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세 가지 이유

등록 2016.02.12 10:41수정 2016.02.1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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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2013년 2월 출범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한일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였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본 극우 세력들의 망언을 우려하며 위안부 문제 해결은 '피해 할머니들이 수용할 수 있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원칙을 천명한 적도 있다.

그러나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는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었고 대통령 스스로 천명한 원칙에도 어긋났다. 왜냐하면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도대체 한국 정부는 어느 나라 정부이냐'며 합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절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 60% 이상이 납득할 수 없는 잘못된 합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2·28 위안부 합의 이후 박근혜 대통령 정책 수행 지지율도 추락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인 2015년 연내 타결이라는 아베의 그럴듯한 협상 유혹에 넘어갔을 수도 있다. 더구나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일 3각 동맹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미국의 입김이 거세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밀고 당기는 외교협상이라지만 합의 내용은 박근혜 정부 스스로 자기모순을 드러낸 과정이었으며 할머니들에겐 모욕적인 수준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합의 이후 아베 수상이나 외무상이 보여준 배반된 언행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일본 중의원 회의 당시 야당의원이 '총리가 직접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의에 아베 스스로 자신의 입으로는 사과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나아가 2016년 2월 UN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아베는 재차 2007년 아베 1차 내각의 결정을 확인시키며 일본 정부와 군은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 정부가 일본의 거짓된 태도를 애써 외면하면서 합의 결과만을 정치적으로 과대 포장한 느낌이다.

박근혜 정부의 표현대로 역대 어느 정부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정부 출범 시작부터 위안부 문제를 한일 외교 제1의 현안으로 격상시켜 일본을 압박한 박근혜 정부의 태도는 칭찬받을 만하다. 그렇지만 12·28 합의는 한 마디로 실패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박근혜 정부는 일본의 이중적 태도를 격렬히 비난하면서 합의 파기를 선언해야 옳다. 그것이 피해 할머니의 명예와 국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주권을 지닌 국가의 정부로서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한 의무이다.

그렇다면 해방된 지 7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베를 비롯한 자민당 집권세력은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후손들이다. A급 전쟁범죄자가 만든 정당이 자민당이다.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바로 그렇다. 그런 이유로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들과 내각 장관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발적 매춘'이라는 등 망언을 일삼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공식화하였다.


전쟁범죄자들! 그것도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한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확인시키는 정치적 행위이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쟁 범죄에 대해 후손으로서 부끄러움은커녕 뻔뻔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솔직히 자신들이 군국주의의 후예들임을 공식화하고 '전쟁범죄'가 '범죄 아님'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키는 행위이다. 그런 후안무치한 태도가 2014년 아베 내각 각의 결정으로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를 부정하고 2015년 일본 평화헌법을 스스로 부인하였으며 자위대 해외파병 등 안보법 개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요컨대 극우정당인 자민당이 집권하는 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은 요원한 일이다. 2009년 보수 우파 민주당 출신 일본 수상을 지낸 하토야마 유키오는 지난 해 8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추모비를 찾아 무릎을 꿇은 채 사죄한 것과 확연히 대비가 된다. 일본 국민들이 우경화된 현실에서 일본 내 정치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는 한,  위안부 문제 해결은 어려운 일이다. 

둘째, 역대 한국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이다. 이승만-장면-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 정권 40여 년 동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인식이 없었다. 최초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출신이었음을 고백한 분은 배봉기 할머니이다. 1975년 오키나와에서 살던 배봉기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고백하지만 한국사회에 반향은 없었다.

40년 넘게 지속된 독재시절 동안 한국사 교과서조차 위안부 관련 서술이 전무했다. 정신대라는 용어조차 생소해서 교과서에 기술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조차 몰랐던 시절이었다.

1991년 8월 14일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김학순 할머니가 명동 향린교회에서 위안부 출신임을 고백한다. 위안부, 정신대라는 용어가 한국사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 90년대 중반 6차 교육과정 개정 이후부터였다. 오히려 역사교과서보다 90년대 초 방영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국민들은 정신대라는 용어, 군위안부의 실상을 여주인공 '윤여옥'을 통해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역사교과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방송드라마를 통해 대중은 역사의 진실에 조금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사회공론화되고 국제사회에서 세계적인 문제로 이슈화되었으며 지속적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것은 오롯이 정대협('한국 정신대 문제대책협의회'의 약칭)과 나눔의 집 등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정신대 관련 연구자들의 숨은 노력과 끈질긴 활동 때문이다.

