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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선생, 성룡... 나를 키운 건 8할이 홍콩영화

[홍콩영화가 살고 있었다네 프롤로그]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의 소용돌이에서

16.10.14 10:21최종업데이트16.10.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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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 접어들며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동이 터오는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는 신체적 변화부터 어지간한 일에는 쉽게 흥분하지 않는 정신적 변화까지. 제2의 사춘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한 가지는 바로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소나기 맞은 중마냥 그땐 그랬지, 라고 중얼거리는 사내의 모습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3S(sports, sex, screen) 정책에 가장 잘 놀아난 세대가 우리 또래이지 싶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1982년에 프로야구가 창단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프로 축구가 창단되었다. OB 베어스가 서울로 연고를 옮기고, 1986년에 설립된 빙그레 이글스는 홍보 차원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어린이 회원을 모집했다. 그때 5천원을 내고 가입해서 받은 주황색 잠바는 전교생의 교복과도 같았다.

전두환 정권의 3S, 난 스크린에 꽂혔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처럼 조숙한 '국민학생'의 정치적 관심을 외부로 돌려놓는데 성공한 것은 다름 아닌 영화(screen)였다. 요즘 표현대로라면 초딩의 입맛에 맞는 영화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홍콩영화였다. 강시 잡는 '영환도사'는 아이들에게 신적 존재였고, 나쁜 어른들을 물리치는 '호소자'는 또래의 영웅이었다.

영화 <강시선생3>(1987) 포스터 ⓒ (주) 케이알씨지


1980, 1990년대 최대 번영기를 맞이한 홍콩영화는 홍콩의 중국 반환시점과 맞물려 쇠퇴의 길을 걷는다. 지나친 자기 복제와 간판급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 거대 중국 자본의 영화사 매각 등 다양한 요인들이 홍콩영화를 몰락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가슴속에서는 아직까지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그 부활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국민학교 시절, 홍콩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는 것은 생일이나 우수한 시험 성적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될까한 기회와는 대조적으로 홍콩영화는 1년에 200여 편 가량이 제작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관람은 부모님이 일하러 가신 친구 집이나 만화방 구석에 딸린 작은 골방에서 음성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에 200~300원(최신작은 500원이었다)이면, 곰팡내 나는 음습한 골방에서 약간은 선정적이며 다소 폭력적이지만 호환마마보다 무섭지는 않았던 영화들도 상영이 가능했다. 어쩌다 중학교 다니는 형들의 불심검문(?)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일주일간 열심히 모은 돈으로 멋들어진 홍콩영화 한편을 볼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좀 더 시간과 공간이 자유로워졌다. 어지간한 영화는 극장에서 관람이 가능했고, 공부를 핑계로 친구네 집에서 라면 먹어가며 하루 종일 비디오를 쌓아놓고 볼 수 있었다. 한편 찍는데 총알을 백만 발 쯤 사용했을 법한 피 튀기는 홍콩영화의 대부분은 그렇게 학습시간을 대체한 결과로 섭렵했다.

세 편짜리 동시상영관에서 보던 홍콩영화

현재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지정좌석제는 94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한참 후에나 발생한 일종의 사태다. 그 전까지는 맘에 드는 영화는 좌석을 옮겨가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볼 수 있었다. 동네 허름한 극장에서는 동시상영을 세편까지 몰아주기도 했었다. 명절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귀한 손님, 바로 '성룡'의 영화는 좌석이 늘 부족했기에, 첫 관람은 통로에 마련된 목욕탕 의자에 앉아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두 번째는 편한 의자에서, 재미있으면 세 번째 관람까지, 하루 종일 극장에 있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성룡과 알란탐 주연의 영화 <용형호제>(1986) 포스터 ⓒ 조이앤클래식


그 때 그런 영화를 상영하던 극장들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다. 아카데미, 피카디리 같은 어느 도시에나 존재하는 이름의 극장부터 연흥, 동보, 인동 극장처럼 동네에만 존재하던 이름의 소형 극장까지 모두들 멀티플렉스라는 거대한 해일에 휩쓸려 사려졌다. 매점 앞에 구비된 휴대용 버너에 오징어를 직접 구워가지고 들어가던 그때의 추억들도 함께 파묻혀진 것은 일면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게 홍콩영화와 함께 10대를 보낸 세대들에게 홍콩영화는 단순한 과거의 추억, 그 이상이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홍콩영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홍콩영화는 친구이자 스승이었고, 때론 연인이었다.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홍콩영화에서 배웠다 해도 지나침이 없는 40대의 중년이 이제 그 영화들을 다시보기 시작한다.

평론가들처럼 영화를 해체해서 분석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실 그럴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저 영화 한편마다 녹아있는 그 때 그 시절의 기억들을 돌이켜보며 지금의 나를 이룬 삶의 조각들을 재조합 해보려는 시도다. 아리도록 푸르렀던 10대의 내 곁을 지켜준 홍콩영화를 경의와 애정을 가지고 되돌아보려는 것이다.

열편의 홍콩영화와 함께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골든 하베스트 사의 로고가 쿵쾅거리며 스크린에 박힐 때, 함께 심장이 뛰었던 이가 있다면 언제든 넉넉한 옆자리를 내어주고 싶다. 그대와 동시대를 살아오며 홍콩영화를 함께 봤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이미 끈끈한 유대감이 흐를 테니까. 자, 이제 홍콩영화가 살고 있던 그 시절로 출발해보자.

홍콩영화 피카디리 골든 하베스트 성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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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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