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재적 범죄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편지] 강남역 10번 출구에 등장한 '일간베스트' 회원에게

등록 2016.05.22 13:38수정 2016.05.2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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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편지를 받는 일이 어색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제 동료가 보내온 사진으로 당신을 만났으니까요. 지난 21일 당신은 강남역 10번 출구에 등장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일베'에 가입했다는 당신은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해서 왔다며,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가 아닙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 피켓을 본 저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남성으로서 제가 이야기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이야기가 그다지 달갑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세요. 이 이야기는 당신의 말처럼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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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에 등장한 일베 회원 ⓒ 염세진


당신이 하는 일은 추모가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도 이번 사건으로 슬픔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번 일로 숨진 피해자를 안타깝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느냐'고 따지는 시민들에게, "나도 엄마와 여동생이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부적절한 반응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엄마와 여동생이 이런 사회에 사는 것에 문제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모든 문장을 '그럴지도 모릅니다'로 끝맺은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당신이 하는 일은 추모가 아니며, 당신이 든 피켓에는 어떠한 염려나 안타까움, 문제 의식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피켓에 이렇게 썼습니다. '남성은 잠재적인 범죄자가 아닙니다. 배려와 협력으로 실질적 방안 모색. 불필요한 성대결 척결·반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기에 죽은 피해자의 자리는 어디에 있나요. 그 사람이 느꼈던 고통은 어디에 있나요. 죽은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은 어디에 있나요.

당신의 피켓에는 대신 이런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남성인 나는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라는 자기 변호. 불안의 대상에게 배려를 받고 협력하라는 불가능한 요구. 이번 사건으로 여성들이 느낀 공포와 분노를 '성대결'로 몰아버리는 오독.


당신의 피켓에 담긴 것이, 이번 사건에서 당신이 본 것이라면 저는 묻고 싶습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불안을 느끼는 사람 때문에 억울한 자기 자신 밖에 보이지 않나요?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가 불편한 자기 자신 밖에 보이지 않나요? 온통 '남성으로서 나' 밖에 보지 못하는 당신의 행동이 과연 추모인가요?

사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당신이 처음은 아닙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다녀간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인터넷의 많은 사람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 말라', '성별 갈등 조장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때문에 제가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런 반응들 전체를 향해있다고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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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 ⓒ 한국여성민우회


잠재적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실제로 일상에서 남성으로서 저는 잠재적 가해자가 되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가령 늦은 퇴근길 인적이 드문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낯선 여성과 저만 있을 때 저는 그 여성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보곤 합니다. 건물의 인적드문 복도에서 낯선 여성과 마주쳤을 때, 저는 그 여성이 놀라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어쩌면 이번 사건 이후, 공용 화장실에서 우리는 비슷한 일을 겪게 될지 모릅니다.

당신은 잠재적 범죄자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피켓을 들고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경험은, 당신이 말하는 것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20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주관한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저는 많은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 교통에서 낯선 남성이 번호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때리려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하철에서 한 여성이 낯선 남성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머리채를 잡히는 광경을 보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낯선 사람이 집까지 쫓아와 한동안 집밖을 나서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이야기가 믿기지 않나요? 그렇다면 당장 인터넷 창을 열어 성폭력 범죄를 다룬 뉴스를 검색해보세요. 낯선 이에 의한 범죄만 골라도 다 읽기가 벅찰 정도로 엄청난 양의 기사가 검색될 것입니다. 한 필리버스터 참가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보고 놀란 사람들을 보고 더 놀랐다"고. 자신은 이런 일이 너무 만연하고 일상이라 놀랍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날 마이크 앞에 서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당신이 쓴 피켓을 마주했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그 피켓 속의 말을 믿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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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 참가한 한 참여자의 선언문 ⓒ 한국여성민우회


당신의 피켓은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그 피켓을 하루 종일, 몇일을 들고 서있는다고 해도 여전히 당신은 잠재적 범죄자일 것입니다. 여성이 낯선 남성에게 범죄를 당하는 것이 만연한 상황, 때문에 나 또한 '잠재적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불안에 떠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 이상, 여전히 여성들은 낯선 남성들을 만났을 때 두려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해야하는 일은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고,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를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이미 많은 여성주의자가 좋은 글들을 남겼습니다. 물론 사회가 변하는 일은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명쾌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잠재적 범죄자'로 남는다고 해서 당신이 낯선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반면 '잠재적 피해자'들은 하루하루 끔찍한 일을 우려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잠재적 범죄자가 되기 싫다며', 단지 몇마디 말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당신의 요구가 뻔뻔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나요.

마지막으로 필리버스터에서 권김현영 선생님이 했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지금 당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뭐가 중요하냐면 '왜 나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해'가 아니라 '나는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 당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하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나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해'라고 질문하면서 지금 자기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고, 너희들이 나의 불편함 감정을 도닥여 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너희들 탓이야', 이런 식의 담론에 휩쓸리지 마세요.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남자들이 '우리는 이런 사회에 살고 싶지 않고, 나는 그런 남자가 아니고, 나는 살인범에 동일시 하는게 아니라 거기서 죽은 그 여자한테 동일시를 해'라고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여자라서요?"
#여성주의 #강남역 #강남 살인사건 #여성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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