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잠수함 정보 한국에 알려주고 감옥살이, 로버트 김 내한

[인터뷰] '스파이 사건' 주인공 김채곤씨, 한국서 출판기념회

등록 2016.09.29 14:03수정 2016.09.2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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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기년회장에서 미국 펜실베니아 감옥 수감생활의 일화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로버트 김 ⓒ 오병종


"로버트 김 친구! 우리 조국통일을 보고 죽자"

28일 오후 4시 '로버트 김의 편지' 출판 기념회가 여수시 문수동 성결교회에서 있었다. 축사에 나선 로버트 김의 유일한 초·중·고 동창생인 김광현 전 여수시장은 마지막에 "우리, 반드시 조국 통일이 되는 것을 보고 죽자"며 남북 분단의 희생자인 저자를 격려했다.  

저자는 기자와 인터뷰에서도 '로버트 김 스파이 사건'은 한미관계의 문제라기보다는 '남북관계의 부산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수출신 재미동포인 로버트김(한국명, 김채곤. 76세)은 미해군정보국에서 정보분석관으로 근무하던 중 한국에 북한 관련 몇 가지 기밀문서를 넘겨준 혐의로 구속돼 7년 넘게 실형을 살았다. 복역 후에는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8년간 매주 이메일 편지를 보내왔다. 그 중에 엄선해서 이번에 '로버트 김의 편지'를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번 출판기념회는 지난 21일 서울에 이어 두 번째다.

로버트 김의 지인들과 동생인 김성곤 전 국회의원 등 시민 200여명이 참석해 책 출간을 축하해 주었다. 기념식에서 로버트 김은 고향 분들에게 수감생활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는 이태리 출신 마피아 두목과도 한 방에 생활했고, 치과 기공소 일과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던 일화도 들려줬다.

교도소에서 영어교사 자격증 받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자신에 대한 신상을 파악한 교도소측에서 엘리트 출신인 그에게 동양인과 남미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보라는 제의를 해 5년간이나 그곳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그 덕에 소재지인 펜실베니아로부터 영어교사 자격증도 받았다고 밝혔다. 

로버트 김의 영상을 보는 순서에서 몇몇 하객들은 억울한 옥살이의 힘든 상황을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김성곤 전 의원도 축하인사말에서 부친 김상영옹을 언급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김상영 옹은 큰 아들인 김채곤이 보호관찰 대상자 신분이어서 한국에 올 수 없어 만나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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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출신 재미동포 로버트 김(왼쪽·76·한국명 김채곤)씨와 부인 장명희씨가 지난 9일 책출간에 맞춰 한국을 방문했다. ⓒ 로버트 김 후원회


이번 방문을 마치고 로버트 김은 10월 16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고향을 찾은 로버트 김과 인터뷰에서 이번에 펴낸 책과 이른바 '로버트 김 스파이 사건'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좀더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는 이국땅에서 보고 느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가감없는 의견을 말해 주었다.

- 이번 귀국은 주목적이 책 출판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지난 8년간 매주 <로버트 김의 편지>라는 글을 한국에 있는 저의 사이트에 연재했는데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편지가 그냥 없어지는 글이 되기보다는 책으로 기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번에 출간하게 된 것입니다."

조국에 조언하려다 보니 '쓴소리'가 대부분

- 책 내용이 궁금합니다. 또 메일을 쓰게 된 동기와 책으로 펴내게 된 사정들도 듣고 싶습니다.
"책 내용은 다양한 장르였습니다. 동기는 저의 후원 회장이셨던 이웅진 대표가 출소 후 저의 무료를 달랠 겸 글을 써보라고 하면서 그분 회사의 컴퓨터와 직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한국의 신문, TV를 보고 한국을 더 알게 되었는데 모국인 한국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선진국이 되기에 부적절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국민들에게 조언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글을 계속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쓴소리'가 대부분입니다. 그 동안 쓴 회수가 425회였는데 이 중 80여편을 골라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년에 출간하려고 하다 기왕이면 로버트 김 사건이 일어난 20주년을 기해서 하려고 후원자를 물색했는데 금년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님이 저의 소식을 듣고 기꺼히 후원하시겠다고 해서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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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후 8년간 400편 넘게 지인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내용중에서 골라 엮은 '로버트 김의 편지' ⓒ 오병종


- 서울에서 21일 출판기념회 잘 끝났죠? 특별한 분들이 왔었나요?
"서울에서 지난 주(9/21)에 열렸는데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저의 학교 동기들 그리고 저의 지인들, 동생인 김성곤 전 의원의 학교동기들과 정치지인들께서 참석해 주셨습니다. 책을 그분들에게도 드렸는데 200권 넘게 배부되었습니다. 물론 백동일 전 대령님께서도 참석하셨는데 저와 그분간의 교감이 남 달랐습니다.

정보 전달죄... 교도소 생활 7년 10개월, 보호관찰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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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기념식장에서 축하객을 맞는 로버트 김 ⓒ 오병종


- 백 대령은 이른바 '스파이 사건'의 해당자죠? 백 대령 얘길 하면 자연스럽게 사건얘기가 나오겠는데요, 백 대령 얘길 좀 해주시겠어요?
"네, 백대령은 로버트 김의 사건(1996년)이 있기 전까지 주미대사관의 해군 무관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 때 한국에서 오신 해군 정보작전사령관 일행이 저가 일하는 곳으로 '한미 해군 정보교환 연례행사'를 하기 위해서 오시게 되었는데 그 때 처음 백 대령을 만났습니다.

