서 엄마가 전화를 하면 퉁명스럽게 잘 지낸다고만 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피를 토하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박사를 받으면 뭐하냐고 우리 누나만 고생하다가 타지에서 죽어 버렸는데... 차비를 주지 않아서 그렇게 좋아하는 교회도 못 다녔다는데...

나도 다시 개인 사업을 하면서 7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1년에 서너 번씩 한국에 들어가면 엄마랑 둘이서 자리에 누워서 매일 두 시간씩 넘게 독일 이야기를 했다. 지금 누나가 유방암 초기였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한국으로 데리고 와서 수술을 받게 하는 건데... 이미 매형은 재혼을 한 상태였다. 그러다 가끔 애들은 어떻게 지내요?라고 물어보면 큰조카는 축구부 합숙소에서 지내면서 주말이면 우리 집으로 온다고 했다. 매형은 우리 집에 일절 연락을 끊었는데 조카들은 여전히 우리 집을 찾는 것을 보면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 듯 보였다. 둘째는 독일에서 잘 지내던 친구집에서 초청을 해서 독일로 가 있다고 했다.

"미O이는?" 엄마도 미O이가 좀 걱정이라고 했다. "친척 집에 보내져서 키워지고 있다는데…"라며 말을 흘리시기에 "내가 데려갈까?" 물었다. "그래, 그러면 좋겠다마는 저쪽에서 보내겠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집에 큰애가 왔다가는 것을 알고는 부산에 못 가게 했다는 사람들인데 오죽하겠나 싶었다. 큰조카는 우리 집에 다녀 가는 것을 비밀이라고 했다. 내가 한 번 연락해 볼까 하다가 잘 지내겠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한 게 이렇게 천추의 한이 될 줄은 몰랐다.

이 이후로도 나는 엄마에게 두어 번 정도 매형과 연락되면 미O이 물어보시라고 지나가는 듯 말을 남긴 게 전부였다. 작년에 아버지께서 6개월 정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 물론 매형은 전화 한 통 없었다. 큰조카만 아버지 장례식장에 참석했다가 돌아갔다. 학교를 그만두고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형과 누나가 대안학교라도 보내라고 매형에게 권했던 모양인데 나도 할 만큼 했으니 그 자식은 놔두라고 하면서 오히려 화를 냈다는 소리를 들었다. 둘째누나의 죽음도 서러운데 조카들도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말에 우리 집 식구들은 상당히 마음이 아파있는 상태였다. 특히 큰놈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다들 마음이 많이 쓰이고 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큰조카에게 "멕시코로 삼촌이랑 같이 갈래"라고 물었더니 "거기서 뭐해요" 하면서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돌아갔다. 그 때는 몰랐다. 미O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작년 4월 이었으니 미O이는 이미 죽은 채 이불 속에 방치되어 있던 때였다.

거의 실시간으로 카카오톡을 하던 나와 내 동생은 설마가 사실로 확인되자 통화를 했다. 동생이 엉엉 운다. 이 새끼를 이 새끼를.. 하면서 우는 동생의 마음과 내 마음은 똑같았다. 우리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조카들은… 하면서 자책하는 모습에 나도 심히 부끄러웠다. 좀 더 적극적으로 미O이를 찾아보고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서울에서 기껏해야 하루 정도 머무는 출장길이라는 핑계로 미O이를 찾지 않은 나 자신을 심하게 질책했다. 독일에서처럼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고 감정을 억누를수 없었다. 매형은 독일에서도 가끔 첫째를 혼낼 때에는 학교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몇 시간씩 체벌을 했었다. 누나도 말려보고 장모인 엄마까지 말려봐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미O이도 그렇게 대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미O아… 삼촌이 정말 미안해

이제 미O이는 다시 엄마 옆에 누웠다. 그 옛날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엄마면 좋았던 그 품으로 돌아갔다. 여기 저기를 통통 거리며 돌아다니다 아무 일 없듯이 엄마 침대 한 편에 누워서 자던 미O이.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말기 암으로 얼굴이 퉁퉁 부은 엄마지만 그냥 따뜻한 엄마 품이 그리웠을 우리 미O이…

미O이 엄마 옆에 묻히다 ⓒ 김유보


미O아… 미안해… 이 삼촌이, 이 삼촌이 널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까. 미O아. 한껏 안아줄 엄마랑 빌레펠트 오솔길을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렴. 삼촌이랑 다녔던 빌레펠트 시내도 돌아보고 도시락 싸서 놀러 갔던 아쿠아리움도 가고, 지하철도 마음껏 타고 좋은 기억들만 간직한 채 엄마랑 손 잡고 하늘나라로 가 있어. 나중에 삼촌이 가서 미O이를 엄마랑 같이 꼭꼭 안아줄게.

못난 삼촌이
2016. 2. 6. 멕시코시티에서
#부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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