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 싸먹을 줄만 알았지, 상추를 몰랐네

[서평] 꽃에 무릎 꿇는 마음으로 쓴 <내게 꼭 맞는 꽃>

등록 2016.08.12 08:06수정 2016.08.12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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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꼭 맞는 꽃> 책표지. ⓒ 궁리

2009년, 산과 들에서 만나는 꽃과 나무 이름을 알고 싶어 한 야생화 관련 동호회에 가입했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난 2010년 봄 어느 날, 동호회의 야생화 기행에 동참했다. 난생 처음 떠난 야생화 기행이었다.

그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23명 중 40, 50대로 보이는 사람은 언뜻 나를 포함한 서너 사람. 머리가 희끗희끗하거나, 60대이거나 그 이상이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연륜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와 비슷한 연령대나,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야생화에 더 관심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동호회 게시판에서 야생화에 대한 섬세하고 해박한 지식을 내비치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일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들과 세 번째 야생화 기행. 어느 순간 몇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무슨 큰 일이 생겼나?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하필 사람들이 오가는 길 한가운데 싹을 틔워 자라고 있는 금강초롱 한 포기를 길가나 숲으로 옮겨줄 것인가. 그냥 두는 것이 좋은가를 두고 의견을 모으는 중이었다.

풀 한 포기의 생사를 걱정하는 머리 희끗희끗한 나이의 남자들 모습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식물 관련 공부를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평소엔 직장에 다니거나 등 다른 일을 하면서 나처럼 주말을 이용해 야생화기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감동의 충격이 컸다.

야생화기행에 몇 차례 따라다니면서 그들이 야생화에 관심 둔 계기 같은 것이 궁금해 틈나는 대로 물어보곤 했다.  

"명예퇴직을 당한 후 어느 날 집 근처 공원에 갔는데 노란 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고 너무 예뻤다. 매일 그 꽃을 보러 가게 됐다. 신기하고, 설레더라. 보도블록 사이에 뿌리 내리고 피어난 그 꽃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어느 날 핸드폰으로 찍어 자랑을 했더니 한 친구가 "그 흔해빠진 민들레 가지고 뭐 그렇게 난리냐? 넌 그것도 몰랐냐?"며 어이없어 하더라.


그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꽃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흔하디흔한 민들레를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치원생들도 아는 민들레조차 못 볼 정도로 여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이 돌아봐지고, 뼛 속 깊이 아팠다. 정말 많이 아팠다. 민들레를 만난 덕분에 현실을 빨리 볼 수 있었고, 그만큼 빨리 다른 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친정아버지의 2010년 참깨꽃. ⓒ 김현자


악재가 되풀이되며 의기소침해진 내게 삶의 설렘을 줬던 명자나무 꽃은 언제나 설레게 한다. ⓒ 김현자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야생화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이처럼 특별한 꽃이 있을 것이다. 내게도 우울증을 털어내 준 명자나무 꽃이 있고, 친정엄마가 좋아해 엄마 생각과 함께 보곤 하는 자귀나무와 때죽나무, 도라지 등처럼 남다른 꽃과 나무들이 있다.

참깨꽃이 피면 어느 해 유독 참깨농사가 잘 됐다며 기뻐하셨던, 내 손을 끌고 참깨밭으로  데리고 갔던 친정아버지가 떠올라 뭉클해져 바라보기도 한다. 이밖에도 누리장나무, 남산제비꽃, 금붓꽃, 뻐꾹채, 족도리풀, 산딸나무, 처녀치마 등, 이런저런 추억과 사연으로 특별하게 스며들어 있는 꽃들이 꽤 있다.

삼겹살을 입이 불룩불룩하도록 먹을 줄만 알았지 상추를 몰랐다.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마늘과 쌈장을 얹기만 했지 상추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상추는 어엿한 현화식물. 꽃이 피고 열매도 맺는다. 잎차례는 어긋나기. 오래전 우리나라에 정착한 국화과의 한해살이 식물이다. (…) 어느 날 산행을 마친 후의 식사자리. 국과 밥, 찌개가 나오기 전 몇 가지 밑반찬이 놓였다. 특이하게도 후식으로 나올 법한 방울토마토가 한 귀퉁이에 놓였다. 앞에 앉은 이가 방울토마토를 쌈장에 찍어 먹는 게 아닌가. 수박을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은 보았지만 그 조합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휘둥그레진 나를 보고 하는 설명이 재미있었다. 고추처럼 토마토도 쌈장에 찍어 먹으면 훨씬 맛있어요. 토마토도 가지과 식물이거든요.

