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 중단' 비판, 너무 지나치다

[주장] 필리버스터는 견제의 수단이지, 봉쇄의 수단이 아니다

등록 2016.03.03 10:36수정 2016.03.0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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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 8일째인 지난 1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이 방청온 시민들로 가득하다. ⓒ 권우성


더민주의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에 대하여 SNS를 중심으로 야권 지지층 사이의 비판 여론이 분출하고 있다. 격정, 분노, 허탈, 한탄 등등의 감정이 기저에 깔려있는 필리버스터 중단에 대한 비판론(아래 비판론)은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필리버스터 중단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을 이해한다고 해도 현재 분출되는 비판론은 그 정도가 너무 과하다고 판단된다.

더 나아가 비판론이 계속 확대될 경우 진보 야권에 상당히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비판론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 과정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하나, 이 글은 필리버스터 중단 자체는 기본적으로 잘한 결정이라는 입장을 주장하려고 한다.

필리버스터는 견제의 수단이지, 봉쇄의 수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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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진보네트워크 등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 46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오전 국회앞에 모여,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테러방지법 제정을 막기위해 8일째 진행되고 있는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에 반대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우성


비판론자들의 논거는 명쾌하다. 필리버스터를 중도 포기하는 것은 진보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이는 선거 전략상 볼 때 오히려 불리하다는 것이 이들의 논거다. 단순히 명분론만 내세우지 않고 실리적인 요인을 함께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이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확신 정도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 주장의 근거는 틀렸다. 먼저 필리버스터 목적에 대해서 비판론자들 상당수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들은 필리버스터 중단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면 '그럼 필리버스터를 왜 시작했나'라는 반론성 질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의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 장치이지, 봉쇄 수단이 아니다.

필리버스터는 다수결에 의해서 결론이 나기 전에 소수당이 의회와 국민을 상대로 자신들의 견해를 최대한 설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그 과정 속에서 소수당의 견해가 반영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래서 필리버스터에 의해서 대중적 여론화가 상당히 이뤄진 이번 경우만 놓고 본다면 여당은 야당의 수정안 요구에 대해서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여당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공천을 앞둔 시기라는 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되기는 하나 여당은 이 사안에 대해서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여기서 필리버스터는 사실상 수명이 다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필리버스터는 봉쇄의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남은 대안은 중단하는 것 외에 없다. 사실 대안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대안이라고 하면 자율적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 중단은 유일한 선택지다. 국회 소수당이고 집권도 하지 못한 야당의 처지에서, 이 이상 제도적인 방어와 견제를 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물론 장외투쟁이라는 방법이 남아 있기는 하다. 그리고 비판론자들 상당수는 필리버스터로 인해 고양된 현재의 열기를 위와 같은 또 다른 저항의 수단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 상황에 대한 객관적 진단이라고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대안은 필리버스터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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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승부를 봐야할 곳은 '선거'다. ⓒ 유성호


예상치 못했던 필리버스터에 대한 긍정적 여론 형성은 그동안 무기력했던 야당이 필리버스터라는 수단을 통해서 제도적 저항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야권 정치인들의 열정과 실력을 확인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라는 냉소를 받았던 의회가 필리버스터를 통해서 국민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도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은 모두 필리버스터를 할 수 있는 의회와 국회의원의 정당한 기능 및 특권과 관련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의 독주를 견제하는 장치이지, 봉쇄의 장치가 아니다. 현재 열기는 의회정치의 정상적 복원 및 신기능의 확인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외 투쟁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이와 같은 현실을 잘못 독해하는 것이다.

