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한 한국 그림책, 현실은 '1쇄 작가'

해외 수상작 통해 본 우리 그림책의 높아진 위상... 국내 창작 지원 수준은 아쉬워

등록 2016.06.08 20:10수정 2016.06.0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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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지만 여름 같았던 지난 5월, 메마른 가슴 위로 단비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것. 오랫동안 바라던 소망이 현실로 기록되던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 하나를 가슴에 안은 기분이었다.

그 반짝이는 기쁨을 더욱 빛나게 할 다른 소식이 있는데, 혹시 아시는가. 해외에서 상을 받은 한국 작가가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없는 농담이 아니다. 한국 그림책은 오래전부터 해외에서 커다란 관심을 받아왔다.


서양에 비하면 역사가 길지 않은 한국 그림책이 해외에서 처음으로 상을 받은 해는 1987년이었다. 강우현의 <사막의 공룡>은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 비엔날레(Biennial of Illustrations Bratislava) 상에서 황금패를 받았다.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 비엔날레상? 어쩌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이 비엔날레는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리는 그림책 축제다. 1967년부터 국제아동도서협의회와 유네스코의 후원으로 2년마다 홀수 년도에 열린다. 각 나라의 국제아동도서협의회 지부에서 1차로 그림책 원화를 출품하면, 국제 심사 위원회가 이를 검토해 각 부문별로 수상 작품을 결정한다.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 비엔날레상(출처: 산그림,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 모임)을 받은 최근 한국 수상작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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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해마다 3월 말이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그림책 박람회가 열린다. 바로 볼로냐아동도서전(Bologna Children's Book Fair)이다. 그 기간 동안 주최 측은 디자인과 창의성 등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을 선정한다. 1966년에 제정된 볼로냐 라가치상은 각 부문별로 대상 1명과 우수상 5명으로 나누어 시상한다. 참고로 라가치(Ragazzi)는 이탈리아어로 '어린이'라는 뜻이다.

라가치상은 한국 그림책과 꽤 인연이 깊다. 2004년부터 최근까지 한국 그림책 작가들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2015년도에는 '라가치상 전 부문 석권'이라는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올렸다. 수상 작품들을 아래와 같이 연도별로 정리해 보았다(출처 : 대한출판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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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지난 4월, <파도야 놀자>로 널리 이름을 알린 이수지 작가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Hans Christian Andersen Award)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아쉽게도 수상은 하지 못했다.

1956년에 창설된 안데르센상은 국제아동도서협의회에서 아동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처음에는 동화작가뿐이었지만, 1966년부터 그림책 작가까지 확대 되었다. 2년마다 짝수 해에 열리는 수상식장에는 특별한 장면이 연출된다. 덴마크의 여왕이 직접 수상자에게 메달을 수여하는 것이다.

안데르센상이 '아동 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안데르센상은 특정한 한 작품에 내려지는 상이 아니다. 평생 동안 해온 모든 작품에 대해 수여하는 상이라 작가들 사이에서는 후보에만 올라도 큰 영광이다. 2012년 문학 부문에 <마당을 나온 암탉>의 황선미 작가도 후보에 올랐다(앞으로 안데르센상에 한국 작가가 그 이름을 올릴 날도 기대해본다).

자료를 모아보니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상을 받았는지 놀라울 정도다. 서양보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지금 한국 그림책은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와 있다. 하지만 그림책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은 다른 분야에 비해 미비한 편이다.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서울문화재단에서 실시하는 창작지원사업에서 그림책 분야는 지원 대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림책은 미술과 문학 두 장르를 혼합한 종합예술이다. 그래서인지 미술계는 그림책을 그림이 아닌 책이라는 이유로, 문학계는 글의 분량이 적다는 이유로 도외시하는 경향이 많다. 시각적 이미지와 상징적인 문자가 어우러져 어떤 예술 장르보다 호소력 짙은 그림책이 예술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열악한 그림책 출판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한국그림책협회를 창설하려는 준비 작업이 한창이다. 한국그림책협회는 권윤덕, 김서정, 문승연, 이수지 등 그림책 작가와 평론가, 일러스트, 출판사가 합심하여 곧 출범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앞으로 그림책이 고유한 예술 장르로 자리매김 하도록 힘쓴다니,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할 듯하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이 시대에 그림책 작가의 삶을 살아내는 수많은 작가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림책 작가는 1쇄 작가'라는 말이 있다. 초판으로 그치는 그림책이 많다는 얘기다. 그나마 글과 그림을 모두 맡을 경우에는 인세가 도서정가의 10%이지만, 그림만 그린 경우에는 6%에 불과하다. 그림책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란 녹록치 않은 현실이다.

최근 그림책 독자층이 성인으로까지 확대되는 변화의 흐름은 그림책 출판시장에 새로운 활력소다. 온오프라인에서 성인 그림책 동아리가 활성화 되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 그림책이 속속 출판되고 있다.

딸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아낸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나 반려동물을 소재로 한<춤추는 고양이 차짱>은 어른들이 주 독자층이다. 그림책을 매개로 한 에세이집도 꾸준히 출간되는 추세다. 그림책으로 만난 열다섯 개의 철학에세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림책을 읽다>와 그림책을 통해 들여다본 일상을 그린 <그림책에 흔들리다>가 시선을 끈다.   

한 권의 그림책을 읽는 시간은 십 여분 남짓이지만, 그 추억은 한 사람의 일생 동안 이어진다. 삼사십 페이지에 불과한 그림책은 서사적인 반전과 유쾌한 아이러니까지 담아낸다. 그래서 어떤 그림책은 두꺼운 소설책만큼이나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림책의 상상력은 온도 자체가 남다르다. 그림책의 온도는 항상 36.5도보다 높다. 지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명제는 언제나 진실이다. 어린이의 시선이 묻어나는 그림책 세상에는 인류가 지켜온 오래된 희망이 그대로 녹아있다. 지켜주고 싶고, 지켜주어야만 할 아름다운 가치를 마술적인 그림과 언어로 풀어낸다. 그래서 그림책의 상상력은 엄마가 차려준 밥상처럼 따뜻하다.

아이와 함께 읽는 그림책은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어른들 세계에 도사린 적나라한 모순을 깨닫게 하며, 아이들과 소통하는 은밀한 통로를 마련해준다. 어른과 아이 사이를 이어주며,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하는 그림책. 어느덧 '힐링 책'으로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
#안데르센상 #라가치상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 비엔날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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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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