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상한 집만 잔뜩... 서울 10년 살면 '비공인중개사'

[서평]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살아남기 <흙흙청춘>

등록 2016.08.15 10:43수정 2016.08.15 15:08
2
원고료로 응원
최근 국내 유명 피로회복 음료 광고의 변천사를 다룬 기사가 보도됐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희망찬 청년'이 광고 주인공이었다면 2010년대 들어서는 '슬프고 힘든 청춘을 위로'하는 이미지로 변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누리꾼은 해당 광고를 보며 "20년 전만 해도 정장 입고 첫출근하며 밝게 웃는 모습이 등장했는데, 이젠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콜센터 노동자로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고 말했다. '청춘'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얘기다.


2015년부터는 한국을 지옥으로 풍자하는 '헬조선'이나 '흙수저' 등의 '수저계급론'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단어가 됐다. 대부분 청년의 힘든 생활을 빗댄 신조어들이다. 예전에도 물론 청년들의 삶이 만만하지는 않았겠지만, 이제는 '희망'조차 사라져 가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떤 삶을 살길래 이런 자조가 유행한 걸까.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책 <흙흙청춘>(세창미디어)이 지난 6월 출간됐다.

밥버거로 살아가는 삶, 서울 10년 살면 '비공인중개사'

a

<흙흙청춘> 표지 사진 ⓒ 세창미디어

<흙흙청춘>은 10명의 평범한 청년이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살아남기'를 주제로 쓴 글을 엮었다. 먼저 <월간잉여>의 편집장, 즉 '잉집장'으로 알려진 최서윤씨의 글을 보자. '잉여'들의 잡지를 만든 그는 '한 잉여의 먹고사니즘'을 글로 풀어냈다.

'식비로 한 달에 28만 원 미만 지출'을 목표로 살았다는 최씨는 '편의점 음식'과 '밥버거' 등 포장 음식을 품목별로 맛보면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가 가장 좋은 메뉴를 골라낸다. 1500원에서 4000원 사이로 혼자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음식을 찾은 결과라고 한다. 글로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오늘날 자취생이 자주 겪을 수 있는 식비 문제를 다뤘다. '다른 자취생들은 뭘 먹고 살까' 등의 글도 곁들이며 2016년 청년들의 식문화를 소개한다.

'밥버거로 살아가는 삶'을 보며 '연민'을 느끼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연민의 시선이 더 상처가 된다고 꼬집기도 한다. "연민보다는 연대의 대상이고 싶다"는 최씨는 "요즘 젊은 애들 불쌍하다"는 말을 온라인에 손쉽게 전시하지 말고 구조적 모순을 보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10년 살면서 집을 구하다가 '비공인중개사'가 됐다는 홍덕구씨의 글은 더욱 웃(기면서도 슬)프다. '지방 청년 상경 분투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홍씨는 "이 가격에 이런 집 또 없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이 "이 가격만 아니면 절대 살고 싶지 않은 집"이라는 의미라는 걸 파악하게 됐다고 적었다.

내가 봤던 집 중에는 다른 곳은 다 멀쩡한데 화장실로 통하는 문 높이가 내 가슴께에 불과해서 림보 자세로 드나들어야 하는, 유연성 강화에 좋을 듯한 집도 있었다. 이렇게 괴상한 집들을 잔뜩 보여준 뒤, 마지막으로 비교적 멀쩡한 매물을 보여 줘 계약을 유도하는 것이 공인중개사들의 수법이었다. 모처럼 괜찮다 싶은 집은 전세금이 오백만 원이나 천만 원쯤 부족하거나, 근저당이 발목을 잡았다.

이렇게 두 지역에서 부동산 십여 곳 정도를 돌고 나니 좌절과 회의가 몰려왔다. '룸펜 주제에 전세를 꿈꾼 것이 죄인가. 평생 월세 살다 첫 전세는 납골당이 되겠구나.' 세상 모든 집주인들이 나를 비웃는 듯했다. '월세 내는 건 마음대로지만 전세 얻는 건 아니란다.'


