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경찰 노덕술에 있고, 의열단장 약산엔 없는 것

[주장] 대한민국 정부, 약산 김원봉에 독립유공 서훈 거부하는 건 잘못이다

등록 2016.09.28 21:57수정 2016.09.28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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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약산 김원봉을 연기한 조승우(왼쪽), 이병헌(오른쪽). ⓒ 케이퍼필름 / 영화사 그림


2015년 7월 22일 개봉해 유료 관객 1270만 명을 동원한 영화 <암살>, 그리고 올해 9월 7일 개봉해 관객 700만 명을 동원한 영화 <밀정>은 각각 다른 작품이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과연 이 두 영화에서 다뤄지고 있는 중요한 극중 인물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두 영화를 본 분이라면 그 답을 쉽게 찾을 것입니다. 바로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입니다.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 의열단 단장과 광복군 부사령관 등으로 무장 항일투쟁을 이끈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입니다.

약산 김원봉은 1919년 3·1운동 후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윤세주 등 12명의 동지들과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합니다. 이후 약산은 조국을 침탈한 일제와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암살하는 의거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하는 데 자신의 일생을 바칩니다. 그것이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그려진 그의 행적입니다.

백범보다 더 많은 현상금이 내 걸렸던 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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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 중 한 장면. ⓒ 케이퍼필름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처럼 약산의 대일 항쟁은 치밀했으며 단호했습니다. 특히 약산이 이끌었던 의열단은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 일곱', 이른바 '7가살'과 '5곳의 파괴 대상'을 정해 이를 상대로 두려움 없이 싸워 나갔습니다.

그러한 '7가살'은 첫째가 조선 총독부 고관, 두 번째가 군부의 수뇌, 세 번째가 대만 총독, 네 번째가 친일 매국노, 다섯 번째가 친일파 거두, 여섯 번째가 왜적의 밀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민족적 토호·열신, 이른바 '악덕 지방 유지'였습니다.

이어 '반드시 파괴해야 할 대상 5곳'으로는 첫째가 조선 총독부, 두 번째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세 번째가 친일 언론사였던 매일신보사, 그리고 네 번째가 각급 경찰서, 끝으로 다섯 번째는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7가살과 5개의 파괴 대상을 정해 놓고 의열단의 암살과 폭탄테러가 이어지자 일제는 단장인 약산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됐습니다. 하지만 약산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던 일제는 약산의 제거를 위해 그야말로 놀라운 액수의 현상금을 내걸게 됩니다.

많은 분들은 우리나라의 최고 독립운동가로 백범 김구 선생님을 쉽게 떠올립니다. 하지만 일제가 내건 현상금 액수에서는 약산이 최고였습니다. 일제가 백범 선생님에게 내건 현상금은 당시 돈으로 60만 원. 10만 원을 지금 돈으로 환산해 보면 약 32억 원인데, 계산을 해보면 192억 원이 백범 선생님에 걸린 현상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제가 약산에게 매긴 현상금은 얼마였을까요? 일금 100만 원, 그러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무려 320억 원에 달했습니다. 일제가 얼마나 약산을 두려워 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왜 약산은 독립운동 서훈을 받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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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한 약산 김원봉(1898~1958). 그는 일찍이 의열단을 조직하여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투쟁을 전개해 왔다. ⓒ wiki commons


그럼 여기에서 두 번째 질문을 던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약산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로서 훈장을 받았을까요, 아닐까요?

바보 같은 질문이기에 누구나 답을 유추해 보셨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놀랍게도 약산은 이러한 독립운동 공적에도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로 훈장 서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약산은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 공적으로 그 어떤 예우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의열단 단장인 약산은 영화 <암살>과 <밀정>이 나오기 전에 거의 알려지지 못한 인물입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편입해 부사령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 분이 왜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을까요?

바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의 주도로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빚어진 비극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비극은, 이후 미국에 의한 미군정 체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조선의 점령군으로 이 땅에 들어온 미군정청장 하지는 곧바로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공직자로 재등용하게 됩니다.

하지가 친일반민족 세력을 등용하려 하자 주위에서 이를 반대하는 일부 양심적 목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당시 하지가 했다는 발언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제의 이익을 위해 조국을 배신했던 자들이 다시 미국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과거 일제하에서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친일세력들은 다시 해방된 조국에서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한 이들에게 사상범 죄목을 씌워 다시 체포해 고문하고 투옥시키는 등 참혹한 일을 벌였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이 참혹한 일은 불행하게도 약산 역시 비껴가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친일 반민족행위자였던 노덕술에 의한 치욕이었습니다. 1947년 4월, 약산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중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경찰서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이후 3일간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합니다.

