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아성' 조선 타격한 왕후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사극 <옥중화> 네 번째 이야기

등록 2016.07.18 15:22수정 2016.07.1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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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봉은사의 문정왕후등(燈, lamp). 2010년 석가탄신일에 찍은 사진 ⓒ 김종성


드라마 <옥중화>에서 문정왕후(김미숙 분)는 주인공 옥녀(진세연 분)에게는 좋은 사람이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드라마 속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의 왕권을 무시하고 자신과 가문의 권세만을 추구하는 철권 통치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시각은 이 드라마만의 것은 아니다. 문정왕후에 대한 기존 평가를 상당 부분 반영하는 시각이다. 사실, 조선왕조의 법률제도만 놓고 보면, 그는 분명히 나쁜 사람이었다. 법률을 무시하고 권력을 휘두른 초헌법적 혹은 초법적인 통치자였던 것이다.


문정왕후는 명종을 억압하면서 20년간이나 권력을 휘둘렀다. 그 중 8년간은 합법적인 수렴청정 기간이었다. 명종이 열두 살에 왕이 됐기 때문에 처음 8년간은 합법적으로 대리 통치를 수행했다.

하지만, 나머지 12년간은 불법적인 통치 기간이다. 수렴청정이 종료됐는데도 자신의 통치를 이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법과 제도를 무시한 점만 놓고 보면, 그는 분명히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20세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인 김수영이 자유당 정권 붕괴 직후인 1960년 5월 18일에 지은 시가 있다. <육법전서와 혁명>이란 시다. 기존의 육법전서 체계를 준수하는 가운데 자유당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는 노력은 어리석다는 시인의 인식을 담은 작품이다.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

기존의 육법전서로 대표되는 자유당 법률체제를 준수하면서 무슨 혁명을 할 수 있느냐고 김수영은 외쳤다. 필요하다면 초헌법적·초법률적 수단이라도 동원해 혁명을 해야 한다고 김수영은 소리쳤다.


"최소한도로
자유당이 감행한 정도의 불법을
혁명정부가 구(舊)육법전서를 떠나서
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 한
혁명을 -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 뿐이다."

사실, 김수영의 외침은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역사적인 혁명이나 대사건의 상당 부분은 기존 법률체제를 무시하거나 파괴한 가운데서 나온 작품들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문정왕후가 조선왕조의 법률체제를 무시했다는 사실만으로, 조선왕조 백성도 아닌 후대의 우리가 문정왕후를 평가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유교의 아성인 조선 사회의 견고한 벽을 허물고 종교적 다양성, 사상적 다양성을 성취하려 했던 개혁가였다. 이런 목표를 위해 그는 왕조의 법과 제도를 무시했던 것이다.

13세기부터 몽골제국이 티베트불교를 지원한 이래로 동아시아 유목지대에서는 불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조선 건국시조 이성계가 살았던 함경도도 그랬다. 그의 혈통이 어땠든 간에, 그가 사는 함경도는 여진족 거주지였다.

여진족은 농업도 했지만, 아무래도 유목이 더 강했다. 그래서 유목지대의 분위기에 따라 여진족 거주지에서도 불교가 성했다. 이성계 집안의 본관이 전라도 전주든 아니든 간에, 역사무대에 명함을 내밀 당시 이 집안은 여진족 지역에 살고 있었다. 불교 신앙이 강한 지역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불교에 대한 조선 왕실의 신앙은 대단했다. 유학자들이 주도권을 잡은 나라인데도 왕실은 불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유학자 출신 정부 관료들의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궁궐 내에까지 불당을 차렸을 정도다.

그래서 조선 전기에는 '불교는 절대 안 된다'는 유교파와 '불교 좀 믿게 놔두라'는 왕실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대결 구도 속에서 불교는 정부의 차별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비호 속에 어느 정도는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결의 시소는 1469년 시작한 성종 시대부터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유학파 쪽으로 시소가 기운 것이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은 이전 왕들과 달리 친(親)유교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다. 지방 출신의 개혁파 선비그룹 즉 사림파(유림파)가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성종-연산군-중종으로 이어지는 시대에 조선 불교는 정부의 탄압에 시달렸다. 정부에서 승려를 관노비로 전락시키기도 하고, 사찰에 있는 종(bell)을 떼어 무기로 만드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쇠퇴일로로 떨어지던 조선 불교에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은 인물이 바로 문정왕후다. 중종의 장남인 인종이 단명으로 사라지고 둘째아들인 명종이 왕이 되면서 문정왕후가 등장하고 이를 계기로 불교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명종이 취임한 해인 1545년 정권을 잡은 문정왕후는 친불교 색채가 농후한 정책들을 선보였다. 그는 불교 세력의 체계화·조직화를 취해 불교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재정립했다. 그리고 3백여 개의 사찰에 대해 국가권력의 힘으로 공인을 해주었다.

