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의 히잡 논쟁, 논점이 빗나갔다

[주장] 히잡에 얽힌 이란의 굴곡진 현대사, 박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

등록 2016.05.03 07:18수정 2016.05.0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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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을 국빈 방문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오후(현지시간) 테헤란 메흐라바드 공항에 도착, 스카프의 일종인 '히잡(hijab)'을 착용하고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히잡 착용은 양국 관계 발전을 도모하고 이슬람 방문국의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 연합뉴스


히잡은 이슬람권 여성들이 착용하는 베일의 일종입니다. 이 히잡이 우리나라에서 난데없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발단은 이란을 국빈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히잡의 일종인 '루사리'를 착용한 데서 불거졌습니다.

오가는 주장을 요약하면 '히잡은 여성 억압의 도구인데, 여성인 박 대통령이 착용한 건 사리에 안 맞지 않느냐?'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미셸 오바마 영부인, 그리고 민주당 유력 대선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등이 아랍권 방문시 여성억압을 이유로 히잡 착용을 거부한 선례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의 히잡 착용은 논란을 부를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신발을 벗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전 히잡을 착용하고 이란 땅을 밟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청와대의 설명대로 방문국의 문화를 존중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란이 어떤 나라입니까?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이며 시아파 종주국이란 자부심으로 가득한 나라 아닙니까?

이란 현대사는 더욱 극적입니다. 이란의 굴곡진 현대사는 풍부한 석유 매장량과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이란은 원유 매장량 세계 4위인 석유 부국입니다. 게다가 이란 석유는 지표면에서 얕은 곳에 매장돼 있어 채굴하는 데 큰 비용이 들지 않는 장점도 있습니다.

1951년 반외세 민족주의를 앞세워 총리에 오른 모사데크는 석유자원을 국유화시킵니다. 이런 조치는 영국, 그리고 미국을 자극했습니다. 영-미는 군부 쿠데타를 사주해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팔레비를 국왕으로 옹립합니다. 이란에서의 정변은 1972년 칠레 군부 쿠데타의 전주곡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팔레비는 말이 국왕이었지 사실상 영-미 석유자본의 통제를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팔레비는 외세를 등에 업고 온갖 전횡을 일삼았고, 이 때문에 이란 국민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져 갔습니다. 이란 국민들의 누적된 분노는 결국 1979년 이란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으로 폭발하고야 맙니다. 이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이슬람 최고 종교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갖는 신정체제가 들어섰습니다.

미국은 이 사태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팔레비는 지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에 망명을 신청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팔레비의 망명을 거절하면 미국이 지원하는 제3세계 독재자들이 미국에 등 돌릴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란 국민들은 분노했습니다. 팔레비의 소환을 요구하며 연일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같은 분노는 인질극으로 번졌습니다. 청년학생들의 주도로 대사관 진입을 시도했고, 급기야 대사관 직원들을 볼모로 잡았던 것입니다. 소위 '이란 미 대사관 인질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이란을 적대관계로 돌린 기념비적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박 대통령, 이란 현대사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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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을 국빈 방문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오후(현지시간) 테헤란 메흐라바드 공항에 도착, 스카프의 일종인 '히잡(hijab)'을 착용하고 관계자와 대화를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히잡 착용은 양국 관계 발전을 도모하고 이슬람 방문국의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 연합뉴스


이 지점에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이란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히잡을 착용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 이후 이슬람 율법은 이란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했습니다. 이란이 여성 외국 정상에게 히잡 착용을 요청한 배경도 따지고보면 이슬람 혁명이 근원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정치인이나 시민사회 단체를 가혹하게 배척하는 성향을 자주 드러냈습니다. 이란 이슬람 혁명도 어딘가 박 대통령과 코드가 맞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박 대통령이 기꺼이 공항에서부터 히잡의 일종인 '루사리'를 착용했으니 도무지 그 속을 모르겠습니다.

청와대의 설명도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란 측의 히잡 착용 요청은 앞서 지적했듯 이슬람 혁명의 유산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청와대는 "이란 고유문화를 존중한다는 의미"라고 밝혔습니다.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전 박 대통령의 히잡 착용과 여성 억압을 연결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다고 봅니다. 그보다 전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진정으로 이란의 문화와 역사, 특히 굴곡진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히잡을 착용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진정으로 이해해서 그랬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정체제, 반미노선 등 이슬람 혁명의 전반적인 특징은 박 대통령의 성향과 배치되는 지점이 많아서입니다. 그렇다면 판이한 성향의 이란을 존중하는 박 대통령이 왜 자국민들의 슬픔인 세월호 참사는 냉혹하게 외면하고 있을까요? 만약 이란 현대사에 대한 아무 이해 없이 히잡을 착용했다면, 박 대통령과 청와대 보좌진들의 판단이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면에서 히잡을 여성속박의 상징으로 보는 건 미국이나 유럽의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교롭게도 힐러리나 미셸 오바마, 메르켈 총리는 서구 문화권에 속해 있습니다)

전 지난 2006년과 2009년 각각 말레이시아와 이집트를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이슬람권입니다. 그래서인지 거리에서 마주친 여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히잡이나 니캅(눈 아래 얼굴을 가리는 수건)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 의상을 억압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 자신이 무슬림을 알리는 징표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 목걸이 같은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박 대통령의 히잡 논쟁은 문화와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정치적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월호 리본을 정치적으로 보는 이 정부의 수장인 박 대통령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란의 정치와 밀착된 히잡을 착용하고 환하게 웃는 모습은 참 부자연스럽고, 위선적으로까지 보입니다.
#미 대사관 인질사건 #이란 #히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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