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기 행위 금지, '반재벌'로 돌아선 정부

1882년 7월 23일, 한성코뮌이 등장한 날

등록 2016.07.23 12:04수정 2016.07.2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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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달력. ⓒ 김종성


임오군란 핵심은 일방적 시장개방에 대한 반대

프랑스 역사에만 코뮌이 있었던 게 아니다. 조선 역사에도 유사한 게 있었다. 이른바 한성코뮌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1882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수도 한양을 장악한 시민권력 지도부가 바로 그것이다.

그 해 7월 23일은 임오군란이 발생한 날이다. 음력으로 임오년 6월 9일인 이 날, 조선 수도 한양은 주민과 군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일시적인 무정부 상태에 돌입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군란'으로 폄하하고 있다. 물론 하급 군인들이 대거 참여한 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한성부 즉 한양 시민들의 대거 참여 속에서 이뤄진 대사건이었다. 차라리 임오'민란'으로 폄하하면 했지, 군란으로 폄하할 일은 아니었다.

임오군란을 두고 우리 사회는 '개항에 반대해서 일어난 보수적·국수적 저항운동'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보수적·국수적 사건이 아니라 도리어 진보적인 시민저항운동이었다.

많은 사람은 개화정책에 대한 불만 때문에 임오군란이 벌어졌다고들 말한다. 개화(開化)는 좋은 말이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개화라고 했으니, 나쁜 말일 수가 없다. 이렇게 좋은 개화에 대해 불만을 품은 세력은 당연히 나쁜 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임오군란은 단순히 새로운 문화에 대한 불만 때문에 촉발된 게 아니었다. 구한말 상황에서 개화의 핵심은 시장개방이었다. 조선의 시장을 일본·미국·청나라·영국·러시아 등에 개방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당시는 조선 기업이 이들 나라에 진출할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 시장을 이 국가들에게 일방적으로 개방하는 것이 개화의 본질이었다.

임오군란은 그런 시장개방으로 촉발된 삶의 질 저하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시장개방으로 피해를 본 서민대중과 중소 상인들의 봉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서양문화를 거부하는 투쟁이 아니라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서민대중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보수적이니 국수적이니 하고 폄하할 수는 없다. 19세기판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에 맞서 민족 생존권을 지키고자 일어난 투쟁에 대해 그런 모욕을 가해서는 안 된다. 


갑신정변에 비해 임오군란이 홀대 받는 이유

1884년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다. 3일 만에 끝난 사건인데도, 이 사건의 주역과 경과과정에 대한 역사서들의 기술은 꽤 소상한 편이다. 임오군란은 3일 정도가 아니라 무려 1개월간이나 계속됐다. 그런데도 사건을 일으킨 주역은 물론이고 그 1개월 사이에 벌어진 기막힌 일들을 소상히 다룬 글은 별로 없다.

사실은 갑신정변보다 임오군란이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인데도 이렇게 홀대를 받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계급 문제 때문이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은 지배층 인물들이다. 그에 비해 임오군란을 일으킨 세력은 나이 60세 김장손을 비롯한 한양의 하층민들이었다.

임오군란 주역들은 한 달 동안 정부를 압박해서 빈부격차 같은 계급 문제를 뜯어고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못 배운 '상것'들이 한 달씩이나 나라를 주물럭거리며 체제를 바꾸려 했다는 점은, 그 후에 지식인들이 이 운동의 의미를 폄하하고 운동의 본질을 축소·은폐하도록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만약 김옥균 같은 양반 특권층 인사가 사건을 일으켰고 무려 한 달씩이나 정국을 주도했다면, 아마도 수많은 지식인들이 달려들어 그 영웅담을 열렬히 서술했을 것이다. 하지만 임오군란 주역들 중에는 그렇게 '스펙' 좋은 인물들이 없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하층민들이었다. 만약 이들이 최종적인 승리라도 거뒀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못했으니 이들을 조명할 필요가 더욱 더 없었던 것이다. 

임오군란은 정부가 하급 군인들에 대한 봉급 지불을 13개월이나 미루다가 고작 1개월치 봉급만 지급한 일에서 촉발됐다. 그 1개월치 봉급으로 받은 쌀 포장을 열어보니, 절반은 겨와 모래였고 나머지 절반은 상당 부분 썩은 상태였다.

군인들한테 쌀이 지급되는 과정에서 부패 관료들이 쌀을 가로챈 뒤 겨와 모래를 집어넣고, 이를 숨기고 포장을 부풀릴 목적으로 물을 붓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창 더운 7월에 쌀가마니에 물을 부었으니 썩을 만도 했다.

