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저 '운 없이 걸린' 여자였을까?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잊지 말자, 다수의 여자들이 '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등록 2016.05.19 13:29수정 2016.05.1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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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새벽 '강남역 살인남 사건'이 발생한 강남역 일대의 노래방 화장실의 문. ⓒ 이희훈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 비극적인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절대로 여자와 남자를 갈라놓고 싸움을 부추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다수의 여자들이 '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남자가 알았으면 좋겠다.

'묻지마 살인' '묻지마 폭행'의 피해자가 여성인 것을 인식하고, 다시 말해 무작위로 선택된 희생자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치안을 강화하고 새벽 순찰을 늘리는 것보다 우리 안에 깊숙하게 자리한 그 마음을 돌아봤으면 한다.

나는 여중·여고를 나왔다. 친구들과 동그랗게 모여 수다를 떨 때, 이야기의 단골 소재는 성추행 피해 경험이었다. 웃길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다. 한 명이 "오늘 OO떡볶이 뒷골목에서 나를 보고 웃으면서 자위하는 사람을 봤다"라고 말하면 너도 나도 "나도 봤어" "나도 나도" 하는 거다. 엘리베이터에서 "나 하는 거 보고 있으면 돈 줄게"라고 말하는 아저씨를 만난 친구도 있었고, 차 안에서 친구를 불러세우고는 바지를 내리는 아저씨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 동네 골목길에서 치한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런 경험이 두 번 있었는데, 우리집에서 후암초등학교로 올라가는 골목길과 종점의 농협에서 우리은행 쪽으로 내려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10년이 넘은 지금도 절대로 그 두 개의 골목길을 사용하지 않는다.

4학년 때였다. 엄마가 큰 맘 먹고 사준 예쁜 청치마를 입고 마을버스를 탔는데, 백발의 할아버지가 검은 잠바로 내 다리를 덮고 손을 넣어 다리와 엉덩이를 만졌다. 나는 너무 놀랐고 무서웠다. 그래서 원래 내려야 하는 정거장보다 훨씬 먼저 내렸다. 내 앞에 있던 언니 두 명이 나와 같이 내리더니 "그 할아버지가 널 만진 것 맞지"라면서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나를 꼭 안아줬다. 그 후로 나는 마을버스를 탈 때 그 자리에 절대로 앉지 않는다. 당연히 그 청치마도 그날 이후로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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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서 죽였겠죠"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남 사건'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이희훈


지난 18일, 친구 둘과 길에서 함께 꺄르르 웃으며 사진을 찍다가 술 취한 아저씨 한 명이 다가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른 옆길로 비켰다. 여자는, 나는, 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간다.

지금도 가끔씩 가만히 있다가 오래 전 그 일들이 번쩍 하고 떠오른다. 워낙 옛날 일이라 지금은 그때처럼 심장이 심하게 뛰지는 않는데, 아무튼 계속해서 갑자기 생각난다. 그런 것이 트라우마라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나는 이 트라우마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헤어진 남자친구의 스토킹에 시달리는 친구들, 어릴 적 기억으로 남자를 무서워 하는 친구들…. 이게 단순히 개인의 문제일까? 처신을 잘못해서, 몸가짐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래서 이런 걸까.

우리는 정말 그저 '운 없이 걸린' 여자들이었을까?
#여성혐오 #강남역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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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가족, 그리고 채식하는 삶에 관한 글을 주로 씁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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