절망하는 청춘, TV에서도 밀려난 신세?

드라마나 시트콤에서 '청춘'이 실종되고 있다는 주장의 글도 인상적이다. '청춘의 드라마'를 제목으로 적은 송치혁씨는 문화적 담론에서 '청년'의 상황을 다루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떠오른 '가족'의 이미지가 붕괴하고, 200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던 청춘의 이미지도 이제는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

드라마로 제작된 웹툰 원작 <미생>에서는 "팔리지조차 못하는 청춘의 우울한 표정을 담아냈다"는 얘기를 보자. 송씨는 글에서 "사회가 연민하는 모습과 그 밖으로 밀려난 모습의 어긋남은 결코 청춘의 삶이 녹록지 않음을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미생'과 '송곳'이 된 청춘들은 시대의 결핍이 되어 버렸다. 이제 청춘들은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기에, 연민이라는 필터를 거쳐야만 수용될 수 있는 존재들로 전락했다. 이들의 무기력함이나 잉여됨을 둘러싼 수많은 기성 담론의 반응은 더욱 명확했다. 조금 과장해 표현하자면 사회에 별반 도움 될 것 없는 존재가 지금의 청춘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이 아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청춘에 대한 근본적인 시선의 변화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90년대 이래로 소비와 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던 신세대들은 미운 오리새끼가 되었다. 자랑스럽게 가족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이들은 명절만 되면 방 안에 숨어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TV가 이런 청춘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했다. 취업과 결혼에 대한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이들이 가족의 자랑일 리가 없다. 청춘들은 그저 세상에 패배한 존재일 뿐이다.

과거 <남자셋 여자셋> <논스톱> 등 '즐겁게 살아가는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삼은 시트콤이 많았지만 이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저자는 "TV가 청춘을 브라운관 밖으로 밀어낸 이유"에 관해 "이 시대의 청춘이 지닌 이미지가 루저와 폐인, 잉여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문화계가 청년을 다루는 방식이 변화한 게 청년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는 글. 최근 드라마에서 2000년대가 아니라 '97년', '94년', '88년'을 다시 호출하며 과거를 향해 '응답하라'고 외치는 상황을 보면 꽤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다가온다.

청년 세대 담론이 현실과 다시 만나려면

책의 앞부분이 '먹고사니즘'의 경험을 다뤘다면 후반부는 '청년 담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한다. <조선일보>의 '달관 세대론' 등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까지의 청년 담론은 주로 '기성세대'가 3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이며 '노력'의 유무에 더 무게를 두었다는 것이다.

<흙흙청춘>은 10명의 저자가 직접 청년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 "왜 분노와 혐오로 우리 사회의 코드가 바뀌었는지" 보여준다. '노오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힐링'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절규이기도 하다.

대학, 취업, 결혼으로 이어지는 생애주기에서 '취업'은 이전과 이후의 삶을 결정짓는 분기점이다. '대학교 5학년'이 일상이 된 시대에 불안정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혼을 포기한다. 취업이 유예되는 상황에서 결혼에 필요한 돈을 마련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결혼은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본문은 나아가서 대학의 위기와 청년 문제의 프레임에 관해서도 적었다. 선거 때마다 청년을 위한 공약이 나오지만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언급하면서 대학 구조조정이 만드는 문제도 거론한다. 현실 인식이 '세대론적 동정'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세대 간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실과 동떨어진 청년 세대 담론이 다시 2030의 세계와 만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문제의 답을 얻으려면 먼저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청년 세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청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 위해 '잉집장' 최서윤씨가 만든 '수저게임'을 직접 해볼 수도 있겠고, "청년들이 빠진 청년 세대론의 끝"을 말한 <흙흙청춘>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흙흙청춘> (글 최서윤 외 9인·그림 엉덩국/ 세창미디어/ 2016.6.20/ 1만5000원)

흙흙청춘 -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살아남기

최서윤 외 지음,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2016


#흙흙청춘 #청년 세대 #흙수저 #헬조선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시키는대로 일을 한 굴착기 조종사, '공범'이 됐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