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모욕 칼럼' 쓴 대학생, 진심으로 안쓰럽다

[주장] 성신여대 정외과 3학년 정은이씨가 <뉴데일리>에 기고한 글에 부쳐

등록 2016.09.27 15:18수정 2016.09.2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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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마지막 전투'로 끝난다. 이 중 궁지에 몰려 마구간으로 몸을 숨긴 난쟁이들의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사실 그 마구간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일종의 문이었다. 마구간 안의 세계는 밖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난쟁이들은 이를 전혀 보지 못한다. 밝은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에 갇혀 있다고 착각하고, 진수성찬에 포도주를 차려줘도 그저 말이 먹고 마시던 홍당무와 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 편견에 갇히면, 아무리 진실이 눈앞에 다가와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오해하고 있는 것을 팩트라고 착각하고, 자신의 관점이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리고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다른 난쟁이와 대화하면서 이 착각은 크고 깊어진다. 나니아 세계의 신인 거대한 사자 아슬란은, 저들을 구할 수 없다고 고개를 가로 젓는다.

환상문학의 양대산맥으로 일컬어지는 이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난 건 길지 않은 한 편의 글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글이 화제를 몰고 올 때 그렇듯, 이 글을 쓴 사람도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조선일보>의 '간장 두 종지'가 그랬고, '자유경제원'에 이화여자대학교 인문학부 학생이 기고한 글도 그러했다. 앞선 글들도 굉장히 충격적이었지만, 이번 <뉴데일리>의 글 역시 파급력이 만만치 않다. 지난 26일 오후 4시 30분께, '백남기 사망 - 지긋지긋한 시체팔이'(지금은 사망유희로 제목이 바뀌었다)라는 제목의 주장성 글이 올라왔다.

편견에 갇힌 사람들

요지는 이렇다.

'백남기씨의 사인은 물대포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빨간 우비를 입은 신원불명의 남자로부터 폭행을 당한 것인지 모른다. 설사 물대포가 맞다고 하더라도 백남기씨의 죽음은 정부의 탓이 아니라 폴리스라인을 넘은 그의 탓이다. 그의 죽음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거짓 선동을 일삼고 있으며, 전태일과 미선이·효순이, 세월호가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시체팔이'가 시작됐다.'


'빨간우비'에 관한 의혹은 이미 10개 월 전, 여러 보도를 통해 명확하게 논파된 음모론이다(관련 기사 : 빨간 우비가 백씨 폭행? 일베 주장 따라하는 새누리당). 주로 '일간베스트 저장소' 등의 커뮤니티에서 유통되고 확산되던 의혹은, 일부 새누리당 의원에 의해 공론화되었으나 워낙 근거가 부족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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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직후 구조에 나선 한 시민(빨간 비옷)이 강한 물대포에 맞아 백남기씨 쪽으로 쓰러지고 있다. ⓒ 이희훈


그런데 지금껏 잠잠하다가 백남기씨가 사망하고 난 뒤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당시 <오마이뉴스>나 <뉴스타파>가 촬영한 사진·영상 어느 것을 보더라도 저 빨간우비의 남자가 백남기씨에게 주먹질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갈무리한 이미지 몇 개만을 가지고, 주먹이 어떻고 자세가 어떻다고 주장하는 건 포도주를 말이 마시던 물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정치는 자원의 재분배를 통한 갈등의 해소가 목적이다.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의견과 이해관계가 투표를 통해 드러나고, 투표함으로 모인 민의는 의회를 구성하여 대의민주주의를 작동케 한다. 그러나 대의제를 통한 민의 구현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때로는 특정한 계층이나 직업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이의 목소리가 제대로 의사당에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 하여 민주주의 국가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한다. 백남기씨가 물대포를 맞은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본래라면 보장받았어야 할 집회와 시위가 오히려 위헌적 차벽, 규정을 위반한 직사 물대포에 의해 탄압받은 셈이다.

