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포기했더니 바로 '투명인간'

[아이들은 나의 스승 75] 진로 다르다고 배제되는 아이들 위한 대책 고심해야

등록 2016.07.01 05:30수정 2016.07.01 05:30
2
원고료로 응원
한국사 수업시간인데 한수(가명)는 요리 자격증 필기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학년 초 수업시간 교과서도, 노트도 없이 태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에 불러다 매번 혼쭐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지금 다니고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도저히 채워줄 수 없는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그만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전 중학교 때부터 요리를 배우고 싶어 특성화 고등학교에 지원했다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인문계로 왔거든요. 죄송하지만 수업시간에 요리시험 공부를 하도록 허락해주세요. 다른 친구들 한국사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할게요."

그런 그에게 한국사는 수능에서 필수이고, 국민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교양이라는 말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2학년인 그는 내년 대학입시에 응시하지 않을 작정이란다. 남들과 다른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이 크긴 하지만, 어쨌든 일단 요리사로 취직한 다음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때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라고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동네북'된 까닭

a

한 학생이 밤 늦은 시각까지 학교에 남아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40대 이상만 되어도 낯설게 들리겠지만, 요즘 인문계 고등학교는 '동네북'으로 불릴 만큼 위상이 추락했다. 물론, 대학 못지 않은 서열화 정책에 직격탄을 맞은 탓이 크지만, 그렇다고 상위권 아이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특목고와 자사고 때문만은 아니다. 웬만하면 경쟁률이 2:1을 훌쩍 뛰어넘는 마이스터고의 인기몰이에다 최근에는 특성화고까지 지원율이 덩달아 높아져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업계'라고 불리며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가는 학교쯤으로 여겨졌던 특성화고가 이젠 인문계 고등학교의 앞자리를 넘보고 있다. 제빵과나 조리과처럼 인기 있는 학과의 경우에는 중학교 내신 성적이 웬만큼 좋지 않으면 지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결국 지원했다 떨어지면 인문계 고등학교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한수와 같은 아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내신을 기준으로 인문계 고등학교 아이들의 성적 분포를 보면 확연하게 양극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목고와 자사고에 진학하지 않은 소수의 최상위권 아이들부터 특성화고에 지원했다 떨어졌거나, 아예 특성화고에 가고 싶어도 성적이 안 돼 지레 포기한 아이들까지 한 교실에 모여 있게 된 것이다. 어느 반의 경우에는 상위 1% 안에 드는 아이와 하위 97%인 아이가 짝꿍이 되어 앉아있다.


그렇지만, 특목고와 자사고에 밀리고, 마이스터고와 특성화고에 치여 갈피를 못 잡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현실을 꼭 나쁘게만 볼 건 아니다. 누구나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천편일률적인 '인생 경로'에 의문을 던지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대학 진학률이 고작 30% 안팎에 불과한 유럽의 여러 나라처럼 변해갈 거라 확신하는 아이도 있다.

대학 진학보다 취업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인식의 변화도 느껴진다. 드물긴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수능 대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아이도 더러 있는데, 이 학생은 어렵기만 한 수학보다는 취업에 두루 필요한 영어를 '전략적으로' 더 열심히 공부한다고 한다. 남들처럼 취직하기 위해 대학에 가기보다, 되레 취직부터 하고 대학은 나중에 생각하겠다는 역발상이다.

사실 많은 아이들이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데 말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내용이라 믿고 있다. 어차피 수능만 끝나면 머릿속에서 깨끗이 '포맷'될 지식이라는 거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조차 '남들 다 가는' 대학이니 하는 것일 뿐, 공부가 좋아서 대학에 가려는 건 아니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현실에서, 하물며 한수 같은 아이들은 오죽할까.

"한국사는 남들 앞에서 아는 체 할 때 필요한 상식이라 치고, 미적분과 물리 같은 과목은 제 진로에 무슨 보탬이 될까요? 연산 정도만 알면 되지 않을까요? 차라리 그 시간에 좋아하는 요리 관련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교과 선생님들은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살아가는 데 피가 되고 살이 된다'며 꼭 배워야한다고 말씀하세요."

한수는 '까막눈'으로 수업시간 내내 칠판을 응시해야하는 고통을 호소했다. 매일 한두 시간씩 그렇게 허송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 겪는 문제는 아니라면서 짐짓 태연한 척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교실마다 이미 절반을 넘어섰다며, 해당 선생님들도 애써 모르는 척할 뿐 다 알고 계실 거라고 장담하듯 말했다.