정부 고위층을 포함한 상류층은 호의호식하는 속에서 하급 군인들이 그런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군인들은 더욱 더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 같이 못 먹는 상황이 아니라, 누구는 먹고 누구는 못 먹는 상황인지라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이어진 상황은 군인들이 쌀 배급소 직원들을 구타하고, 정부는 그 군인들을 체포하고, 시민들은 구속자 석방을 촉구하고자 시위를 벌이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임오군란이란 대형 사건은 이렇게 해서 발생했다. 사건 전개과정에서 관군 지휘체계를 이탈한 하급 군인들이 일반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민군을 형성한 상태에서 이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대원군 정부, 물가고 주범인 '재벌'들의 사재기 행위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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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입구.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다. ⓒ 김종성


구한말 정치비사를 다룬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시민군 주역들은 운현궁으로 몰려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밀담을 나누었다. 권력을 가져본 경험이 있는 대원군의 노하우를 빌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되고 말았지만, 7월 23일 그 뜨거운 현장의 시민군 주역들은 당장에 신속히 권력을 잡을 목적으로 그런 선택을 내렸다. 대원군 측과 제휴한 상태에서 이들은 한양 시내 주요 관청을 접수하고 고종 임금이 있는 창덕궁까지 점령했다. 한양 전체가 시민군의 수중에 떨어졌던 것이다.

사건을 계기로 외형상 최대 이익을 본 인물은 대원군이다. 1863년 아들 고종의 등극과 함께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10년 만인 1873년에 실각했다. 그랬던 그가 시민군과 손잡고 정권을 탈환했던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그가 최대 수혜자로 보였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하고 한양을 점령함으로써 시민군이 진압되기까지 1개월간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 시기의 흐름을 실제 주도한 쪽은 대원군이 아니라 시민군 지도부였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김장손을 비롯한 시민군 간부들이 조정에 들어가 관직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조직력을 발휘하면서 대원군 정부의 정책 방향을 이끌어갔다.

이를 입증할 사례는 충분하다. 일례로, 이 기간에 대원군 정부는 특권 상인인 시전 상인들의 매점매석 행위를 금지했다. 살인적인 물가고의 주범인 '재벌'들의 사재기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이에 더해 대원군 정부는 시전 상인들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조선 정부가 이렇게 느닷없이 반(反)재벌로 돌아선 것은 시민군 주역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대원군 정부는 무명잡세의 폐지도 결정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서민들 주머니에서 돈을 뜯어내던 각종 잡세를 폐지한 것이다. 부자들 세금을 줄이지 않고 서민들 세금을 줄이는 정책이 나온 것은 그 1개월간 정부를 이끈 세력이 누구였는가를 증명한다. 

경복궁 중건에 집착한 대원군, 1882년엔 정반대 태도 취해

과거에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사업에 집착했던 사람이다. 그는 경복궁을 화려하게 중건함으로써 왕실의 위엄을 하늘 끝까지 드높이고자 했었다. 그랬던 사람이 1882년에는 정반대 태도를 취했다. 시민군의 도움으로 재집권한 그는 그때 마침 진행되고 있던 경복궁 수리 사업을 얼른 중단시켜버렸다.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 조치는 무엇보다 서민층을 배려한 것이었다. 경복궁 수리 사업으로 서민층이 입게 될 피해를 줄일 목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대원군이 시민군 지도부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것만 봐도 당시 시민들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7월 23일 이후 1개월간 조선 정국의 주도권은 실제로는 시민군 지도부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이들은 급조된 군사조직 외에는 별도의 조직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대원군 정부를 압박하는 데 필요한 조직력은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파리 코뮌과 유사한 '한성 코뮌'이 그 1개월간 조선 정치를 주도했다고 말해도 크게 과언이 아닐 것이다. 7월 23일은 그런 의미를 갖는 날이다.

시민군 주역들이 더 이상의 힘을 갖지는 못했다. 이들은 대원군 정부를 자기들 의지대로 유도할 정도의 힘만 보유했다. 고종의 은밀한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가 시민군 주역들을 체포하고 대원군을 청나라로 끌고 감으로써 1개월간의 한성코뮌은 한여름 밤들의 꿈처럼 끝나고 말았다.

서울시청과 덕수궁 등이 있는 서울광장. 어떤 때는 평화롭고 어떤 때는 역동적인 이 광장은 임오군란 시민군 주역들의 능지처참 장소로 이용되었다. 1개월간 시민의 시대를 이끌었던 그들이 거기서 능지처참을 당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서민들의 열망은 사방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서울시청 광장에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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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손 등 임오군란 주역들이 능지처참을 당한 장소인 서울광장. ⓒ 김종성


#임오군란 #김장손 #서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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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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