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는 대로 다했다, 잘릴 줄 모르고

[서평] 화이트 칼라 실업의 늪 <희망의 배신>

등록 2016.03.18 09:10수정 2016.03.1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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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부모 세대의 노력이 자녀 세대의 소득 성장으로 이어지던 시대가 있었다. 블루칼라 노동자인 부모가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키면, 자녀는 대학에서 화이트칼라가 되어서 사회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렇게 화이트칼라가 된 자녀는 부모 세대보다 많은 소득을 벌어서 안정적인 중산층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델도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 화이트칼라 중산층의 삶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배신 시리즈'의 작가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이번엔 화이트칼라 일자리를 얻기 위해 현장을 체험했다. 사회에 만연한 긍정 강요를 비판했던 <긍정의 배신>과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 현실을 고발한 <노동의 배신>으로 유명했던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마지막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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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에런라이크, 희망의 배신, 부키, 2012 ⓒ 바버라 에런라이크, 희망의 배신, 부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생물학 박사 출신의 저널리스트 겸 작가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바버라 알렉산더로 합법적으로 바꿔 화이트칼라 구직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홍보담당자로서 다양한 일들을 해왔고 이벤트 담당도 할 수 있다며 중산층 화이트칼라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녀는 커리어 코치나 컨설턴트들을 만나서 자신을 홍보하는 법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정보를 습득하기도 한다. MBTI테스트나 별로 과학적 근거가 없어 보이는 심리학 테스트도 받는다.

'당신의 성격은 ㅇㅇ타입이에요!'라는 시덥잖은 조언을 듣고 그 사람들이 말하는 긍정적인 행동과 마음가짐을 위해 노력해 본다. 열정적이면서도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일할, 뽑고 싶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정말 구직자가 된 것처럼 정력적으로 컨설턴트 상담부터 이력서 투척까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지 다 하게 된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10만 달러를 받던 임원이던 사람은 지나치게 연봉이 높아서 해고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인건비 절감이 제일 효율적인 흑자 전환 수단이기 때문에 CEO는 인력을 해고할 강할 요인이 있다.

따라서 화이트칼라들, 그들 중에서도 양처럼 온순하고 잘 복종해서 사내정치, 파워게임엔 약한데 능력은 뛰어나서 직급이 높아 많은 인건비를 들이게 하는 사람은 해고 대상이 된다. 그들이 요구하는 인간상인 비판적이지 않고 온순하며 복종적인 사람들이 실제론 가장 쉽게 해고 당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반면 회사의 문제점과 약점을 쥔 사람은 쉽게 해고되지 않는다.

저자는 컨설턴트의 조언을 받아서 어떤 성격으로 면접을 대해야 할지 배운다. 반드시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비판정신은 시장에서 권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구직에 도움이 된다고 교회에 갔지만 영성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라는 이야기만 듣고 나와 버린다. 다양한 모임에 가봤지만 인맥을 이용해서 취업하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았다. 이벤트 담당자, 홍보 전문가임을 이용해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지만 여의치 않았고 취업용으로 낸 이력서는 답장도 없다.


한 번은 컨설턴트가 조언한 대로 홍보 전문가로서의 자신을 홍보하기도 한다. 바로 자신에게 조언한 그 컨설턴트에게 말이다. 컨설턴트의 컨설팅이 어떤 의미에서 나쁜지 지적하고 자신을 고용할 것을 권하나, 컨설턴트는 벽장만한 정리도 안 된 사무실에서 수면제를 마시며 살고 있었기에 소득을 올리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긍정을 권하는 컨설턴트도 사실 약이 없으면 잠도 못 자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색깔을 대비시켜 보면서 옷감 견본을 목에 두르는 일이 재미나야 했는데 웬일인지 갑작스런 메스꺼움을 느꼈다. 나를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생산품'으로 만들려면 우선 내가 하나의 상품, 물건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메스꺼움은 단순히 점심으로 먹은 베이컨 더블 치즈버거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의 손길로 화장을 마친 내 얼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창백함이 떠돌았다. 인간에서 물건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중간 단계로 일종의 죽음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본문에서

저자가 들은 또 다른 조언 중 하나는 '네트워킹'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인맥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접근하고 정보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들이 추천으로 일자리를 얻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주의점이 있는데 다른 구직자들은 만나면 안 된다. 그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저자는 네트워킹을 하기 위해 다양한 모임도 가보고 교회도 가보고 돈내고 상담도 받아본다. 심지어 외모 꾸미는 것도 코칭을 받는다. 검은색이나 회색을 좋아했지만 밝고 활동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옷도 바꿔본다. 그러나 새로운 모습으로 구직박람회도 가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저자는 취업에 끝내 실패한다.

물론 저자가 가진 많은 단점이 있었다. 나이가 많았고, 원래 기업 업무를 하던 사람이 아니라 경력이 비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신원보증을 해주거나 경력을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이 구직박람회나 네트워킹, 상담에서 만난 사람들과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자신보다 뛰어나고, 어렸으며 경력이 풍부했던 그들 역시 구직에 실패했음을 확인한다.

저자가 구직 활동을 하며 만났던, 해고된 사람들은 저자보다 나이도 훨씬 어린 사람들도 있었고, 남성인 사람들도 있었으며 나름의 기술과 자격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여자가 여자다우면 권위를 의심받으며 여자답지 않으면 성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비판받기 때문에 남성인 게 유리하다).

그러나 대부분 컨설턴팅이나 네트워킹에 시간을 쓴 다음 다른 화이트칼라 직업으로 옮기지 못했다. 일부는 블루칼라로 옮기지만 자신의 문화 코드를 바꾸지 못하여 적응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동산 중개업이나 기본급 없는 영업계약은 앞날을 보장하지 못한다.

저자는 이런 일련의 구직 환경에 대해 시니컬한 어조로 묘사한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거나, 모든 건 신의 뜻이라고 전하는 행위를 비판한다. 취업 과정에서 만연한 '긍정'의 강요와 다른 실업자를 피하라는 컨설턴트들의 조언이 화이트칼라 실업 계층이 모여서 대화를 하거나 비판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억압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정말로 기업이 합리적인지 이의를 제기하며, 화이트칼라 실업자들이 전통적인 피억압자들처럼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경향에 대해 언급한다. 저자가 겪은 경험과 구조에 대한 비판에 집중해도 가치가 있고,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직된(그리고 구직이 안 되는) 사연에 집중해도 좋은 책이다. 공부도 일도, 하라는 대로 해온 수많은 화이트칼라들의 현황을 곱씹으면서 읽어볼 만하다.

희망의 배신 - 화이트칼라의 꿈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부키, 2012


#바버라 에런라이크 #희망의 배신 #화이트칼라 #중산층 #실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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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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