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꾸짖고 자결한 기생, 정부포상 받을까

추경화씨, 기생 산홍 자료 국가보훈처 제출... "내년 3월께 심사 결과 나올 듯"

등록 2016.08.15 12:46수정 2016.08.15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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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을 꾸짖었던 진주기생 산홍(山紅)은 항일투사로 인정돼 정부 포상을 받을 수 있을까? 산홍은 을사오적이지용(李址鎔, 1870~1928)을 꾸짖고 '첩 요청'을 거부했으며, 그 뒤에 자결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산홍한테 정부포상을 추서해야 한다며 국가보훈처에 관련 자료가 제출돼 관심을 끈다. 진주향토사학자 추경화 충효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장은 지난 6월과 7월에 걸쳐 관련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

15일 추경화 지회장은 "산홍에 대한 자료를 모아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며 "정부포상을 받으려면 국가보훈처에서 심사과정을 거쳐야 한다"라고 밝혔다.

추 지회장이 지난 7월까지 국가보훈처에 낸 산홍 관련 자료는 모두 34건. 자료는 경상우도 암행어사 이헌영(李憲永)의 기록을 모은 <교수집략(嶠繡集略)>과 항일순국지사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이 남긴 <매천야록>(1906), <대한매일신보> 기사 등이다.

또 유학자 양회갑(梁會甲, 1884∼1961)의 시문집 <정재집(正齋集)>, <진주항일운동사>, 김수업 전 경상대 교수가 쓴 <진주이야기> 등도 자료로 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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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를 모신 의기사 앞에서 사당에는 오른쪽에는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의 시판이 걸려있다. 왼쪽에는 진주기생 산홍의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시판이 걸려있다. ⓒ 김종신


산홍의 정부포상 추진 사실이 알려지자 관심을 보인 학자들도 있었다. 하강진 동서대 교수가 <교수집략>을 추 지회장한테 보내왔던 것이다.

이 기록에 보면, 1882년 11월 16일 자에 이헌영이 진주에 머물 당시 내용이 적혀 있다. 그 내용은 "본주(진주) 기생 산홍이 와서 맞이했는데 듣자하니 20세라 서울에 올라가 살다 내려왔고 서울에 거부할 때 약방기생으로 4년간 일하다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다고 하는데 글을 잘 알았다"라고 돼 있다.


추경화 지회장은 "지금까지 산홍의 나이와 진주기생 이전의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며 "이 기록은 다른 자료와 대조해 산홍의 나이와 전 이력을 추정할 수 있고, 업적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당시 서울 양방기생에 차출될 정도라면 상당한 지식층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매천야록> 속 산홍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진주기생 산홍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했다. 이때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

1905년 을사늑약(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내부대신)이 이듬해 진주를 방문했고, 그가 산홍에 반해 첩으로 삼으려 했지만, 산홍은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1906년 11월 22일 2면)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 앞에 당당함은 일개 기생이 아니라 절대 권력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기개 어린 항일투사로 보는 게 마땅하다"고 기록해 놓았다.

<정재집>에는 산홍이 자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지용은 2008년 2월에도 지인의 생일잔치 때, 끊임없이 산홍한테 첩이 돼 달라고 협박했다. <정재집>에는 "산홍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다"고 되어 있다.

진주에 산홍의 흔적은 많다. 진주성 의암 옆 바위에 한자로 '산홍'이라 새겨져 있고, 진주성 의기사에는 산홍이 쓴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의기사의 느낌을 읊음)이란 시판이 걸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千秋汾晉義(천년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雙廟又高樓(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이 있다네) 羞生無事日(일없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마냥 부끄러워) 笳鼓汗漫遊(피리와 북소리에 들떠 이렇게 놀기만 하네)."

임진왜란 때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서 죽은 의기 논개(1574~1593)의 맥을 잇고자 하는 산홍의 마음이 담겨 있는 시다.

후대 진주사람들은 그를 추앙해 왔다.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1919~1960)는 1940년 <세세년년>이란 노래를 지었고, 김수업 전 경상대 교수는 책 <진주이야기>에서 산홍은 자결했다고 설명해 놓았다.

추경화 지회장은 "기생이었지만 을사오적을 꾸짖고 첩이 되기를 거부한 그 정신은 아무나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것"이라며 "진주사람들은 산홍을 계속해서 추앙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산홍과 관련한 자료 제출은 다 끝났고, 이제 심사과정만 남아 있는 셈이다"며 "제출된 자료는 20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 회의를 거칠 예정인데, 심사 결과는 특별한 상황이 없으면 내년 3월 즈음 나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진주기생 산홍 #을사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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