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회고록'과 구태의연한 기록전쟁

[신간] 우리 기록 현실에 대한 고발장, 전진한의 <대통령 기록전쟁>

등록 2016.10.19 21:26수정 2016.10.19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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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연산군 4년). 실록청 당상(堂上) 이극돈은 사초(史草: 사관이 기록하는 실록의 초고)를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에 대한 비방에 가까운 기록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선대 임금이었던 세조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문구들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

사초의 존재는 여러 대신들에게 알려졌고, 사안의 파급력을 알아 본 유자광에 의해 임금 연산의 귀에까지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분노한 연산은 "당장 사초를 들이라"고 엄명을 내린다. "예로부터 임금이 사초를 보는 법은 없다"는 대신들의 만류도 소용 없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역대 어느 임금도 선왕의 실록을 마음대로 볼 수는 없었다. 사관의 정치적 독립과 공정한 기록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극돈의 사사로운 감정에서 촉발된 '사초 유출'은 건드려서는 안 될 금기를 깨고 말았다. 이윽고 조선의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기록 담당자였던 김일손의 추국을 시작으로, 출처를 밝히는 과정에서 관련자들이 줄줄이 형장으로 끌려왔다. 형장은 비명소리로 가득찼고, 직필(直筆)과 간언(諫言)으로 무장했던 사관, 대간들이 모조리 숙청당했다.

핵심 배후로 지목된 김종직은 이미 죽은 몸이었으나, 관이 열리고 뼈가 으깨어지는 부관참시를 당해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가 '무오사화(戊午史禍)'라 부르는 대규모 옥사의 시작이었다. '기록 유출'이 몰고 온 후폭풍은 조선 통치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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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간신> 속 연산군(김강우 분)의 모습. 연산군은 유출된 사초의 내용을 트집잡아 자신의 반대세력을 숙청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던가. 무오사화가 일어났던 때로부터 꼭 500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또 한 번 '기록'으로 인한 극심한 격랑에 휘말려야 했다.


2012년 10월 8일,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에 의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존재가 폭로된 것이다. 그가 봤다고 주장한 대화록 속에는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서해 NLL을 포기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이 담겨있어, 온 국민을 충격 속에 빠트렸다.

대화록의 진위여부를 가릴 새도 없었다. 정부·여당은 대화록의 존재를 발빠르게 정국전환용으로 활용했다. 급기야 대선 유세 현장에서 여당 대표가 대화록을 낭독하기에 이르렀다. 선거 때마다 불어오는 북풍(北風)을 등에 업고 여당 대선 후보는 결국 당선을 거머쥘 수 있었다.

대선이 끝난 뒤인 2013년 6월에서야 국가정보원은 슬그머니 대화록 전문을 공개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NLL 포기 발언을 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북에 대해 단호하면서도 유연한 태도로 회담에 임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모든 물은 이미 엎질러진 뒤였다. 국정원의 뒤늦은 대화록 공개는 오히려 '1급 국가비밀'에 해당하는 정상회담 대화록을 정보기관이 스스로 공개했다는 비판만 낳을 뿐이었다.

이쯤 되면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사초를 유출한 조선의 훈구대신들이나, 대선 정국에서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위해 대화록을 멋대로 유출한 여당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당이 유출한 대화록은 허위와 과장으로 점철된 '찌라시'에 불과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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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악수를 나누는 장면 ⓒ 대통령기록관


노무현, 대통령기록을 남긴 죄

한 편의 웃지 못할 블랙코미디와도 같은 현실에, 누구보다 분노한 이가 있었으니. '정보·기록관리 활동가'를 자처하는 전진한 알권리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현대판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목도하며, 대화록 사건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낱낱이 밝혀내기로 결심했다. 이번에 출간된 <대통령 기록전쟁>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일종의 고발장인 셈이다.

