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작고 하찮은 일에도 정성을 바쳐라

국회권력이 협치를 이루기 위한 방법

등록 2016.06.25 17:19수정 2016.06.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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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국회가 출범하는 과정에서 빈번히 등장한 용어가 바로 '협치'다. 이번에 새로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정세균은 국회가 정부 감시 및 견제의 역할을 넘어 국정의 당당한 주체로 권한을 적극 행사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협치를 설명했다. 국회는 단순히 3부 중 하나가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민주적 정통성이 가장 높은 기구라고 그는 강조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기득권을 양보하고 내려놔야 하고, 대타협을 통해 협치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거버넌스, 정치, 협치

본래 협치는 주로 거버넌스(governance)를 의미한다. 거버넌스는 통치를 의미하는 거번먼트(government)와 비교되어 자주 쓰인다. 거번먼트 즉 통치는 특정 개인이나 소수 집단이 정책결정을 하며 강제력으로 사회의 질서를 도모하는 방식이다. 통치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은 '자치' 즉 셀프 거번먼트(self-government)로서, '나는 오로지 나만이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협치는 통치와 자치 중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과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사실상 협치가 가장 현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버넌스는 국가 뿐만 아니라 기업, 국제사회 등 여러 경우에 쓰일 수 있다. 이때 역시 '지배'보다 '관리'의 의미가 크다. 그러나 대체로 거버넌스는 네트워크식 국정관리 체계를 의미한다. 즉 정부, 시민사회, 기타 공·사조직들과의 연결 네트워크를 강조하는 개념으로써, 이들 사이의 협상의 결과로 정치가 이루어진다. 오늘날 정부는 더 이상 홀로 정치할 수 없다. 시장, 시민사회, 지역, 국제사회와 공조하며 목적을 추구해 나간다. 따라서 이들 영역과의 연계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거버넌스를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정부가 충돌하는 개인 혹은 집단의 이익을 조정하는 것을 거버넌스의 본질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협소한 이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바로 오늘날 협치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우려스럽다. 이때 개인 혹은 집단 이익을 형성하지 못하는 개인 혹은 집단은 배제된다. 위와 같은 거버넌스 이해는 정의의 문제를 배제하고 거버넌스를 조정의 정치에 가두어버릴 수 있다. 분명 개인, 집단의 이익을 초월하는 공익과 공의가 존재한다. 협치는 이를 실현하도록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협치는 '공화'의 실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공화로써의 협치

위와 같은 이유로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공화주의로 관심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서구 역사를 보면 공화주의자들이 모두 공익을 위한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공화주의는 무엇보다, 왕이 지배하지 않는 정치를 의미한다. 이는 일인의 일방적 지배를 반대하는 협치의 정신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동시에 공화주의는 민(民)의 지배도 반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중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정치를 엘리트에게 위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키케로 역시 귀족 주도의 정치를 지지했다. 해링턴은 민의 대표기구인 하원에 권력이 집중되어서는 안 되고 심의를 하는 상원의 역할을 강조했다. 매디슨 역시 순수민주제도와 포퓰리즘을 반대하며 공화제를 가장 선진적인 정체로 파악한다.


그 역시 해링턴과 마찬가지로 하원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표방하며 상원의 귀족주의적 심의를 열렬히 옹호한다. 이렇게 보면 서구 공화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가져올 해악을 우려하여 민의 힘을 견제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은 거의 모두 중산층의 중요성 및 사유재산의 보호를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사실상 공화주의자들이 사유 재산을 민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공익 보다는 귀족과 엘리트의 사익을 보호하는 데 많이 노력해왔다.

흔히 공화주의는 서구의 개념으로 알고 있으나 동양에서도 '공화(共和)'라는 말을 써왔다. 동양에서도 공화는 왕이 없는 상태를 가리켰다. 『사기』의 주본기를 보면 주나라 시대에 려왕의 폭정이 심해 신하들이 그를 쫓아내고 소공과 주공이 함께 협력하여 나라를 다스린 것을 '공화'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나랏일을 걱정하여 다시 화합할 마음을 먹고 영상과도 서로 좋게 지내기 위해 힘쓰고 있는데, 흉악한 무리들은 날마다 이러한 공화를 무너뜨리려고 일삼고 있다,"고 했으며, "'협화(協和)'니 '상화(相和)'니 '공화'니 하는 문자는 대개 서로 통용하는 말들"(『조선왕조실록』, 광해 180권, 14년, '1622년 8월 11일').이라고 하고 있으니 공화가 협치와 유사한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때의 공화 역시 서구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 무관한, 그들만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안창호에게서 배우는 협치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날의 거버넌스 즉 협치는 정부, 시민사회, 기타 공·사조직들과의 연결 네트워크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과거 동서양의 공화주의가 갖는 민을 견제하는 성격을 넘어 민과 함께 하는 정치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럴 때에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있다. 안창호의 사상과 실천이 그것이다. 그동안 안창호는 점진주의자, 실력양성론자, 중도파로 알려져 결과적으로 좌우파 모두에게 그다지 선호하지 않은 인물로 치부되어 온 점이 없지 않다. 오히려 그는 특정 이념에서 자유로운 일반 대중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아온 인물이다.

