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년, '4.16 없애기' 끝판왕이 온다

[세월호 참사 2주기 특별 기고 4] 지독하고 악랄한 지우기...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등록 2016.04.15 11:05수정 2016.04.1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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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리본. ⓒ 김유철


전 국민이 TV와 스마트폰으로 참사를 구경해야 했던 충격적인 기억은 아직도 그대로다. 2년 전, 우리는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구경꾼' 정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국가와 국민, 21세기와 첨단의 현대 민주사회.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 큰 배 안에 304명이, 그것도 섬과 가까운 연안에서 아무런 안내와 구조도 없이 수장되는 동안 대통령은, 군대는, 공권력은 그 자리에 없었다. 제대로 된 언론도 없었다. '전원 구조'라는 지상파 언론의 오보를 그대로 믿고 싶었던 우리만이 있었다.

참사를 두고 '살인마', '학살'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논란이 된 표현들이기도 했다. 사실 '살인마'라는 표현은 2014년 4월 19일 당시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로 가자'고 결심한 다음 날, 공권력이 그들의 청와대 행진을 막았던 4월 20일 새벽 가족들의 입에서 나왔다. "정부는 살인마, 아들딸 살려내라!"고 말이다.

'학살'. '고의적 수장'으로 해석될 지경이었던 당시 상황은 '학살'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오직 두 눈으로 보게 된 광경을 통해 얻은 연상이었다.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참사가 일어난 해역의 지점이 손에 잡힐 듯 너무 가까운 거리여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동거차도. 그곳에 가면 화면의 거리보다 사고 지역이 훨씬 가깝다는 것을 느끼고 제2의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사는 섬에서 너무나 가까운, 양식장 주변인데 못 구하다니.' 오죽하면 '안 구한 것이 틀림없다'는 소리마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학살'이란 표현은 여전히 논란인 상태다. 침몰 원인, 구조 방기, 침몰한 세월호. 이에 관한 확인과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 가족의 단결된, 역사적인 투쟁과 헌신. 수없이 많은 노란 리본의 물결과 국민적 공감대. 하지만 당시 공중파 방송은 이런 상황을 교묘히 감췄고 심지어 '세월호 피로도' 등에 관해 여론 조작도 이뤄졌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 불과 2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서도 제대로 참사 원인을 알기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정부·여당의 총력적 방어, '인양 무용론'까지

정부·여당은 2014년에 세월호 이슈에 관심이 쏠리는 것을 총력적으로 방어했다. '유병언 미스터리'가 아마도 '방어의 절정'이었다고 믿는 이도 여전히 많다. 참사 이후 세월호 선원의 노트북에서 발견된 '국정원 지적사항' 문건을 보면, 국정원과 청해진해운은 마치 상관과 부하의 관계처럼 수백의 지적사항이 미주알, 고주알 한글 파일에 깨알같이 수록되어 있었다. 댓글을 통한 선거개입도 마다치 않는 충직한 감시자 국정원은 '세월호 실소유주'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가 성역 없는 조사를 막으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세월호 특조위 관련 현안 대응방안'이라는 해수부 문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해당 문서에는 'BH'(청와대) 조사 관련 사항은 적극 대응' 등 세월호 특조위 여당 추천 위원에 대한 지침이 담겨 있었다.

2014년 5월, 세월호 가족은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외쳤다. 그리고 천만 서명을 호소했다. 수백만의 서명 물결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보상과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아니라, 수사권과 기소권까지 담긴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여론이 일자 정부·여당은 총력을 다해 막기 시작했다.

특검을 대안으로 타협을 종용하던 정부·여당의 압박에 당시 야당은 굴복하고 말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가족은 특검 추천에 관한 가족의 동의권을 끝으로 조사권, 청문회권, 특검요청권을 가진 특별법 입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이 바로 2014년 11월 7일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비협조권을 발동하며 특조위 구성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는 지난 2015년 1월 16일, 김재원 당시 새누리당 원내수석 부대표의 '특조위는 세금도둑'이라는 공개적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하여 특조위는 무려 10개월의 시간을 버렸고, 지난해 하반기에 비로소 제대로 출범할 수 있었다.

특별법 무력화 시도의 절정은 정부시행령의 기습적 예고로 비롯되었다. 이 시행령 때문에 유승민 의원마저도 버림받았다. 상위법의 입법취지를 흔드는 정부시행령의 폐단이야말로 위헌이었기 때문에 유승민 의원은 국회법 개정을 야당과 합의했다가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가족과 시민은 분노했고 지난해 4월 16일 1주기에 시행령 폐기 싸움이 더 커졌다. 결국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의 저항으로 총괄권은 조정되었고, 특조위 17명은 간신히 유지되었다. 하지만 장기 말판의 '왕'과 '사'는 건졌지만 정부가 '차', '포', '마', '상', '졸'의 상당수를 빼앗고 차지해버렸다.

