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가 내 허리를 만졌다, 나는 욕을 해줬다

[강남역 살인남 사건] 17일 새벽 1시 나는 책상 앞에 있었다

등록 2016.05.19 12:47수정 2016.05.2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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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서 죽였겠죠"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이희훈


작은 육교와 초등학교 주차장을 지나면 지금 사는 집이 나온다. 어느 날 버스에서 내리는데,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분명히 누군가 뒤에 있는데 어물쩡 거리는 느낌, 분명히 앞으로 가로질러 갈 수 있는데 일부러 서성이는 느낌. 하지만 목격한 게 아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집으로 향했다. 주차장엔 보통 하나의 가로등이 켜져있는데 , 거길 지나갈 때면 작은 위안이 생겨난다. 그 위안에 기대려는 찰나 내 뒤에 있던 남자가 "저기요" 하고 말을 걸었다.

추행 퇴치법 시뮬레이션, 남자들은 이런 거 하나?

기숙사, 하숙집, 원룸건물 등으로 귀가할 때 머릿속으로 늘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뒤에서 나를 찌른다면? 목을 조른다면? 옷을 벗기려고 할 때 급소를 찢듯이 움켜쥐어야 하나? 쿠보탄으로 머리를 찔러야 하나? 내 공격이 효과가 있긴 할까? 난 달리기도 느린데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애초에 이런 계획이 실행될 시간은 있는 걸까? 클로로폼에 기절하면 끝 아닌가?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하던 이 생각들은 습관이 되어버렸다.

전화를 하면서 길을 가는데 술을 먹자던가, 밥을 먹자던가, 알 수 없이 웅얼거리면서 쫓아오던 술 취한 남자가 있었다. 밝은 대로변으로 질주하니 사라지고 없었다. 대낮에 술을 사주겠으니 따라오라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또 뛰었다.

교복을 입고 친구를 만나러가던 고3때는 본인이 학원 선생님이라면서, 공부 방법에 대해 '맨스플레인'을 하던 남자가 있었다. 지하철이 들어오자 번호를 알려주면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고, 나는 거절했다. 그때는 그냥 좀 이상한 학원 선생인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황당한 추행 방법이다.

그 남자는 나에게 '좀만 더 크면 이쁘겠다'고도 했다. 아직도 그때 그곳이 지하철 플랫폼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한다. 내가 들었던 말이 생각나면서 좀 오싹해진다. 고 2때는 독서실에 다녔는데, 여자화장실에 다녀오는 내 뒤로 바싹 붙던 독서실 총무가 있었다. 마치 같은 칸에서 나온 것처럼 정말 소리없이 바싹 붙었다. 화장실 휴지통에는 알 수 없는 주사기와 포르노 전단물 같은 게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사람들은 길 가는 여자들의 몸을 막 만진다. 중학교때는 지하철 끝자리에 앉아 내 엉덩이를 만지던 할아버지도 있었다. 내가 뒤를 돌아보니, 아닌 척 천천히 손을 오므리던게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때도 뭐가 뭔질 몰랐다. 배우질 않았으니까.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밥을 먹으려고 어느 회사 식당가를 지나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내 허리를 만지고 지나갔다. 욕을 하면서 돌아봤는데 저 멀리 사라져있었다. 지난 주엔 횡단보도를 앞서 건너던 할아버지가 뒤를 돌아 내 하반신을 훑어봤다. 욕을 했더니 못들은 척 멀리 사라져갔다. 그저께에는 지하철 출구 쪽 에스컬레이터를 타는데 누가 내 허리에 손을 대길래 뒤를 돌아봤더니, 웬 아저씨가 술에 취해서는 양손을 양쪽 에스컬레이터에 턱 하고 한껏 넓혀서 잡고있었다. 그러다가 내 허리를 만진 거였다. 물론 사과는 없었다.

남자는 5단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그 초등학교 주차장에서는 정면으로 501동 건물이 보인다. 밤 12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그 남자는 길을 물었다. 내 손은 "저기요"를 듣는 순간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 대략 열여섯 살 이후로 거의 매일 돌리던 그놈의 시뮬레이션은 온데간데 없이 그냥 손이 떨렸다. 난 밖을 서성이다가 집에 들어왔지만, 그 남자가 내 뒤에 있었는지 어디서 숨어서 날 봤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듣고, 주변에선 남자가 내가 들어간 건물과 센서등이 들어오는 층수를 확인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딱히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생각이 들자 체념 상태가 되었다. 아직도 남자 얼굴은 먹을 칠한 듯 까맣게 기억나지 않는다.

추행 당하는 여성들, 난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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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메시지 남기는 예비역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 이희훈


몇 개월 전에, 지하철 플랫폼에서 내 또래의 여성이 아저씨 두 명한테 추행 당하는 걸 봤다. 아저씨들은 상사, 여성은 부하직원이었다. 그들은 여성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헤드락'을 걸고, 어깨를 만지고 팔을 잡아당겼다. 세 명 다 회식을 하고 취한 상태였는데, 여성은 계속 그들로부터 멀어지려 하고 아저씨들은 계속 그 여성을 당겨댔다. 난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관찰하기만 했다.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뭘 해야할지 모르는 내가 바보같았다. 그저 여성이 어디서 내리는지 주시하다가, 나와 같은 역에서 내리는 걸 확인했을 뿐이었다. 아저씨들은 계속 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자꾸 주변을 확인하게 된다. 맞다가 끌려가거나 괴롭힘 당하는 여성이 없는지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린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여자가 등을 기댄 상태로, 남자가 때리는 시늉을 하는 것도 봤고 대로 한복판에서 장난인 양 여자 팔을 끌고 가는 것도 봤다. 역 출구 앞에서 여성에게 마구 화를 내고 주변 기물을 부수는 남자를 보고 경찰에 신고를 넣은 적도 있다. 그 여성은 무사할까?

내가 신고를 했던 그 곳에서 나는 모르는 남성들에게 욕을 들은 적도 있다. 이어폰을 꽂고 길을 가던 도중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알고 보니 내 뒤에 붙어서 내 뒤통수에 대고 욕을 하고 있었고, 나는 이어폰 때문에 몰랐던 거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빠르게 걸었다. 골목길에서는, 웬 남자가 "XXX들, XX들, 저녁에 돌아다니고.." 같은 욕을 계속 하길래 대체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 길에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17일 새벽 한 시에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간식도 먹고 있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 #여성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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