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보고 온 K과장, 박원순은 왜 가운데 앉혔나

[서울'혁신'시, 무엇이 달라졌나 20] 회의-보고문화

등록 2016.05.30 09:55수정 2016.10.1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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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현


과장 보고 시장보다 상석에 앉으라고?

공무원 생활 15년차인 서울시청의 K과장. 얼마 전 자신의 과 소관 현안을 박원순 시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직속 상관인 국장과 함께 시장실에 들어갔다가 어리둥절한 경험을 했다.

비서실 직원을 따라 가보니 자신의 명패가 회의 테이블의 가장 가운데에 놓인 것이다. 그것도 놀라웠지만, 시장이 자신의 왼쪽, 국장이 오른쪽에 앉는 것 아닌가. 즉, 과장 신분인 자신이 가장 상석에 앉게 된 것이었다.

비서실 직원들의 실수였을까? 답은 당연히 '아니오'다.

관공서나 지자체의 공식회의에서 그 조직의 '장'이 가장 상석(上席)에 앉는 것은 당연한 관례요 상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울시의 경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보통의 회의 테이블은 직사각형. 예전 시장들은 당연히 짧은 면 가운데에 앉고, 나머지 간부들은 그 앞에 양편으로 도열하듯 늘어서 앉았다(T자형). 그러나 박 시장은 절대 짧은 면에 앉지 않고 긴 면 가운데에 앉는다.(ㅁ자형) 그 중 절반은 K과장의 경우처럼 보고자를 가운데 앉히고 자신은 그 옆에 앉기도 한다.

아무래도 T자형으로 앉다보면 시장이 마치 군대의 사단장처럼 일방적으로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고 직원들은 받아적기만 하는 형태가 되기 일쑤이므로, 직위에 관계없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와 토론을 나눌 수 있는 ㅁ자형을 선호하는 것이다.


누가 어디에 앉든 해당 사안에 가장 밝은 담당자를 중심으로 회의를 이끄는 게 맞다는 생각에서 나온 실용적 회의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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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실 업무보고 모습. 박원순 시장이 회의테이블의 가운데가 아닌 오른쪽 끝에 앉아있다. ⓒ 서울시제공


"예전에는 국·과장만 들어가던 자리에 이젠 주무관까지..."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회의 테이블에 반드시 담당 팀장과 주무관이 들어와 앉는다는 것이다. 주무관이면 공무원사회에서 가장 말단직원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가장 실무에 정통하고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믿음에서다.

국장, 과장이 돌아와서 다시 주무관에게 전달해야 하는 수고와 혹시 내용이 잘못 전해질 우려를 줄일 수도 있다. 간부들이 많아 자리가 없으면 뒷줄에 의자를 놓고 앉는다.

한 팀장은 "예전 시장 보고 땐 국장, 과장만 들어가고 주무관은커녕 팀장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며 "게다가 실제 보고도 거의 국장이 혼자 했다"고 말했다.

회의 때 으레껏 해오던 시장의 인사말도 없어졌다. 마치 교장 선생님 훈시처럼 뻔한 인사말로 시작부터 김을 빼는 대신 보고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토론한 뒤 마지막에 의사결정권자인 시장이 자신의 의사를 얘기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외부인사가 참석한 회의에서 소개하는 순서도 바뀌었다. 과거엔 항상 시장부터 소개했지만, 지금은 외부인사부터 소개하고 내부간부는 업무와 관련돼 꼭 알려야 할 경우에만 소개한다. 심지어 시장 소개를 안 하는 것도 다반사다. 다른 사람 명패는 다 있어도 시장 명패는 없다. 시장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부시장들, 기조실장도 박 시장을 따라 회의 형식을 바꾸고 있다. 형식이 내용을 좌우한다고 했던가. 회의 형식을 바꾸니 내용도 토론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게 서울시 간부들의 말이다.

이영기 서울시 기획조정실 기획담당관은 "박 시장은 자신이 주재하는 회의가 일방적인 보고식 회의로 진행되는 것을 막고,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생산적인 회의로 잡아 달라"고 주문한다며 "하루 일정이 15~20개나 될 정도로 시간이 천금 같은 시장 입장에선 어찌 보면 당연한 주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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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직원들이 시장실에서 앞에 걸린 스크린을 보며 회의하고 있는 모습. 앞줄 왼쪽 맨끝에 앉아있는 사람이 박원순 시장이다. ⓒ 서울시제공


서울시 간부 수십 명이 한 장소에서 동시다발회의

1000만 시민들의 실타래처럼 얽힌 다양한 요구와 현안을 풀어나가기 위해 문제해결 위주 회의를 추구하다 보니 회의의 형태도 다이내믹해졌다.

뭔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는데 방향도 못 잡고 있는 초보단계에서 외부전문가들을 불러다 브레인스토밍하는 '숙의'가 있는가 하면, 관련된 시민들을 참여시켜 그들 위주로 발언권을 주고 자유롭게 토론해보는 '청책'이 있다.

숙의, 청책 단계가 지나면 정말 과제를 놓고 결론을 내보자는 '집중회의'가 있다. 이 땐 주로 관련 실국장과 1~2명의 외부전문가가 모여 끝장토론 식으로 진행한다.

서울역고가, 청년수당, 미세먼지 같이 논란이 많은 당면 현안이 있을 때 관련 실국장들이 모여 대책과 대안을 모색하는 '현안회의'도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파격적인 회의는 모든 간부들이 한 공간에 모이는 '집단지성광장' 회의. 이 회의가 열리면 시장을 포함해 모든 실국장 이상 간부 50~60명이 2시간 동안 신청사 3층 대회의실에 모여 머리를 맞댄다.

노트북과 간단한 자료만 들고 들어온 간부들은 각자의 일을 하다가도 시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했다가, 부시장이 주재하는 회의로 옮기기도 하고,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또 다른 회의를 자발적으로 소집해 진행할 수도 있다.

당초 한 카드회사가 하고 있는 것을 벤치마킹해 2014년 겨울 시작된 이 회의는 전시성 이벤트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도 있었으나, 간부들 사이에 호응이 높아 연 2~3회 꾸준히 개최되고 있다.

한 국장급 간부는 "집단지성광장은 평소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없는 간부들이 부서별 칸막이를 없애고 무엇이든 문제해결을 논의해볼 수 있는 자리"라며 "서울시 최고 간부들이 넓은 회의실에서 여러 개의 회의를 동시다발적으로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장관"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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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오전 서울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5회 집단지성광장.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 간부들이 탁구대를 회의테이블 삼아 토론하고 있다. ⓒ 서울시제공


"회의-보고는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전자결재시스템도 회의-보고 문화 개선에 한 몫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가급적 대면보고를 하고 사정이 안 되면 서면보고로 대체했으나, 지금은 온라인 메모보고가 활성화됐다. 덕분에 실무 주무관이 보고를 올리면 시장은 퇴근 후 공관에서 PC를 열어 결재하고 코멘트를 단다.

이전 시장 때 언론과에 근무했던 한 과장은 "가판에 중요한 기사가 뜨면 한밤중에도 신문을 들고 시장 공관에 뛰어가던 시절이 불과 몇 년 전"이라고 회상했다.

또 다른 국장급 간부는 "일 잘하는 사람보다 회의나 보고 잘 하는 사람이 먼저 승진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젠 옛말이다. 회의나 보고는 모두 업무를 잘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회의 #업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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