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6.8 지진 괴담' 두려워 여행가방을 쌌습니다

획산되는 괴담 공포... 괴담 믿을 수 없지만, 안일한 정부는 더 못 믿어

등록 2016.09.23 20:38수정 2016.09.2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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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오래 지나도 에너지 보충하는 데 좋대요. 부피도 작고. 생존가방 싸려면 필요하대요."


참치 통조림 서너 개를 받아들고 눈을 동그랗게 뜬 나에게 여자친구가 설명한다. 원룸 근처에 야트막한 야산 하나를 이고 사는 내가 잠들기 전, 머리맡에 생수병을 두는지 확인하는 것도 그녀다.

영화 <터널>을 보고 배운 지혜다. 당국이 발표하지 않는 작은 규모를 포함해 최근 10여 일간 수백 차례. 요즘 경주, 포항과 일본을 노크하고 있는 지진이 많은 이들의 일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지난 12일과 19일, 최근 두 번의 월요일은 포항 시민들에게 '지진의 밤'으로 기억된다. 12일 저녁에는 경주 남남동 9km와 8km 지점에서 각각 규모 5.1(오후 7시 44분께), 5.8(오후 8시 33분께)의 지진이 발생했다.

19일 오후 8시 33분에는 경주 남남서 10km 지점에서 규모 4.5의 지진이 또다시 포항을 흔들었다. '난생 처음'이라는 시민들의 반응은 정확한 것이었다. 규모 5.8의 지진은 우리나라 지진관측이 시작된 이래로도 처음인 것이었으니까.

내가 살고 있는 포항에서 감지되는 지진이 늘면서 이제는 지진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이 곳에서는 지진 당시의 '풍속도'가 안부인사가 됐다.


불안한 '괴담', 토요일이 두렵다

최근에는 그런 불안이 '괴담'으로까지 확산되는 모양이다. 일본에서 개발된 지진 감지 프로그램이 다가오는 토요일인 24일, 한국에서 규모 6.8 정도의 지진이 발생할 것을 예측했고, 이를 캡처한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포항 시민들 사이에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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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6.8' 지진 예고하는 일본 프로그램 12일과 19일 발생한 지진까지 예측했다는 일본 프로그램의 화면면을 캡여한 그림이 포항 시민들이 소속된 온라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돌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 따르면 오는 24일(토) 규모 6.8의 대형지진이 한국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돼, 포항지역 시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 ⓒ 알수없음


이번 '괴담'에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지난 12일과 19일의 지진 발생을 모두 정확히 예측했단다. 위 사진은 2만 명의 포항시민이 가입돼 있는 커뮤니티에도 게시됐다. 이 곳을 드나드는 포항 시민들은 지진에 관련된 기사나 정보들을 계속해서 공유하고 있다. 전에 없던 일이다.

내가 수학 과외공부를 가르치는 학생의 집안 풍경도 달라졌다. 아파트 15층에 자리한 이 집에서 액자, 화분, 텔레비전 등 떨어질 만한 물건들은 모두 바닥으로 내려왔다. 거실에는 커다란 가방이 며칠째 그대로 놓여있다. 토요일에 하려던 보충 수업은 이미 취소됐다. 지진 괴담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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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 pixabay


물론 출처가 불분명한 이 프로그램을 믿을 순 없다. 기상청도 일본의 지진 예측 프로그램에 대해 "며칠을 앞두고 지진을 예측할 수 있다면 일본의 동일본대지진이 왜 발생했겠느냐"며 근거없는 자료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지진이 발생해도 안일하게 대처하는 정부는 더 믿을 수가 없다.

"그 정도 지진이 오면 월성 핵발전소는 깨질 텐데. 외부 피폭은 피한다손 치더라도 대한민국어디 한 군데 농사는커녕 뼈 묻을 데도 없을 거예요."

여자친구의 불안도 커진다. 나는 불안해하는 여자친구와 이번주 토요일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저 '괴담'에 '불과할' 뿐이니 생존가방을 싸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여행가방은 준비해야겠다 싶었다. 참치 통조림, 생수병과 비상약은 두고, 김밥과 카메라를 챙긴 새로운 '피난'이다. 괴담이 괴담으로 그쳐야 우리의 주말계획은 여행이 될 수 있다. 상상하기 싫은 그 불안이 현실로 이어지면 여행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지진이 바꾸어놓은 일상, 지금이 참 낯설다

갑자기 여행을 계획하고 짐을 꾸리는 것 말고 우리에게 생긴 변화는 또 있다. 결혼해도 아이는 낳지 말자는 내 생각에 여자친구가 조금이나마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겪었다. "돈보다 생명"이라는 구호는 교회에서 나누어준 스티커 안에만 잠들어 있다. 여자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나잖아요. 태어나길 거부할 권리도 없고, 태어난 걸 후회할 기회도 없잖아요. 지진을 겪어보니 그게 미안해지더라고요. 미안해할 줄 알아야겠다 싶더라고요."

24일. '괴담'이 약속한 시간이다. 여러 의미에서, '여행'을 앞둔 여자친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착잡함을 담은 가방, 여행으로 꾸민 피난, 출산을 약속하지 못하는 결혼.

지진이 바꾸고 있는 일상의 풍경이 참 낯선 요즘이다.
#경주지진 #포항 #생존가방 #여행가방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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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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