2002년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 소속으로 '기록관리·공개운동'을 시작한 그는 누구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룬 기록정책 혁신의 성과를 생생히 지켜보았고, 그에 임하는 정신을 잘 알고 있었다.

"참여정부는 탄핵 복귀 이후 기록관리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많은 기록관리 정책을 만들었고 개혁을 이루어냈다. 공공기록물법을 개정·강화했고, 기록관리전문요원들을 일괄적으로 선발해 각 기관에 배치했으며, 각종 기록관리시스템을 도입해 체계적인 기록관리를 하도록 했다. 대통령기록물법을 도입해,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았던 대통령기록을 강제적으로 생산하고 관리하도록 했다" - p.24


그러나 정작 대통령기록물법을 만든 장본인은 자신이 만든 법의 덫에 걸려 살아있을 때도 고통받고, 죽어서도 부관참시 당했다. 저자는 그 꼴을 보며 참담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생전에도 기록은 노무현 대통령을 괴롭히는 도구로 쓰이더니, 서거 이후에도 부관참시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여당 정치인들은 노무현 대통령기록을 왜곡하고 악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 과정에서 참여정부 핵심관계자들은 검찰에 기소당했고, 2016년 현재까지도 재판을 받고 있다. 도대체 기록을 체계적으로 생산, 관리했다는 이유로 이런 고초를 당하는 나라가 있는지 궁금하다" - p.27~28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

저자가 처음 정보공개운동을 시작했을 당시,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기록보존상태는 참담한 지경이었다고 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취재를 위해 직접 찾아간 중앙 정부부처의 문서고는 열 평 남짓의 작은 창고에 불과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온갖 기록물들이 분류기준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창문과 환풍기 하나 없는 공간에서 오랜 시간 묵혀놓은 탓에, 문서에는 곳곳에 곰팡이들이 피었고 당장이라도 손을 대면 으스러질 것처럼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사실상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는 기록관리와 보존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여연대의 노력으로 김대중 정부 당시 '공공기록물법'이 제정되었으나, 그마저도 기록관리전문요원의 자격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법을 뒷받침할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공기록물법은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전문요원의 자격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공공기관에서는 기록 미등록, 무단폐기, 은닉, 위조 등 문서관리 상태가 악화되어만 갔다.

노무현의 의지로 탄생한 '대통령기록물법'

저자 역시 이런 현실에 낙담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소식이 들려왔다. 탄핵에서 복귀한 노무현 대통령이 기록혁신을 강조하며, 기록물 공개에 관한 본인 명의의 법제화를 추진한다는 것. 당시 노 대통령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9급 공무원의 제안이라도 다 남겨둬야 한다", "기록이 필요할 것인가 아닌가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기록을 남기고 후세가 판단할 문제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윽고 참여정부는 정보공개, 기록관리, 대통령기록관리, 비밀보호제도 등 4대 혁신법안의 제정 및 개정 작업에 돌입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성과는 '대통령기록물법'의 제정이었다.

대통령기록물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대통령이 생산한 기록의 주인은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역대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 시 기록들을 무단 폐기하거나, 모두 사저로 이관했다. 그 바람에 아직까지도 많은 사건들이 그 배후를 밝히지 못한 채, 미제의 사건으로 남아있는 상태다. 백범 김구 암살 사건, 장준하 의문사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그 당시를 증언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에,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양심고백'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대통령기록물법은 이런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차후에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지도 모르는 기록의 파기, 은닉 등을 방지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대통령기록물법 3조는 '대통령기록물의 소유권은 국가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설사 대통령 자신이 생산한 기록일지라도 파기, 손상, 은닉, 멸실, 유출, 국외 반출 등이 금지된다. 퇴임하는 즉시 기록은 모두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며, 국가의 기록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강제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 발 더 나아가 그 자신이 모범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법이 통과되자마자 서둘러 시행을 앞당겨, 본인의 임기에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퇴임하는 순간까지 참여정부 5년의 기록들을 차곡차곡 대통령기록관에 이관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퇴임 후 자신이 만든 법과 자신이 남긴 기록들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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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집무장면 ⓒ 대통령기록관