<내게 꼭 맞는 꽃>(궁리 펴냄)의 저자도 그렇다고 한다. 저자는 식물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전공과 전혀 다른 출판인의 삶을 살면서 야생화와 나무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 인왕산에 가게 됐단다. 그 길에서 나무와 꽃들을 만나며 비로소 알게 됐단다. 자신이 나무와 꽃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 없다는 사실을.

이후 꽃과 나무가 눈에 밟혀 산을 찾게 됐다고 한다. 많은 꽃과 나무를 만나고, 그 이름을 알게 되고, 그 생태를 알게 됐다. 그렇게 다섯 해가 됐다. 그동안 특별한 사연과 함께 만난 꽃들을 일간지에 '꽃산 꽃글'이란 제목으로 연재중이란다. 그런데 '굴기'라는 필명으로 쓴단다. '꽃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순간'을 떠올리며 지은 필명 굴기(屈己)란다.

청상주 포기에서 피어난 꽃이다. 상추꽃은 상추 종류에 따라 저마다 다른 꽃을 피운다. 국화과 꽃이란걸 책에서 처음 알았다. 그러고보니 꽃이 국화꽃과 비슷하기도 하다. ⓒ 김현자


조도만두나무. 전남 진도 부근의 조도라는 섬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열매가 만두 비슷해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키 큰 나무인데도 숲에 자라지 않고 밭둑 등에 주로 사는 등 생태도 특이하다고 한다. <한국의 나무> 공저자 한사람인 김태영 제공이다. ⓒ 김태영


갑오년(2014) 여름. 지리산 가는 길이다. 집결장소인 산청군 신안면 면사무소에 도착하니 지방선거에서 사전투표를 안내하는 큰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펄럭이는 그것을 보고 투표장으로 들어갔다. 주소를 대니 우리 동네의 투표지 7장이 출력되어 나왔다.

우리나라 기표도장에는 무늬가 있다. 그냥 동그라미로 하면 투표지를 반으로 접었을 때 인주가 묻어 무효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넣은 것이다. '사람 인(人)인 줄로 알았는데 '점 복(卜)'이라고 한다. 기표소에 들어가 심호흡을 하는데 사람주나무가 생각났다.

사람주나무의 줄기는 사람의 벗은 몸처럼 매끈하다. 손으로 만지면 분처럼 흰 가루가 묻어난다. 오래될수록 울퉁불퉁한 알통 같은 마디를 벗기도 한다. 가을이면 아주 붉게 단풍이 드는 기품 있는 나무. 오늘 지리산에서도 사람주나무를 보게 될까. 사람주는 '사람이 주(主)다'는 말의 준말이 아닐까. 붉은 도장을 불끈 눌렀다. 사람주나무. 대극과의 낙엽 교목.

사람주나무 편을 읽노라니 2014년 5월, 하던 일이 꼬여 심란하던 날 용산역으로 달려가 기차를 타고 갔던 선운사 가는 길이 떠오른다. 선운사 가는 그 숲길에서 사람주나무를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처럼 우연히 만났거나 특별한 사연으로 남은 꽃들을 '자연의 빈자리를 채우는 84가지 꽃 이야기'라는 부제로 소개한다.

그런데 식물 관련 책들에서 흔히 보는 그 식물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보다는 관련된 지식이나 자신과 관련된 사연을 풀어 놓는 것에 중점하고 있다. 이런지라 식물에 대해 좀 많이 알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선택했다면 경우에 따라 약간 실망할 수도 있겠다.

사람주나무에 대한 설명은 좀 많이 들어간 경우, 대개의 식물 관련 책들이 제목이나 본문 끝에 식물의 기본 정보를 넣는 것처럼 넣는 것은 고사하고 이처럼 사연 속에 녹여 쓰고 있어 차근차근 읽어야만 그 식물에 대한 기본만이라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올 봄, 민들레와 명자나무 꽃에 대한 기억이 없다. 무엇으로 그리 바빴을까? 책 덕분에 한동안 잊었던 야생화 기행 그 길에 만났던 아름다운 사람들과, 내게 특별한 사연의 꽃들이 생각났다. 나도 이런 글을 써볼까? 욕심도 생긴다. 이처럼 풀과 나무를 정서적으로, 그리고 추억과 사연과 함께 만나고, 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깊이 공감할 책이다.
덧붙이는 글 <내게 꼭 맞는 꽃>(이굴기 글과 사진) | 궁리 | 2016-06-22 | 18000원

내게 꼭 맞는 꽃 - 자연의 빈자리를 채우는 84가지 꽃 이야기

이굴기 지음,
궁리, 2016


#풀과 나무 #사람주나무 #야생화 #조도만두나무 #상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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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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