한수의 말대로, 이젠 일선 학교마다 넘쳐나는 '수포자' 문제는 새삼 놀랄 일도 아닌 게 돼버렸다. 머지않아 영어와 과학 등 어려워하는 교과 순서대로 포기자가 마치 전염병처럼 확산될 거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등장했다. 한 동료교사는 교실은 더 이상 '배움'이 일어나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끼리 배제와 격리를 내면화하는 '수용소'가 되어가고 있다며 씁쓸해했다.

수많은 '한수들' 방치하는 학교

인문계고등학교에 다니는 한수는 요리사가 꿈이다. ⓒ pixabay


안타깝게도 학교는 수많은 '한수들'의 상황을 잘 알면서도 방치해왔다. 솔직히 그들을 건사할 능력도 없고, 그럴 의지 또한 희박하기 때문이다. 되레 '가성비' 운운하며 그들을 위한 교육적 투자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학교마다 수많은 '한수들'을 모아 '직업반'을 꾸리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격리 차원일 뿐, 그들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은 거의 마련돼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거칠게 말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와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지 않으면 3년 동안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셈이다. 한수처럼 어쩔 수 없이 입학한 경우도 예외는 없다. 하물며, 원해서 진학했다가 진로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경우라면 말 꺼내는 것조차 저어하게 된다. 그들을 위한 학교의 대책이란, 고작 정규수업이 끝난 직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도록 일찍 하교시켜주는 것뿐이다. '네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사전엔 적혀있지 않을 테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의 설립 목적은 오로지 아이들을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한 것이라 들어 알고 있다. 모든 교육과정이 대학 입시에 맞춰진 탓인지, 특히 명문대 진학을 준비하는 소수의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낯 뜨거울 만큼 전폭적이다. 그렇다고 단지 진로가 다르다는 것이 수많은 '한수들'을 학교 내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해도 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들은 시나브로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학교는 먼 산 불구경하듯 뒷짐만 지고 있다. 동료교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단위 학교 내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길게는 수십 년 간 오로지 대학 입시에 '최적화'되도록 훈련된 교사들에게 전혀 다른 진로를 모색하는 아이들을 상담하고 지도할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거다.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이상, 대학 입시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하는 순간, 그 아이들은 교육과정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따지고 보면, '직업반'이라는 것도 그들을 위한 배려라기보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다수의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졸지에 '썩은 사과'가 되어 상자에서 빠져나와야하는 처지가 되는 셈이다.

한수는 '직업반'은 편견만 조장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단지 대학 입시를 준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제아'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라는 거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인문계 고등학교마다 '직업반'을 운영하지 않는 학교가 없는 것 같다면서, 애초 그들을 위한 학교가 별도로 세워졌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말과 함께.

요즘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학종)이 대세라며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학종 맞춤형 교육'을 준비해야 한다고 난리법석이다. 듣자니까, 학교마다 강사를 초청해 교사들을 대상으로 '학교생활기록부 잘 꾸미는 법'을 수시로 연수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아이들 사이에서조차 '소설 작성법'이라는 조롱까지 나오고 있는 판에, 이러다간 없는 것도 만들어낼 태세다.

그런데, 이런 호들갑이 한수에게는 다른 동네 이야기다. 학교가 학종 준비에 쏟는 노력의 반의반만이라도 한수같은 아이들을 위한 대책 마련에 고심했으면 싶다. 전혀 주눅 들지 않는 한수의 활달함을 아낀다는 한 동료교사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냉소적인 태도와 구태의연한 교육 방식을 고집하는 교사들이 학교에 여전히 많다는 걸 꼬집으며 이렇게 일갈했다.

"학교가 '올인'하듯 키워낸 한 사람의 '모범생'이 우리 사회에 미칠 긍정적인 효과보다, 어릴 적 배제와 차별, 방치로 자존감이 훼손된 한 사람의 '문제아'가 우리 사회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이 훨씬 크다는 것에 교사들은 애써 눈 감고 있는 것 같아. 입버릇처럼 대학 입시 때문에 한수 같은 아이들을 챙길 여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자신의 무책임을 감추기 위해 대학 입시를 핑계 삼는 것인지도 몰라."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 #인문계 고등학교 #진로교육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