노덕술은 친일경찰로 일할 당시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고문 기술의 70%를 완성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노덕술 역시 의열단의 암살 대상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 노덕술에게 일제하도 아닌 해방된 조국에서 약산이 고문을 당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까요?

다행히 약산은 이 사건 당시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노덕술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고 경찰서를 나왔지만 이후 사흘 밤낮을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내가 일제하에서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저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이런 수모를 당한 일에 대해 억울하다"라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약산 김원봉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바로 광복 후 좌우합작운동을 하던 몽양 여운형 선생의 암살 사건이 그것입니다.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에 암살당했습니다.

약산은 이 사건을 접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 역시 암살당할 것'이라는 위협이 점점 약산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1948년 4월, 약산은 백범 선생님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그대로 북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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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민족주의 민주전선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약산 김원봉 ⓒ Public domain

한편, 그렇게 북에 남은 약산은 이후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내각노동상 등 고위직을 지낸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러한 행적을 이유로 약산에게 독립운동가 훈장 서훈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즉,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 데 약산이 기여했다며 그 어떤 예우와 공적에 대한 평가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산의 비극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후 약산의 가족이 당한 사례는 더욱 참담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약산의 가족들은 학살 피해자가 됩니다. 약산의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버지 역시 유폐돼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다음은 약산 당사자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북한 정권에 의해 약산이 숙청당했습니다. 죄목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의 정책을 반대했다는 점 그리고 북한 정치체제를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으로 하자는 구상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1958년, 약산은 이른바 '국제 간첩 혐의'로 끝내 숙청됩니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사형 당하기 전, 스스로 자살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떠돕니다. 약산의 비극적인 죽음,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덕술에게는 주고 약산은 주지 않은 대한민국 '훈장'... 부끄럽다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분명하고도 선연한 공적을 남긴 약산이 이처럼 남과 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약산이 북으로 간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북한 권력을 추종해서가 아니라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의 탄압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약산의 공적을 평가하지 않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요?

그렇기에 그저 영화에서나 머물러 있는 약산의 공적은 이제 제대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약산의 공적을 인정받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약산의 혈육인 막내 여동생이 그동안 국가보훈처에 오빠의 독립운동 공적을 토대로 서훈 신청을 했는데, 월북을 이유로 내내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일까요.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친일 경찰' 노덕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는 기술 70%를 만들었다는 노덕술은 과연 대한민국에서 훈장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만약 받았다면 그 훈장은 몇 개일까요?

① 1개 ② 2개 ③ 3개

답은 3개입니다.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며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국이 해방된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도 충무무공훈장 등 3개의 훈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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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경찰 노덕술에겐 세 차례의 대한민국 정부 훈장이 수여됐다. ⓒ 뉴스타파 갈무리


이를 우리가 비판한다면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뭐라고 할까요? '비록 노덕술에게 친일 행적은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노덕술에게 훈장을 줄 공적 역시 확인되었기에 수여한 것'이라고 답할 듯합니다. 이런 논리라면 약산에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훈장을 주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친일 경찰, 악질 민족 반역자인 노덕술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훈장을 받고, 반면 친일파를 척살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님이 훈장을 받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히려 약산에게 훈장을 수여하지 않은 대한민국 정부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다행히 이 문제에 대해 유력한 야권 대통령 후보 중 한 분인 문재인 전 대표가 밝힌 입장이 있습니다. 영화 <암살>로 약산에 대해 대중적 관심이 높아진 2015년 8월께, 문 전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남북 간의 체제 경쟁이 끝났으니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더 여유를 가져도 좋지 않을까? 일제시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대로 평가하고, 해방 후의 사회주의 활동은 별도로 평가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광복 70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 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약산 김원봉, 그리고 해방된 조국에서 두 정치 세력으로부터 모두 거부당한 약산 김원봉. 저 역시 문 전 대표와 다르지 않은 마음입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님에게 대한민국이 예우를 갖춰 주길 요구합니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노덕술은 받고, 약산 김원봉 선생님은 받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 서훈. 이제 이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만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또다시 외세의 침략을 당했을 때 누가 또다시 약산 김원봉처럼, 안중근처럼, 유관순처럼 싸우겠습니까.

의열단장 약산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찾아주신 이 조국을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함께할 것입니다.
#약산 #김원봉 #노덕술 #대한민국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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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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