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값싼 뉴스를 만드는 이유

[서평] '재미없는' 한국 기사에 대한 일침, 안수찬 기자의 <뉴스가 지겨운 기자>

등록 2016.10.16 11:28수정 2016.10.16 11:28
1
원고료로 응원
'삼겹살부터 한우꽃등심까지 제대로 구워 제 타이밍에 잘라주지 않으면 큰일이다. 한쪽 면이 익어 핏물이 나올 때쯤 뒤집어 잘라줘야 한 번에 잘린다. (...) 한우꽃등심은 1인분에 3만 5천원이다. 내 시급이 4487원꼴이니, 한우꽃등심 1인분을 사먹으려면 8시간 이상을 일해야 한다. 하다못해 5천원짜리 '점심 특선'도 내 시급보다 비싸다. 그러니 '비싼 음식님'에게 잘해야 한다.'

누군가의 일기라 생각하셨나요? 수필이나 소설의 일부라 생각하셨나요? 아닙니다. 기사입니다. <한겨레21>의 임지선 기자가 한 달간 식당 서빙을 체험하면서 쓴 '내 이름은 아줌마, 혹은 파블로프의 개'의 일부입니다.


이 기사를 다 읽으려면 족히 10분은 걸립니다.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다음 문단이 궁금해 계속 읽다가 결국 끝까지 읽게 됩니다. 글빨 좋은 소설 읽듯 말입니다.

회사원 같은 기자, 붕어빵 같은 기사

"기성 언론의 문제점은 뉴스를 접한 후에도 누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 김형조


다른 기사도 이렇듯 술술 읽힌다면 좋을 텐데 그런 기사를 찾긴 쉽지 않습니다. 딱딱한 문체에, 다 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특히 따옴표로 정치인의 말을 줄줄이 늘어놓는 정치기사, 수치와 통계로만 죽 이어가는 경제기사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분명 머리 좋고 글 잘 써서 합격한 사람들일 텐데 왜 기자가 쓴 기사는 재미가 없을까요? 안수찬 기자는 <뉴스가 지겨운 기자>에서 그 이유를 말합니다. 일단 시간이 없다고.

"기자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취재원을 최소한 만나 그럴듯한 기사를 내서 마감할 수 있을까에 머문다."

안수찬 기자는 이를 '패스트푸드 저널리즘'이라 말합니다. 기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습니다. 아침에 출근해 뉴스거리를 보고하고 3~4시간 동안 취재를 합니다. 대부분 오후 4시에 기사를 마감하기에 남는 2~3시간 내에 기사를 써야 합니다.


시간 안에 기사를 완성하기 위해 어떻게 할까요? 이 책에 따르면, 우선 출입처 보도자료에서 뉴스를 찾게 됩니다. 기자가 직접 뉴스거리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경찰, 검찰, 법원이 내주는 자료에서 뉴스를 찾는 겁니다. 이래서는 우리 삶과 밀접한 기사가 나오기 힘듭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니 독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객관보도라는 신화 혹은 오해

<뉴스가 지겨운 기자> 내러티브 기사는 영미언론에선 보편적이다. 뉴스를 가리킬 때도 'Story'란 단어를 쓴다. ⓒ 삼인

문제는 부족한 시간이 기사를 재미없게 할 뿐 아니라, 언론의 제 역할도 못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얼마 없는 재료로 그럴듯한 기사를 만들려다 보니 파편적 기사가 나옵니다. 사건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기사를 내는 탓입니다. 그런 기사를 읽는 독자는 도무지 감이 안 옵니다. 누구에게 잘잘못을 따지며 목소리를 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안수찬 기자는 이를 보며 "사태의 총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가 단편적 특종을 보고 과연 분노하겠는가"라며 "지면과 방송의 사건 기사는 어지럽고 복잡하다. 퍼즐 조각을 뿌려놓고 독자가 알아서 짜맞추길 기대하는 모양새"라고 비판합니다.

이런 기사를 만드는 데는 객관보도에 대한 강박도 한몫 합니다. 양쪽의 입장을 골고루 써주되, 문체는 되도록 딱딱하게 씁니다. 기자의 생각이나 감정이 하나도 안 실린 것처럼 말이죠. 남의 집에 초대받은 손님(객, 客)이 그 집 남편과 부인이 싸운다 해서 잘잘못을 가릴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기계적 균형이 곧 객관보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객관보도는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를 곧이곧대로 전하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이 진짜인지 그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전하는 거죠. 그래서 모든 객관보도는 심층보도입니다. 진실을 추적해야 하니까요. 객관성이라는 영단어(Objectivity) 역시 사물(Object)의 본질을 파헤치라고 말합니다.

