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없다" 소리 들어도 그리고 또 그린다

[시골에서 만화읽기] 히가시무라 아키코 <그리고, 또 그리고 5>

등록 2016.09.01 14:21수정 2016.09.0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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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지만, 나한테는 글을 가르친 스승이 없습니다. 딱히 스승으로 꼽을 분이 없지만 나한테 누군가 스승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스승이요, 나를 이루는 모든 숲이나 마을이나 바람이 스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학교를 나오지 않는대서 글을 가르친 스승이 없을 만하지는 않을 테지만, 고등학교를 마칠 적까지 입시공부만 했을 뿐, 글쓰기나 책읽기를 가르치거나 이끈 사람은 없어요.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며 연필을 쥐고, 늘 스스로 헤아리며 책을 살폈어요.


곰곰이 따진다면 학교에서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학교 바깥에서는 누구나 스승이 되었어요. 낳고 기른 어머니가 살림과 삶을 보여주는 스승입니다. 동무가 되어 함께 웃고 울던 이들이 스승입니다. 마을이나 사회를 이루면서 저마다 제몫을 씩씩하게 맡는 이웃들이 스승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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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겉그림 ⓒ 애니북스

그림이 팔릴 리도 유명해질 리도 없는데 그렇게 고된 길을 평생 걸어갈 사람은 없어요. 선생님은 바보예요. 사람이 너무 물러터졌어요. 언제나 그랬어요. 그때도, 그때도. (10쪽)

만화를 선택했다고 말하면 근사하게 들리겠지만, 화실을 이어받지 않고 도망친 저는 오사카로 돌아온 후, 매일 미친듯이 만화만 그렸습니다. 선생님 걱정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리려는 것처럼 그저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제 선택이 풀리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것처럼. (46쪽)

히가시무라 아키코 님이 이녁 '그림 스승'을 기리면서 이녁 발자국을 되새기는 자서전 같은 만화책 <그리고, 또 그리고>(애니북스,2016) 다섯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책 <그리고, 또 그리고>는 모두 다섯 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이 만화책은 일본에서 '만화대상 2015' 대상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첫째 권부터 다섯째 권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그만한 상을 받을 만하겠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 만화책을 그린 분은 이녁한테 부끄러울 수 있는 대목도 찬찬히 끄집어내어 털어놓고, 그림을 그리는 길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되새기고, 삶을 이루는 든든한 밑힘이란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펼칩니다. 누구나 만화를 그릴 수 있지만, 아무나 그리지 못하는 만화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만화책 다섯 권으로 찬찬히 들려주어요.

막상 도쿄에 와 보니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일도 재미있고 편집자들과 술 한잔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새로운 인간관계도 많이 형성되어 언제부터인가 니시무라와 소원해졌습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저는 금방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들어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결혼해서 출산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혼했습니다. 이때가 제 인생의 암흑기였습니다. 매일 울고 또 울었고 원고를 그리면서도 울었습니다 … 하지만 그 시절만큼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에 구원받은 적이 없었을 겁니다. (116∼117쪽)

만화가 아주머니한테 '그림 스승'이던 분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술담배를 하지 않았다는 '그림 스승'은 그만 폐암에 걸렸다 하고, 만화가 아주머니가 한창 잡지 연재를 많이 받으면서 만화가로 자리를 잡을 무렵 큰병을 앓으며 쓰러졌다는데, '도쿄에서 바쁜 만화가로 지내느라' 아예 잊고 살았다고 해요.

만화가 아주머니 스스로 털어놓기도 하는데 '만화가로 자리를 잡고 널리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해요.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기도 했다지만, 뒤를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고 해요.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려 했고, 바로 이 몸짓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몸짓'은 이녁 '그림 스승'한테서 배웠다고 해요.