역대 어느 정권도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공식적인 사죄와 엄중한 항의를 표방한 적이 없었다. 2005년 3·1절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면서 가해국 일본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하라'고 강력히 항의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한국 정부는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피해당사국인 한국 정부가 가해국 일본에 대해 자국민이 침해당한 권리의 구제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거나 소극적일 때 가해국 일본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적 교섭의무를 지지 않는 것이 국제법상 관례라고 한다. 오죽하면 할머니들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싶다'고 절규했을까!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것은 일본 국회 차원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그리고 전쟁 범죄 인정과 역사교과서 기술이다. 12·28 합의에는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지 않다. 10억 엔은 배상이 아니라 보상일 뿐이다. 거기다 12·28 합의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고 못을 박았다.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 존엄을 회복시키는 내용이 전무하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들에겐 모욕적인 수준이다.

진정성 없는 사과와 100억 원 정도의 보상으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협상이라니! 더구나 그 대가로 소녀상 이전을 요구하다니! 생각할수록 거만하고 오만불손한 아베 정권의 위선적 태도가 느껴진다. 한국 정부는 좀 더 당당하고 줏대가 있어야 한다. 피해 당사국 정부가 당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과거의 상처가 아물 수 있으며 그 정도의 줏대 없이 한일관계의 화해와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한국 국민의 무심한 태도와 방관자적 삶의 자세에 있다.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일본 수상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된 수요시위가 2011년 1천 회를 넘기고 24년이 지났다. 정대협 활동가들과 피해 할머니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전 세계 23개국 60여 개 도시에서 수만 명이 참여하는 연대시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당사국인 한국에서는 통상 수요시위 참여 인원이 200~300명 정도로 매우 적다.

역설적이지만 박근혜 - 아베의 12·28 졸속 합의가 오히려 국민적 분노를 일으키면서 무심한 국민들로 하여금 역사에 눈을 돌리게 해주었다. 2016년 들어 1월 수요시위 참여인원은 200~300명 수준이 아니라 그 두 배 내지 세 배를 넘어섰다. 참여계층도 초등학생부터 대학생들의 조직적인 참여, 그리고 남성들까지 다양해졌고 관심도 높아졌다. 이 모든 게 정대협, 나눔의 집 등 관련단체 활동가들과 할머니들의 눈물겨운 투쟁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

추정하기를 20만 명 조선의 처녀들이 끌려가서 일본군인에게 맞아죽고 병들어 죽었으며 집단학살당하기도 하였다. 억울하게 죽어도 '군수품 손실' 정도로 처리되었을 뿐이다. 살아남은 조선 여성들은 캄보디아 '훈' 할머니나 '홍강림' 할머니처럼 이역 땅 현지에서 생을 마감한 분들이 무수히 많다. '정서운' 할머니처럼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 귀국한 분들 중에서 대부분 돌아가시고 현재 생존해 계신 분들은 46분이다. 평균 연령이 90세 전후로 고령이다.

24년이 지나도록 수요시위가 진행됐지만 일본대사관 문이 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CCTV로 수요시위 상황을 감시할 뿐 일본대사관 직원이 추운 날 따뜻한 차 한 잔 대접한 적이 없었다. 자민당 집권 70년 동안 일본은 오직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를 애써 외면했고 지금은 다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린다.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면 피해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역사의 진실은 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다. 10년 내에 할머님들이 한 분 두 분 다 돌아가실 것이다. 그래도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군위안부 = 전쟁 범죄', '국회 차원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법적 배상', 그리고 '교과서 기술'을 줄기차게 요구하며 수요시위를 이어간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정의롭게 해결될 수 있다.  문제는 매주 수요시위가 진행되는 12시- 1시 사이 일본 대사관 앞을 오가는 일반 시민들의 무심한 태도에 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걸어가는 그들 가운데 수요시위에 잠깐이라도 참여하여 일본대사관을 향해 외치는 작은 목소리에 힘을 보태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그냥 이를 쑤시거나 커피를 마시며 힐끗 쳐다볼 뿐 동참하지 않는다. 마치 남의 일처럼 단절된 시민들의 무심한 태도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적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국가 범죄이자 국가가 조직적으로 자행한 전쟁 범죄이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피해국 한국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나아가 한국 시민이라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최근 논란이 된  <제국의 위안부>의 박유하 교수의 주장처럼 모집업자가 저지른 '개인 범죄'이거나 일본군인과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여성들이 '동지적 관계'였다는 서술 역시 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동안 시민의 무관심과 방관자적 삶의 자세가 낳은 지적 풍토의 한 부박한 단면이다. 극히 일부의 사실을 성급히 일반화시킨 오류이자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충족시키지 못한 내용의 책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부박한 지적 환경과 단절된 시민의식 탓이다. 부박한 환경, 단절된 의식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묘책은 응당 시민의 참여와 연대일 것이다
#12,28 합의 #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수요시위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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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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