사실로만 이루어진 소설, 내러티브

"언론이 삶을 말할 때 언론은 문학에 가깝다. 소설은 대중과 호흡하려는 기자의 강력한 무기다." ⓒ 픽사베이


하지만 심층보도를 하면 기사가 길어지기 마련입니다. A4 반 쪽짜리 기사도 지루한데 그게 몇 장으로 늘어난다면 읽힐까요? 그래서 안수찬 기자는 긴 기사도 쉽고 재밌게 읽힐 수 있도록 대안을 내놓습니다. 바로 내러티브입니다.

"내러티브는 혁명 자체가 아니라 혁명에 휩쓸리는 사람을 다룬다. 개인의 삶이 사회와 연결되는 고리를 찾아 전달한다. 명쾌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해도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독자는 삶의 한 대목을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러티브 기사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로만 이루어진 이야기를 다룹니다. 단순히 재밌는 이야기만 다루진 않습니다. 개인의 일상과 인생을 말하되, 시대의 모순을 찌를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를 전하는 과정에서 더 쉽게,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도록 문학적 글쓰기를 활용합니다. 앞선 <한겨레21>의 기사가 한 예입니다. 소설처럼 풍경을 묘사하기도 하며 등장인물끼리 대화가 오갑니다. 때론 반전을 주기도 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대신해주고 통찰을 주는 데다 글맛까지 좋다니. 언론에서 이런 기사를 안 쓸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내러티브 기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내러티브에 '투자'하기 어려운 이유

조회 수는 곧 돈이다. 멀쩡한 언론사도 어뷰징 기사를 쓰는 이유다. ⓒ 네이버


물론 어떻게 기사를 써야 하느냐에 대해 기자마다 생각이 다른 것도 있습니다. 내러티브 기사는 서구에선 보편적이지만 한국에선 비주류입니다. 지금의 기사 형태가 낫다고 보는 시각도 많습니다. 바쁜 독자를 위해 핵심 정보만 간결하게 쓰고, 기사 신뢰도와 중립성을 위해 담담하게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돈이 안 된다는 겁니다. 정성들여 쓴 긴 기사보다 연합뉴스를 베낀 짧은 기사가 더 많은 트래픽을 가져옵니다. 트래픽은 광고와 직접 연결됩니다. 기사 하나를 쓰는 데 시간을 많이 주지 않는 이유도 결국 수익성 때문입니다.

이는 내러티브뿐 아니라 심층기사 모두에 해당합니다. 책 <나쁜 뉴스의 나라>에서 한 인터넷 매체 기자는 "열심히 인터뷰해 만든 기사는 SNS에 공유도 별로 안 되는데, KBS 기사를 베낀 시덥지 않은 기사는 엄청 많이 읽힌다"며 "그럴 때면 힘이 빠진다"고 푸념합니다.

조회수를 보장하지 않는 데다가 우리에게 익숙하지도 않은 내러티브 기사를 언론사에서 밀어주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네 발로 기어다니지 않으려면

전족을 한 발로는 뛰거나 힘든 일을 할 수 없어, 신분이 높은 여성이란 걸 과시할 수 있었다. ⓒ Ashley Van Haeften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간과 정성을 들여 쓴 기사도 돈이 된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내러티브 기사를 재밌어하고 공감하는 독자가 많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몇몇 기자가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걸 시도해도 반응해주는 독자가 없으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독자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건 간단합니다. 재밌고 인상적인 기사는 재밌고 인상적이었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됩니다. '좋아요'를 누르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공유하고 댓글을 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기사도 먹힌다고 보여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기자 역시 자신의 상급자를 설득해야 하는 회사원이니까요.

꼭 내러티브 기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제대로 다룬 기사라면, 독자에게 더 다가가려는 기사라면 어느 것이든 좋습니다. 내러티브는 카드뉴스나 인포그래픽처럼 뉴스를 잘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현재 언론이 위기라는 건 분명합니다. 예전엔 언론의 자유가 문제였지만 요즘엔 생존 문제까지 겹쳤습니다. 기성언론의 기사 자체를 안 읽습니다. 굳이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사 대신 여러 재밌는 글이 더 많은 정보를 주고 통찰을 주기 때문입니다.

기자 스스로도 뉴스가 지겹다고 말합니다.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직으로서 위기를 직접 느끼는 안수찬 기자는 이렇게까지 표현합니다.

"출입처 중심의 한국 언론 시스템은 전족과 같다. 겉보기엔 예쁜 발을 만들 수 있겠지만(실제론 흉측함에도) 원래 보행 목적으로는 쓸 수 없다. 중국 공산혁명 때 전족을 한 고관대작 부인은 걷지 못하고 사지로 기어서 피난했다."
덧붙이는 글 <뉴스가 지겨운 기자>, 안수찬, 삼인, 2013.12.13 발행

뉴스가 지겨운 기자 - 내러티브 탐사보도로 세상을 만나다

안수찬 지음,
삼인, 2013


#한국언론 #저널리즘 #내러티브 #뉴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