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가 짐 싸서 나갔다, 벌써 네 번째

[작가, 방송을 말하다⑤] '환상의 직업'으로서 방송작가는 없다

등록 2016.05.24 16:25수정 2016.05.2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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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6일, 언론노조는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예상대로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최저시급도 안 되는 임금, 최장시간 노동까지. 이후 방송작가들은 언론노조 산하 (가칭) 방송작가지부 출범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론노조는 방송작가 노동조합 설립을 통해 방송작가의 노동 환경과 법제도 개선에 나서고자 합니다. 방송작가들이 직접 경험한 방송계는 어땠을까요.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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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네 번째 짐을 싸서 사무실을 나가는 동료의 뒷모습을 본다. 제작비가 모자라서 혹은 코너가 없어졌단 이유였다. ⓒ pixabay


벌써 네 번째다. 내 동료가 짐을 싸 사무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본 것이…. 제작비가 모자라서 혹은 갑자기 프로그램 코너가 없어져서가 그 이유였다. 당황하고 민망한 얼굴로 서로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내 옆자리였던 동료는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떠나는 사람은 허망했고 남은 사람은 괜스레 미안했다.

내가 직업으로서 선택한 프리랜서 작가. '과연 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막내였을 때는 그저 선배들이 원고 쓰는 게 마냥 부러워서 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바닥의 관행이라는 80만 원 월급도 그땐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막내가 다 이렇게 받는다니까. 10년 뒤엔 나아지겠지? 하지만 이게 웬걸…. 여기선 그런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막내 작가 월급은 80만 원

돈을 떼였다는 어느 후배는 너무 억울했던 나머지 외주제작사의 A4용지라도 들고 나올 뻔 했단다. 돈을 떼여서 노동부에 신고해도 '법적으로 어찌할 수 없다'란 대답만 되풀이해 듣게 된다. 우리가 그런 존재다. 방송사를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 노동을 하지만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 퇴직금도 휴가도 바랄 수 없는 사람들.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환상의 직업으로서의 방송작가는 없다고.

화려하지만 그 화려함에 감춰진 현실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이런 민낯을 들추려는 우리에게 어느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깎아내리지 마라."
"이런 게 작가들의 일이라면 부모님이 보시고 뭐라고 하시겠냐."
"우린 창작자이지 노동자가 아니다."

방송생활 10년차. 나도 마찬가지로 일에서 재미를 느꼈고, 보람도 자부심도 컸다. 솔직히 내 직업으로서의 흠을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남들이 봐주길 바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싶지 않았다. '멋있는' '고상한' '열정적인 전문직'이란 딱지를 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환상의 직업으로서'의 겉모습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지 않았을까? 믿기 힘들겠지만 10년 전과 비교해 막내작가는 여전히 80만 원 남짓의 월급을 받고 그마저도 떼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몇몇 작가들이 모여 '방송작가 유니온'을 만들게 됐다.

하지만 작가들의 노동환경 실태를 외부에 알릴 때마다 가장 큰 장벽이 하나 있었다. 방송작가는 창작자이지 노동자로 봐서는 안 된다는 거다. 이 때문에 누구나 적용되는 '근로기준법'은 방송작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고, 임금을 떼여도 노동청에 신고해봤자 방법이 없다.

그런데 이 법적 제도가 만들어진 배경을 보면, 작가 당사자들이 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80년대 방송 극작가들은 자신들은 '창작자이지 노동자가 아니다'라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그 이후로 '방송작가=창작자'로 그때그때 계약을 맺고 독자적으로 일을 해왔고, 이 때문에 노동자로서 어떤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동안 얼마나 억울한 사례가 많았을까.

그래서 작가들이 모여 조금씩 바꿔보려고 한다. 처음부터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적어도 일한 만큼 제때 월급 받고, 방송사의 입맛에 따라 주먹구구식으로 일자리를 잃었을 때 법적인 보호를 받고, 일하다가 다쳤을 때 산재 처리는 돼야하지 않겠나.

가까운 예를 봐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인들이 그 대안을 만들어냈다. 영화 스태프는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을 통해 그리고 방송연기자는 방송연기자노동조합을 꾸려 최저임금과 4대 보험 적용을 받고 있다.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을 막내작가, 동료가 떠나는 뒷모습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들, 이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실 전 현직 선배님들, 갈 길은 멀어 보이지만 함께 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지켜봐주시고 부디 지지해주길!
#방송작가유니온 #언론노조 #4대보험 #방송작가노조 #표준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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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언론노동조합(全國言論勞動組合, National Union of Mediaworkers)은 대한민국에서 신문, 방송, 출판, 인쇄 등의 매체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가입한 노동조합이다. 1988년 11월 창립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론노련)를 계승해 2000년 창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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