그 때 저는 이 행사를 도와달라는 저의 상관의 부탁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요, 그 때 제가 알고 있는 '북한에 관한 이러저러한 정보를 알고 있느냐' 하고 일행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이 알아야 할 정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한, 그리고 특급비밀이 아닌 것을 저의 컴퓨터에서 골라 우편으로 백 대령에게 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미국의 '국방기밀 누설죄'가 되었던 것입니다.(당시 그는  미국 해군정보국(ONI)에서 정보분석가로 근무중이었다. - 기자 주)

그리하여 저는 1996년 9월 24일에 체포되어 바로 구치소에 갇힌 후 1년 후, 유죄판결을 받고 9년 수감형과 3년의 보호관찰형을 선고받고 교도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도소 생활을 아무 사고 없이 했다고 15%를 감형받아 7년 10개월의 교도소 생활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3년의 '보호관찰'이라는 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도소 생활을 하며 미국사법책을 가까이 하면서 보호관찰기간을 줄일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변호사 없이 이를 준비했습니다. 보호관찰 1년을 살고 난 후 바로 보호관찰 단축 상소를 했는데, 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여 보호관찰기간을 1년으로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형을 사는 동안 유일한 승리였습니다."

- 긴 세월 감옥에서. 또 보호관찰까지... 미국서 살면서 미국인들이 당시 사건에 대해 물으면, 선생님은 어떻게 답해 주나요?
"미국의 저의 이웃들도 제가 이렇게 놀라운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살던 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시켜서 한 일 아닌 자발적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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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기념식 축하 떡 짜르기 ⓒ 오병종


- 실형 이후 미국사회에서 생활이 어려웠으리라고 봅니다. 특히 연금도 감액되고, 조국을 위하려다 그렇게 희생했다는 점에서 한국 사람으로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제 연금이 완전히 박탈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명예퇴직을 했었다면 매우 풍족한 미래가 보장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저와 같은 시기에 일하던 사람들이 지금 퇴직을 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그동안 저희들은 그저 숨만 쉬고 산 셈입니다. 제가 받는 연금으로는 고국방문도 어렵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저 때문에 미안해 할 것은 없습니다. 당시의 일은 국가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제가 자발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미간의 희생양이 아니고, 남·북한의 희생양입니다. 우리나라가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한반도 분단의 부산물입니다."

8명 손주의 할아버지, 이제 건강하게 사람답게 살고파

- 안타깝습니다. 한 개인의 인생까지, 남북분단이 깊숙이 관여한 셈이 되었군요. 미국에서 요사이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제가 따로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 걷는 운동을 하고 매주 교회에 나가 좋은 말씀을 듣고 위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텃밭도 가꾸고 정원 가꾸기와 집수리 등 바쁘게 지냅니다. 저는 1남2녀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막내가 42살입니다. 이 세 아이들로부터 8명의 손주를 본 행복한 아버지이면서 할아버지입니다."

- 앞으로 계획을 물어봐도 될까요?
"제 계획은 건강하게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미국에서 나고 자랐고 미국에서 가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저와 집사람도 노후에 아이들과 함께 살지는 못해도 가까운 미국 내에서 사는 것이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물가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저희는 한국으로 귀화를 꿈도 못 꿉니다."

우리 사회 '배려'없고,'이기주의'가 너무 만연

- 그렇군요. 고향 여수 얘기를 해볼까요? 자주 오고 가시는데 고향 여수에 오시면 달라진 점이나 특별히 느낀 점이 있으신가요 ?
"여수는 작년에도 다녀 갔습니다. 달라진 점은 여수가 겉으로는 많이 발전한 것 같으나 내면적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이 옵니다. 남을 위한 배려가 보이지 않고 자기만 아는, 즉 '이기주의'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꼭 여수만의 문제가 아니고 대한민국 문제이기도 합니다. 선진국 진입이 요원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노파심이 이번에 출간된 책 <로버트 김의 편지>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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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장명희 여사와 저자, 오른쪽은 동생 전 국회의원 김성곤 ⓒ 오병종


- 걱정입니다. 겉으로 발전했으나, "내면적으론 후퇴다"는 말이 와 닿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향분들께 인사 한마디 해주십시오.
"여수는 저희 선조들이 가정을 이룬 지역입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여수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상영 옹은 8대 9대 국회의원으로 일하시면서 1960년대 70년대에 여수에 여천산업단지, 비행장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저의 동생이 16년 동안 여수의 국회의원으로 일 하면서 엑스포가 여수에서 열렸고 그때 KTX가 들어오면서 여수 시민들이 서울을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생활환경의 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선공후사'의 철학 때문에 이런 것을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일했습니다. 이러한 가족력이 있는 저 로버트 김은 국가를 위해 했던 일로 여러 해 동안 수모를 당했어도 국가를 원망하지 않고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저의 가족들은 진심으로 여수를 사랑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이러한 여수를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고 사랑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에도 게재합니다.
#로버트 김 #로버트 김의 편지 #김채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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