당시 정부와 보수진영은 '세월호 인양 무용론'을 흘리기 시작했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돈이 많이 드니 세월호 인양을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김진태뿐만 아니라 보수언론과 정치인은 '세월호 인양 포기론', '무용론'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론이 악화되자 더 이상 방어가 어려웠던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4월 16일 팽목항에서 '빠른 시일에 선체를 인양'하겠다고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참사 1주기 이후 격렬해진 '세월호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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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엄마 "아직도 내딸이 바다 속에 있어요"416세월호참사 특조위 제2차 청문회 두번째 날인 지난 3월 29일 오후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세월호 인양 관련 청문회를 참관한 미수습자 은화양의 엄마 이금희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 이희훈


1주기가 지나면서 2015년은 본격적인 '세월호 지우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정부·여당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실질적 출범을 지연시켰다. 2015년 추석이 지나서야 특조위는 조사신청과 개시를 간신히 본 궤도의 출발점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정부·여당은 2015년 9월 30일로 법적 보상신청 마감 기한을 정해 놓고 유가족을 '돈으로' 정리하려고 했다. 사실 이것이 지난해 '세월호 지우기'를 위한 정부의 핵심적 카드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산산이 부서졌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 342명은 정부 보상을 거부하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으로 보상을 오히려 제대로 못 받을 수도 있었지만 가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참 신기한 피해자 집단'이라는 이야기마저 들어야 했던 유가족들. 그들 중 다수는 중졸, 고졸이었다. 선거에서 여당을 주로 찍었다던 가난한 공업 도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가족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평생 소원은 그저 '시키는 대로 살며 모나지 않고 운이 그렇게만 나쁘지 않으면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 좀 크면 여행도 갈 수 있는' 정도였다. '자식이 결혼할 때 전세자금, 살림장만 도와줄 수 있으면 그만이고 정말 잘 되면 늙어서 고향 땅에 온 식구가 모일 수 있는 집 하나 있었으면 한다'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말 그대로 '우리 가족과 다르지 않았던' 그들은 똘똘 뭉쳐 몇 년, 몇 십 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겠다며 변함없이 늘 우리의 곁에 있었다.

가족들은 지속적인 싸움을 위해 2015년 1월 사단법인 설립을 계획했다. 하지만 해수부의 '불가' 방침으로 결국 설립하지 못했다. 무려 1년 가까이 끌다가 결국 박원순 시장이 있는 서울시에서 가족들의 사단법인 조직을 받아들였다.

이런 과정에서 정부 보상을 비롯한 각종 '흔들기'는 끊임없이 계속됐다. 유가족을 갈라놓으려는 '불순한 흔들기'는 이른바 보수언론과 극우세력에 의한 '세월호 피로도' 여론 조작으로 한층 심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세월호 지우기' 작업은 여론 몰이를 넘어 물리적 작업으로 전환됐다.

4.16연대 압수수색과 박래군 상임운영위원의 구속 사태는 진상규명 운동에 대한 '응징'에 가까웠으며 국민들을 향한 겁박이었다. '애도는 곧 죄'라고 선포한 셈이다. 박래군 상임운영위원과 김혜진 상임운영위원 그리고 수백여 명의 시민들을 향한 소환장과 벌금 기소까지. 탄압은 거셌고 이로 인하여 실제로 진상규명 운동은 위축될 위기에 처했다.

특별조사위원회를 향한 지우기 작업도 매우 노골적이었다. 위에 언급한 해수부 문건은 청와대 조사를 결정하려고 하면 '사퇴도 불사하라'는 지침이었다. 이 지침은 새누리당 추천 위원들을 향했고 5명의 새누리당 추천위원들은 빈틈없이 수행하는 듯했다.

그런데도 유가족은 굴하지 않고 진상조사 신청을 강행했다. 또 특조위는 지난해 12월 1차 청문회를 개최하여 정부 구조 책임자를 증인으로 소환하고 청문회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국회 개최를 비롯한 지상파 생중계 등 국민의 '알 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리고 2015년 12월 말 4.16연대는 탄압 속에서도 2015년 6월 28일 창립한 이래로 반년 만에 4160명의 회원 모집을 돌파하였다. 4.16연대 회원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가족을 돕는 일이며 진상규명을 위한 일과 다름없다.

가족과 시민이 함께 지도부를 구성하고 운영을 하는 4.16연대를 위축시키려 했던 정부의 의도는 끝내 실패했다. 올해 4.16연대는 2기 총회를 거치며 2016년 정부여당의 이른바 '세월호 없애기'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채비를 갖추며 2주기 노란리본의 물결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세월호 종결 구도'?