세상에 어떤 범인이 범죄 증거를 보존하나

다시 대화록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는 스스로를 옭아맬 여지가 있는 '대통령기록물법'을 제정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어떤 범인이 범죄의 증거를 보존하자고 주장하는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철저한 기록의 대상이 되기를 원했고, 그 결과 대통령기록을 보존하는 법까지 만든 그의 행보에 대해 좀 더 주목했더라면, 그의 명예가 이 정도로 훼손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애써 만든 법이 사실상 본연의 의미를 잃고 표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기록보존의 의지를 가지고 대통령기록물법을 만들었지만, 후임 대통령들은 오히려 그를 악용해 법을 만든 장본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역사에 진실된 기록 한 줄 남기고자 했던 대통령이 죽어서까지 만신창이가 되는 나라에서 어느 누가 공정한 기록을 남기고자 하겠는가.

"체계적인 대통령기록을 최초로 남긴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과 동시에 온갖 음해에 시달렸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거 이후에도 온갖 억측과 기괴한 논리는 고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이런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본 정치인들은 내밀한 기록을 남기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 p.244


누구보다 기록의 보복성을 잘 알고 있던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 시에 '비밀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은 채 모두 '대통령지정기록물'에 묶어서 이관했다고 밝혔다. 비밀기록은 후임 정부의 공직자들이 국정운영을 위해 참고할 수 있는 기록이지만, 대통령지정기록물은 전직 대통령만이 열람할 수 있다. 이 역시 노 대통령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이제는 사회적 합의 이루어져야

대통령기록물법은 후임 대통령이 국정운영에 참고하고, 국가운영에 관한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탄생한 법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통령기록물법은 후임 정권이 전직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저자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대통령이 남긴 기록을 여야 정치인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하고 폄훼하는 문화는 반드시 없애야 할 것"이라며 "이런 사태가 계속 반복된다면 우리 스스로 반복적으로 자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대통령기록물을 보관하는 '대통령기록관'과 기록들을 관리하는 '기록관리전문요원'의 독립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정치적 독립이 보장된 기관으로 거듭나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공정한 기록관리와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큰 틀에서의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록보존에 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는 한, 제도는 얼마든지 악용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적 대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대통령은 재임하는 동안 경험한 내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기고 후임 대통령들은 기록을 보호하는 문화를 존중하겠다는 합의가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에게 이와 관련된 서약이라도 받아야 한다. 업적을 홍보하기 위한 대통령기록관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대통령은 기록을 통해 냉정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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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대통령기록관' ⓒ 세종특별자치시 공식 블로그


기록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공교롭게도 <대통령 기록전쟁>이 출간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이 또 한 번 기록 논란에 휩싸였다. 이른바 '송민순 회고록' 논란이다. 참여정부 시절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송 전 장관은 최근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당시 우리 정부가 북한에 의견을 구한 뒤 기권을 선언했다고 밝혀 충격을 주고 있다.

여권은 또다시 '국기문란·반역행위'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참여정부 인사들을 매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사실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당시 표결에 관여했던 인사들은 이미 역적이나 다름 없는 신세로 몰려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또다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 대통령기록을 남긴 죄로 지하에서도 고통받아야 했던 노무현 대통령. 그를 둘러싼 기록전쟁은 대체 언제쯤 끝을 맺을 수 있을까.

<대통령 기록전쟁>은 국가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대통령 기록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덧붙이는 글 <대통령 기록전쟁> / 전진한 저 / 한티재 / 268p / 2016.10.13 / 15,000원

대통령 기록전쟁 - 노무현, 대통령기록을 남긴 죄

전진한 지음,
한티재, 2016


#노무현 #대통령 #기록전쟁 #국가기록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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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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