공권력은 유일무이한 합법적 폭력이다. 우리가 국가라는 공동체와 계약하면서 맡긴 권리 중에는 이 폭력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아무리 정당한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다 신중하게 가능한 최소한으로 이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 국가와 개인이 모두 규정을 어겼을 때, 국가와 정치가 더 큰 책임을 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이미 근대로 넘어오면서 폐기된 낡은 원칙이다.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선진국가에서도, 불법 행위를 저지른 이들을 향한 진압이나 총기 사용 등을 구체적으로 규제하고 있으며 이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처벌받는다.

뜨거운 물건에는 안전장치가 필요하고, 주의 혹은 경고 표시가 명확하게 붙어 있어야 한다. 동물원 사파리에는 아이들과 맹수가 절대 접촉할 수 없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하며, 사육사는 규정을 정확하게 이행해야 한다. 불법시위를 하다가 폴리스라인을 넘어오지 말라는 경찰의 말을 무시했다고 하여, 경찰이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물대포를 직사하여 살인을 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거기에 지금 부검을 하겠다고 나서는 그 속셈이 너무 뻔하다. 이미 우리는 부검과 관련한 경찰의 '나쁜 전례'들을 알고 있다. 진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부검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진실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검을 반대하는 것이다.

누가 대체 무엇을 팔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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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 당시 경찰이 직사한 물대포에 맞고 의식불명에 빠졌던 농민 백남기(70)씨가 사고 317일만인 지난 25일 숨을 거둔 가운데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조문이 이어지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전태일의 분신, 미선이·효순이의 죽음 이후 일어난 물결이 과연 시체팔이였을까. 누가 대체 무엇을 팔았는가. 우리는 전태일의 목숨값으로 노동삼권을 쟁취했고, 미선이와 효순이의 목숨값으로 SOFA 개정을 이끌었다.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제2의 전태일이나 제2의 미선이·효순이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가는 아직 그 목숨값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삼성전자에서, 쌍용차에서 우리는 전태일 이후로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고민한다. 전시작전권이나 주한미군의 문제를 보면 미선이나 효순이와 같은 사례가 또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는 한다. 장삿속으로 이들의 시체 값을 흥정한 건 국가다.

세월호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죽었다. 그중 상당수가 아이들이었다. 국가가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똑같은 비극이 또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 진실을 원하는 거다. 백남기씨도 마찬가지이다. 진짜 시체팔이를 하는 건 정부의 책임을 묻는 이들이 아니다. 국가가 응당 헌법에 명시한 의무를 이행하라고 요구하는 국민이 아니다. 이를 사상과 이념의 대결로 몰고 가는 정치, 이런 수준 낮은 글을 하나의 정당한 의견인 척 가장하는 언론, 그리고 이 뒤에 숨어서 자신의 안위만 살피는 권력자. 이들이 진짜 시체팔이하는 장사치들이다.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는 학도라면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의식을 느껴야 한다.

대학교가 진리의 상아탑이 아니라 장사치들의 소굴로 전락하니, 더 이상 대학생은 행동하는 지성이 아니라 자신의 이문만 셈하는 꾼들이 되었다.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있는 정은이씨가 그런 글을 쓴 게 분명 그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마구간 속 난쟁이들은 원래부터 악하거나 어리석진 않았다. 영광의 시대에는 정말 멋진 난쟁이들이 나니아의 건국과 통치, 해방전쟁에 함께했다. 하지만 거짓 아슬란이 진짜 흉내를 내고, 늙은 원숭이가 잘못된 정치를 하며 나니아를 망쳐버렸다. 국가와 제도가 국민을 탄압하자 난쟁이들도 인간성을 상실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모든 난쟁이가 타락한 건 아니었다. 아슬란과 함께 향한 그 신세계에는 다른 난쟁이들이 있었다. 성신여대에도 학교 측과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하며 타락하지 않은 그 난쟁이들의 싸움을 응원한다.

그리고 인간성을 상실한 세상의 수많은 정은이씨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당신의 탓은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국가가 무섭고 밉다.
#정은이 #성신여대 #백남기 #뉴데일리 #나니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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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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