2016년 세월호 없애기의 절정은 특조위 해체와 인양 주도권을 통해 드러나게 될 전망이다. 특조위의 실질적 구성과 조사가 보장된 시점은 지난해 하반기였다. 이에 따라 특별법에 보장된 총 18개월의 조사 기간으로 계산하면 특조위는 적어도 올해 연말까지 조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올해 6월까지로 특조위 조사 기간을 못 박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월 1일을 특조위 구성의 시작이라 주장하고 있다. 특조위 임명장 전수 수여는 지난해 3월 9일에 이뤄졌으며 예산 첫 지급은 8월이고 조사관 채용은 그 후였다.

정부의 의도는 7월~8월로 예정된 세월호 인양 전에 특조위 조사를 해체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인양 후 정밀 조사와 증거 보전에 관한 사항을 정부 주도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특조위가 두 번의 요청 권한에 따라 국회 의결을 요구한 특검 역시 마찬가지다.

여당은 정부 주장의 특조위 조사기간 중 특검을 처리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명백히 보여주었다. 특검의 동력을 상실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19대 국회에서 여야는 문서상으로 특검을 합의한 바 있다. 특검과 특검 후보에 관한 추천 합의사항까지. 5월 30일이 19대 국회의 마지막 기한이다. 하지만 19대 국회가 특검을 위한 본회의를 열지는 미지수다.

올해 핵심 정국은 인양을 둘러싼 '세월호 종결 구도'일지도 모른다. 정부는 세월호 인양 후 정밀조사에서 특조위를 비롯한 민간인과 가족을 배제하거나 제한한 다음 세월호의 보존처리 역시 정부 주도로 처리하고 '합동영결식을 해서 세월호 종결을 선언하자'고 할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세월호 없애기'의 끝판왕인 것이다.

아무것도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고 정부 책임자는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다. 심지어 국정원 관련 의혹이 나왔음에도 유착 여부가 수사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호 수사 종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반드시 이뤄져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국민이 제대로 국민 대접을 받는 안전사회로 가자'는 우리의 약속이었다.

우리의 기억은 살아있다. 청와대와 정부청사를 앞에 둔 광화문 416광장과 안산 합동분향소, 기억저장소와 단원고 기억교실, 팽목항 분향소와 동거차도 감시 천막까지. '세월호 현장'은 건재하다. 참사의 현장을 지키고 기억하려는 가족의 눈물겨운 헌신과 희생은 변함없다. 이를 지지하고 그 곁에서 함께하는 시민의 행렬도 끊임없다.

이러한 기억은 참사의 현장과 관련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내 100여 곳과 해외의 전 세계적 거점에서 시민과 교포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세월호 기억하기'는 만 2년이 된 지금까지 소멸, 소강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성을 띄고 있다. 여러 조치들이 시도되고 장기성을 위한 연결과 방안으로 심화발전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5.18 책임자 심판에 15년, 세월호 진상 규명은 더 빨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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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오전 경기도 안산 세월호희생자합동분향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주인을 찾지 못한 유류품을 세탁한 뒤 건조를 위해 교복 단추를 채우고 있다. ⓒ 이희훈


노란 리본 나눔과 피켓팅, 서명을 비롯한 행사, 종교 의식, 영화 관람, 문화예술적 확산 등 기억의 힘은 그대로이다. 그리고 기록과 연구는 더 많은 시민에 의해 확산되고 있다. 진상규명을 연구하고 확산하는 노력은 416가족협의회, 특조위, 4.16연대 뿐만 아니라 시민의 힘으로 다양, 다각화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4.16운동이자 4.16 기억과 약속의 힘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4.16연대는 4대 약속의제를 제시하고 기억하고 심판하여 투표할 것을 호소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등 여러 정당들이 약속했고 450여 명의 후보자들도 동참했다. '세월호 막말 후보자 정보 공개'를 비롯해 낙선 후보도 선정했다. 또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독하고 악랄한 지우기, 없애기 작업은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한 바 있다. 1980년 광주의 학살을 지우고 없애려는 그 폭압은 지금에 비교하면 물론 비교불가다. 다만 21세기에는 '지우기'가 더욱 교묘하고 정교하게 일어나고 있다.

1980년대 학생과 국민의 처절한 투쟁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사진 슬라이드를, 비디오를 몰래 보며 눈물을 삼키며 잊지 않고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 다짐했다. 그 무수한 세월 끝에 결국 두 전직 대통령을 심판대에 세워 사형과 무기징역 구형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배운 게 있다. 그래서 우리는 4.16연대를 결성했고 4.16연대의 대학생 부문조직도 건설하려고 준비 중이다. 1980년 5.18이 15년 끝에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 비로소 되었다면 2014년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은 그보다는 빨리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역사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긴 기다림의 반복은 안 된다. 역사는 국민의 힘으로 발전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민의 외침이었고 4.16운동의 강령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배서영 시민기자는 4.16연대 사무처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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