오늘날 협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동서양의 전통적 공화주의자들과 달리 민을 신뢰했고 그들이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백성의 나라요, 임금과 정부의 나라가 아니며", "인민이란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저의 직역을 진력케 하는 최초의 상전이라"고 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나 다 민의 노복이라 했다. 그 당시 이러한 표현은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둘째 오늘날 협치에서 강조하는 토론과 양보를 그 역시 강조했다. "본래 공화국이란 것은 국민의 여론에 의거하여 행사하는 것"인데 "국민의 여론을 세우려면 김가 이가가 각기 자기 주장만을 끝까지 주장하고 차단(此團) 피단(彼團)에 각기 자기의 주장만을 끝까지 고집하면 될 수 없"으며, "그런즉 각 방면의 다른 사람이 집합하여 의논한 후에야 진정한 여론이 성립"된다고 하였다. 각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고 좋은 여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심의민주주의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심사숙고한 결과로서의 여론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교육과 토론이 필요하다. 안창호는 일찍이 민을 선비(士)로 만드는 흥사단(興士團) 운동을 일으켜 전념해왔다. 서구 공화주의가 엘리트와 민이 분리되어 상호 견제하면서 공존하는 것과 달리, 민이 사가 되고 사는 민을 섬기는 공화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이는 엘리트와 민이 서로 다른 채 공존하는 물리적 혼합이 아니라, 서로 섞이면서 각자의 성질이 변화하는 화학적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안창호는 일찍이 계급 초월을 강조했으며 더 나아가 사회주의를 포용하고자 했다. 흥사단 원동위원부에서 활동한 구익균에 의하면, 안창호는 "임정을 비롯한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열될 위험을 막기 위해서 독립이라는 공동목적을 위해서 화합하도록 힘썼다." 안창호는 사회주의의 장점을 잘 이해하였고 활용하려고도 했다. 안창호의 정치사상에 대한 기존 연구는 대체로 자유민주주의, 계몽운동만 부각되고 있는데 이는 주로 이광수와 주요한이 쓴 전기에 기초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1920년대 전반까지의 안창호의 언행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92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자택에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검거된 적이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역할을 인정한 바 있다. 구익균은 안창호의 사상을 기독교 사회주의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안창호는 사회주의도 한국민족을 잘 살리기 위하여 주장하는 것이니 연구하여 좋은 점이 있으면 채택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 세계의 앞날은 영국의 페비안이 지향하는 그런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안창호는 특히 오웬의 사상을 열렬히 지지했다고 한다. 최근 오웬의 협동조합 사상이 재조명되는 것을 생각하면 안창호는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대 국회에 바라는 정치리더십

마지막으로 안창호는 말 뿐만 아닌 실천을 통해 협치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에 와서 동포들의 집부터 청소했다. 미국에 공부하러 온 안창호는 동포끼리 서로 상투 잡고 싸우는 것을 보고 동포들의 생활개선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교민들 집 앞을 청소하고 화장실까지 청소해주었고, 그러자 교민사회가 깨끗해지고 사람들도 달라졌다. 이에 "한국에서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가 왔기에 한국 사람들이 저렇게 바뀌었나?"라고 미국인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사(士)가 민에게 내려가 그들을 섬김으로써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결국 동포들은 그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를 지도자로 만들었다. 동포들은 합심하여 공립협회를 만들어 안창호를 회장으로 추대한다. 공립협회는 상부상조, 애국심 고양, 범법행위 금지를 강조했다.

밤 9시에 취침할 것, 속옷 차림으로 외출하지 말 것, 방을 깨끗이 정리할 것, 번 돈을 저축할 것, 차이나타운 가서 돈을 쓰지 말 것 등 실제적인 행동 규칙을 정하고 준수하도록 했다. 어려운 추상적, 철학적 가르침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쉬운 지침이다. 이는 풀뿌리민주주의의 실천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우선 행동부터 바꾸게 한 것인데, 행동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안창호는 무엇보다 자신이 큰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고 좋은 것을 늘 다른 이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중용>에서 강조한 것처럼, 작고 하찮은 일에 지극정성을 바쳐 결국 타인을 감동시켜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그는 탁월한 덕성의 소유자로 '생활의 성화'를 보여준 인물이다. 이는 감동을 주고 마음을 움직이는 리더십으로서, 추종자를 일부러 만들려고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추종자가 많아져 그 결과 리더가 되어가는 식의 리더십이다.

20대 국회는 협치의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정신을 밑바탕으로 삼아 출발할 일이다. 특히 도산의 협치 사상을 재조명하는 일에 나서길 바란다. 어지러운 이 시대에 안창호와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여 협치를 이루는 그러한 정치(인)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글을 쓴 이나미 박사는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20대 국회 #협치 #거버넌스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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