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안실 벽 뚫고 시신 탈취... 지금 경찰, 그때와 닮았다

과거 시신 압수에 공들인 경찰... 부검, 박종철 때는 진상규명 계기 되기도

등록 2016.09.29 20:44수정 2016.09.29 21:28
21
원고료로 응원
a

1987년 7월 5일 발부한 이한열 열사 시신 압수수색 영장. 경찰은 이 영장을 집행해 이 열사의 시신을 확보하려 했지만 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다. ⓒ 이한열기념사업회


1987년 7월 5일 새벽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들이닥친 경찰이 '압수·수색 검증영장'을 내밀었다. 자신들이 쏜 최루탄을 맞고 한 달간 사경을 헤맸던 대학생의 죽음이 확인되자 곧바로 영장 집행에 들어간 경찰이 압수하려 했던 '물건'은 단 하나였다.

"압수할 물건: 이한열의 사체 1구"

사인이 너무나도 명백했던 사안이었다. 병원 의사들까지 나서 영장 집행을 막아섰다. 격렬한 저항에 경찰의 영장 집행은 무산됐다. 이후 협의를 거쳐 가족과 학생 대표가 입회한 가운데 실시한 부검에서 이한열의 죽음은 경찰의 최루탄에 의한 것이란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 확인됐다.

대학생 이한열의 죽음은 농민 백남기씨의 죽음과 비슷한 면이 많다. 두 사람은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머리에 크게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숨졌다. 경찰은 30년 전 모습처럼 부검을 하려하고 있다.   

백씨의 유족을 비롯한 '백남기농민국가폭력진상규명책임자 및 살인정권규탄투쟁본부'가 부검을 거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인이 명백한 상황에서 부검을 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심은 과거 경찰이 보여준 사례와도 관련 있다.

영안실 벽 뚫고 시신 탈취해 부검한 경찰

1991년 성균관대 여학생이던 김귀정이 시위 중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사건을 두고 경찰은 수차례에 걸쳐 시신 탈취를 시도했다. 계속되는 반대 끝에 결국 부검을 실시하기로 합의했지만 내놓은 수사 결과는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하여 김양이 사망하였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가 같은 해 5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숨졌을 때 가족과 동료들은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고인이 잠든 병원에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농성이 벌어지자 부검 영장을 발부받은 경찰은 영안실 벽에 구멍을 내고 들어와 박 씨의 시신을 탈취했다.

경찰은 이후 부검 결과를 바탕으로 그의 사망 원인을 수감생활 등을 비관한 투신자살이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아직 그의 죽음에 대한 공식 발표는 바뀌지 않고 있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군 병원에는 장기보관 시신 16구 중 상당수가 유가족이 부검에 반대하거나, 부검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아 길게는 10년 넘게 보관되고 있다.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2009년 경찰은 '용산 참사'에서 숨진 철거민들을 사고 당일 부검했다. 유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실시한 부검이었다. 부검 결과는 화재로 인한 사망이었다. 두개골 훼손 흔적과 사라진 치아 등 폭력을 의심할 만한 정황들이 있었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강경대 열사 유족-검사 합의로 부검 안 해

a

백남기 농민 시신 지키는 시민들 경찰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부검 영장이 발부된 가운데 28일 오후 고인의 시신이 안치된 혜화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안치실앞에 시민, 학생들이 모여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 권우성


물론 부검이 사인 은폐시도를 막고 진상규명을 해낸 적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게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1987년 1월 대학생이었던 박씨가 사망하자 경찰은 "탁자를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쇼크사'라는 설명이었다. 

경찰은 부검 없이 시신을 화장하려 했지만 검찰에 가로막혔다. 검찰은 경찰의 입김이 작용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아닌 한양대병원에서 박씨의 삼촌을 입회시킨 가운데 부검을 실행했고, 사망 원인은 물고문으로 드러났다. 이후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역사를 바꾼 이 부검은 87년 6월 항쟁을 촉발했다. 

올해 중국에서는 '중국판 박종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양 사건이 대륙을 달궜다. 공안 조사 도중 급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죽었다는 젊은 환경운동가 레이양을 부검한 결과 물고문의 흔적이 발견됐다. 들끓는 여론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까지 나서 공안의 수사 관행을 질타했다.

1991년 명지대 1학년 강경대씨가 경찰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사건에서는 부검 없이도 사인을 밝혔다. 당시에도 경찰은 부검을 하려 들었지만 "부검 의도가 진상을 밝히기보다 은폐하려는 데 있다"는 반발해 직면했다. 결국 강씨는 유가족 등의 동의를 얻어 검안과 CT 검사 등을 실시했고, 타살로 결론이 났다.  

이번에 백씨의 부검 영장을 발부한 법원은 과거의 사례를 의식한 듯 객관성을 강화하는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유족이 지정하는 의료진과 변호사가 부검에 입회하고 이를 영상을 촬영하며 정보를 유가족에게 충분히 제공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부검에 대한 유족의 반대 입장은 확고하다. 유족은 "경찰의 손에 돌아가신 고인의 시신에 다시 경찰의 손을 절대 닿게 할 수 없다"며 "부검은 사인이 명확한 만큼 필요하지도 않고 동의할 수도 없다"는 뜻을 유지하고 있다.
#백남기 #부검
댓글2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4. 4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