물론 비판론을 주도하는 전통적 야권 지지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의회를 통해서 형성된 에너지를 의회 밖으로 갖고 갔을 경우 이것이 지속될 것 같은가? 장외투쟁으로 옮겨가는 순간 여론은 싸늘하게 시들 것이다. 과거 사례를 보아도 정당이 대중적 집회에 결합하는 경우는 집회의 대중화가 정점에 이를 때다. 정당이 주도하면 정치적 동원이라는 내외의 비판이 제기되기 때문에 사회단체나 정당이나 모두 이와 같은 결합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의회에서 봉쇄된 사안을 갖고 장외로 간다는 것은 정당이 장외투쟁을 주도하는 모양이 된다. 이것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심각한 정세 판단의 오류다. 보수층의 대대적인 역공을 고려하지 않아도 비판론자들이 내심 생각하는 대안은 사실상 현실성이 없다.

더군다나 지금은 선거를 목적에 둔 상황이다. 정치 세력에 대한 평가는 결국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서 좌우된다. 지금은 집권당이자 국회 다수당인 현재 보수 세력의 의도가 정치적 사안에 더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현실이 싫으면 선거를 통해서 비판 세력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런데 필리버스터를 지속하면 선거 일정 자체가 불투명해지게 되는데, 야당이 진짜 승부를 겨뤄야 할 선거를 거부했다는 비판은 매우 치명적인 사안이 된다.

지금은 총선을 목전에 둔 상황이다. 대선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고 하는 총선이 목적에 있기 때문에 야권 지지층이 이 문제에 깊은 절망을 느낀다면 선거 승리를 통해서 제도적인 견제 수단을 합법적으로 쟁취하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다. 필리버스터는 견제 수단이지 봉쇄 수단이 아닌 것이고, 야당이 승부를 봐야 하는 곳은 장외가 아니라 선거다.

더민주 지도부의 두 가지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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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의에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가 참석해 야권 통합을 제안하고 있다. ⓒ 유성호


물론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는 과정에서 더민주 지도부는 두 가지 잘못을 했다. 우선 사안이 중대하고 이 사안에 대한 여론화가 정당 단위를 넘어서 사회적 확장이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단 결정을 도출해내는 과정에서 큰 실수를 했다고 본다. 처음부터 3월 1일처럼 집단토론을 거친 후에 후퇴안이 나오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리고 해당 사안을 이념이슈라고 규정하면서 경제(민생)이슈와 대립적으로 설정한 것도 섬세하지 못한 태도로, 지지층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 있는 행위였다. 이 사안을 두고 보수의 프레임에 걸려든 것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진단은 맞다.

다만 경제 이슈를 메인 이슈로 제기하겠다는 의도 자체는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지금은 평화(안보)도 위기, 민주주의도 위기이고 각종 수치에서 드러나듯 경제 역시 위기다. 총선이라는 중요 선거를 앞두고 어떻게 보면 야당은 정부 여당을 공격할 수 있는 소재가 매우 많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류 언론의 매우 편향된 보도 태도를 고려할 때 야권은 이 3가지 이슈를 모두 전면화하기 사실상 어렵다.

제일 좋은 것은 위 3가지를 공히 관통하는 핵심 프레임, 구호, 정책을 정교하게 구성하는 일이겠으나, 지금 당장 그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은 그동안 보수가 진보보다 유능하다고 평가를 받아왔던 경제 분야에서마저 급격한 위기 징후가 각종 수치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경제 이슈가 가장 큰 파급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경제 위기를 메인 이슈로 내세우고 평화와 민주주의 위기를 그 다음 이슈로 강조하는 것은 전략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다. 물론 경제 이슈를 이념 이슈(여기서 이념 이슈는 민주주의와 평화 이슈를 지칭한다)와 대비된 것으로 프레임화한 것은 잘못이나 의도 자체는 옳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비판론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유불급이다. 지금 필리버스터 중단론과 지속론을 대립적인 관점에서 구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비판론은 중단론의 의도를 부정적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상호 대립이 아니라 보완적인 관점이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총선을 목전에 둔 지금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장신기 기자는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 사회 보수화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진보에서 보수로 정치적 정체성의 변화를 보인 일반인 32명을 심층인터뷰하여 <사람들은 왜 진보는 무능하고 보수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필리버스터 #경제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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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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