언제 어디에서나 "그려라" 하고 한 마디를 터뜨렸다고 하는 '그림 스승'이라고 하거든요. 배고프든 배부르든, 몸이 힘들든 안 힘들든, 그림을 많이 그렸든 적게 그렸든, 이런 일이 있든 저런 일이 있든, 아무튼 그림을 그리고 나서 얘기하자고 다그치면서 그림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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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겉그림 ⓒ 애니북스

그림을 그리는 인간에게는 모라토리엄 기간이 필요없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언제나 가르쳐 주셨는데 말입니다. (60쪽)

슬플 때도, 감기에 걸려도, 열이 날 때도, 화가 날 때도, 짜증스러워도, 제 만화가 재미없다는 말을 들어도, 그림이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앙케트 결과가 나빠도, 단행본이 팔리지 않아도, 지진이 일어나도, 도쿄가 정전으로 컴컴해져도, 만화를 그리고 있으면 언제나 머릿속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119∼120쪽)

<그리고, 또 그리고> 다섯째 권을 보면 만화가 아주머니가 아무래도 '그림 스승'한테서 그림을 배우며 몸에 익힌 재미난 모습이 살짝 나옵니다. 만화가 아주머니는 이녁 만화를 놓고 독자들이 재미없다고 하면, 이런 비평이 인터넷에 올라오면 "폰트가 춤을 춘다"라든지 "명조체가 움직인다"고 말한대요. 이녁 만화책을 나무라는 글이 아니라 '폰트'나 '명조체'일 뿐이라고 여긴다고 합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독자들이 어떻게 이녁 만화를 읽더라도 다시 그리고 또 그리며 새로 그릴 뿐인 걸요. 이번 작품은 독자들이 재미나게 읽어 줄 수 있고, 다음 작품은 독자들이 재미없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다. 어떠하든 앞으로도 또 그리고 거듭 그리며 자꾸 그릴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화를 그리면서 '살아가는 보람'을 누린다고 하는 만화가 아주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만화를 그리면서 '육아 스트레스'를 잊고, 만화를 그리면서 '어리석게 보낸 지난날'을 잊으며, 만화를 그리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 숨을 쉬는구나' 하고 느낀다고 해요.

천국에서도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선생님 목소리가 저에게 들리니까 제 목소리도 선생님께 들리겠지요? 그렇지요, 선생님? (134∼135쪽)

그림이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리고 또 그립니다. 이 그림은 지난 그림과 달리 더욱 마음을 쏟아서 그립니다. 이 그림도 지난 그림처럼 다시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리고 또 그립니다. 자꾸자꾸 그립니다. 용을 써서 그립니다. 온 기운을 쏟아서 그립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그립니다. 틀림없이 일어설 수 있다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그립니다.

그리고, 그리고 말이지요, 하늘나라에 있는 '그림 스승'한테 마음으로 속삭이면서 그립니다. 비록 '그림 스승' 곁자리에서 내빼듯이 도쿄로 떠나면서 만화를 놓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 때문에 마음 깊이 죄책감이 생겼어도 또 그리고 다시 그립니다. 만화를 그리기 때문에 먼저 떠난 스승을 기리는 이야기를 펜으로 엮을 수 있어요. 만화를 그리기 때문에 멀리 있는 사람들하고도 마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요.

만화 한 칸에 바람을 담습니다. 만화 한 칸에 빗소리를 담습니다. 만화 한 칸에 웃음하고 눈물을 담습니다. 만화 한 칸에 내 노래를 담고 네 웃음을 담습니다. 이리하여 만화가 아주머니 한 분은 오늘도 새롭게 기운을 내어 책상맡에 달라붙어 밤을 새웁니다.
덧붙이는 글 <그리고, 또 그리고 5>
(히가시무라 아키코 글·그림 / 정은서 옮김 / 애니북스 펴냄 / 2016.8.10. / 8000원)

그리고 또 그리고 5 - 완결

히가시무라 아키코 지음, 정은서 옮김,
애니북스, 2016


#그리고 또 그리고 #히가시무라 아키코 #만화책 #만화읽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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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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