또 일종의 승려 등록제인 도첩제를 통해 4천 명의 승려를 새로 충원했다. 선비를 늘리고 서원을 늘리는 게 아니라 승려를 늘리고 사찰을 늘리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이 뿐이 아니었다. 문정왕후는 승과 시험까지 설치했다. 유교 일변도의 과거시험 체제에 불교적 색채를 가미한 것이다. 이 시험에 급제한 승려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 활동으로 유명했던 두 승려도 승과를 거쳐 두각을 보였던 것이다.

이 같은 문정왕후의 친불교 정책을 일선에서 지휘한 승려가 있었다. 지금의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에서 주지 생활을 한 보우가 바로 그이다. 보우는 문정왕후의 지원 하에 불교의 세력 확장을 진두지휘했다.

유교가 헤게모니를 잡은 세상에서 노골적으로 불교정책을 추진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불교와 유교의 화해를 모색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불교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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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의 보우대사등 ⓒ 김종성


만약 고려시대 같았으면 보우한테 '나라의 스승'이나 '왕의 스승'이라는 의미에서 국사나 왕사 같은 공식 직함이 주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힘들었다. 그래서 문정왕후는 그에게 봉은사 주지와 더불어 선종판사라는 직함을 주었다.

불교의 양대 교파 중 하나인 선종을 총괄할 책임을 맡긴 것이다. 형식상은 불교 선종의 책임자였지만, 나라의 정신세계를 개조하는 일을 맡았으니 보우의 실제 위상은 그보다 훨씬 더 높았다.

당시 조선 정계는 보수파인 훈구파가 주도권을 잡은 가운데 진보파인 사림파가 도전하는 형세를 띠고 있었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상호 대립했지만,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해서만큼은 일치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문정왕후와 보우의 활동이 훈구파·사림파 양쪽의 기반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구파건 사림파건, 제도권이건 재야건 간에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구호 앞에서는 일치단결의 모습을 보였다. 왕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죽이자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문을 계속해서 올리면서 문정왕후를 압박했다. 여기에는 선비나 관료들 뿐만 아니라 미래의 동량인 성균관 유생들까지 동참했다. 

이때 성균관 유생들이 보인 행동은 오늘날 우리가 보면 오해할 만한 측면을 띠고 있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서애잡기>에 따르면,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가 번번이 무시되자 성균관 유생들이 선택한 시위 방식 중 하나는 구내식당에 가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의 대통령비서인 승정원 승지들까지 나서서 유생들에게 "제발 식당 좀 가라"고 권유했지만, 유생들은 말을 듣지 않고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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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성균관 기숙사의 모습. 오른쪽은 강의실인 명륜당. ⓒ 김종성


유생들이 집단으로 식당에 가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그들이 단식 투쟁을 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성균관 유생들한테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정조 임금 때의 성균관 유생 출신인 윤기가 쓴 <반중잡영>에 따르면, 성균관에서는 구내식당에서 하루 두 끼를 먹어야 1일 출석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출석 일수에 따라 과거시험 응시의 특혜를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생들이 식당에 가지 않는 것은 출석부에 도장을 찍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성균관 안에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했던 것이다. 출석 일수가 적으면 과거시험에서 특혜를 누릴 수 없는데도 그렇게 한 것을 보면, 그들이 승려 보우를 얼마나 미워하고 경계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정왕후는 동생인 윤원형이 이끄는 정치세력을 앞세워 반대파들의 공격을 막아가며 불교진흥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래서 문정왕후가 살아 있는 동안은 불교가 한동안의 침체를 벗어나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이런 시대가 좀 더 오래 지속되고 그 사이에 불교계에서 정치세력이 나왔다면, 조선왕조의 사상적 색채는 훨씬 더 다채로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권력을 잡은 지 20년 뒤인 65세에 그는 자신의 기운이 다했음을 느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와 동시에 조선 불교는 다시 어둠의 나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문정왕후는 자기 뜻을 계승할 후계자를 만들어 놓지 못했다. 아들 명종은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마지 못해 순종했지만, 어머니가 죽자마자 어머니의 정책과 사람들에 대한 말살에 착수했다. 조선 사상계를 다채롭게 꾸미고자 했던 문정왕후의 꿈은 그렇게 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옥중화 #문정왕후 #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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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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