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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바바리맨을 출몰시킨 바로 그 사나이

[홍콩 영화가 살고 있었다네 ②] 주윤발 <영웅본색>과 <첩혈쌍웅>

16.10.24 17:36최종업데이트16.10.24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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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집에는 어딘가에서 얻어왔음직한 위인전이 한 질 있었다.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는 그 시절의 내게 애국심을 가르쳤고, 라이트 형제와 에디슨은 도전 정신을, 슈바이처와 나이팅게일은 숭고한 봉사와 희생을 가르쳤다. 그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우며 하나의 인격체로 거듭나던 그 시절, 마음속 깊은 곳에는 무언가 달래지지 않는 허기가 존재했다. 책 속의 인물들로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그것은 바로 남자다움이었다.

결국, 남자의 향기란 도대체 어떤 냄새인지 의문을 가진 채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보다 훨씬 조숙해 보이고, 주먹깨나 쓰게 생긴 친구를 만난다. 나는 그 친구의 공부를 봐주고 그 녀석은 나의 신변을 보호해주는 일종의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관계로 우리는 끈끈하게 묶였다. 밤늦게나 집에 돌아오시던 녀석의 부모님 덕에 그 집은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고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이 보여준 비디오 한 편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남자의 체취를 맡게 된다.

영화 <영웅본색> ⓒ 조이앤시네마


주연 이상의 '포스' 보여줬던 <영웅본색>

그 영화의 제목은 바로, <영웅본색>(1986)이다. 이 대목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키면 나오는 "키야"소리가 절로 나온다면 당신은 그 시대를 성냥개비 하나 물고 지나온 남자임이 틀림없다. 조금 여유가 있는 집이었으면, 프라모델 쌍권총과 동그란 선글라스가 추가되었을 테고,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다면 아버지의 바바리코트까지 걸치는 호사를 누렸을 게다. 그렇게 사내  아이들에게 끼친 영향력으로만 따졌을 때, 백 명의 위인에게도 꿀리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감히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주윤발. 그 시대를 살았던 중년의 사내들에게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존재. 그로 인해 사양길이던 성냥산업이 잠시나마 불꽃을 피웠다는 풍문이 전해지고, 선글라스 살 형편이 안 되는 청소년들은 눈물을 머금고 검정 매직으로 안경을 색칠했으며, 의류업계쪽에서는 때 아닌 바바리 특수로 인해 인기가 시들해진 가죽잠바 상인들이 여고 앞에 바바리맨을 출몰시켰다는 믿기 힘든 소문까지 떠돌던 전설 같은 존재. 그가 바로 주윤발이다.

성냥개비 붐을 일으켰던 주윤발 ⓒ 조이앤시네마


지금까지도 패러디 되는 <영웅본색>의 명장면 ⓒ 조이앤시네마


<영웅본색> 1편에서 주윤발은 주연이 아니었다. 적룡과 장국영, 두 형제의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웅본색>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적어도 내게는 주윤발이다. 비록 위조지폐지만 돈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는 대인의 모습에서부터, 복수의 감정을 억누르고 미리 화분에 총을 숨겨두는 냉철함까지.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친구를 기다리는 의리와 뭉클한 마지막 장면까지 그가 아니면 과연 누가 그 배역을 소화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전편을 뛰어넘는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비웃으며 그는 <영웅본색2>(1987)에서 살아 돌아왔다 (더 이상의 내용은 스포일러에 해당되니 그만 한다). 혹자는 전편에 비해 줄거리도 빈약하고 황당한 총격전만 늘어났다고 불평하기도 하지만, 주윤발이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치 않았다. 수십 발의 총알을 맞고도 쉽게 죽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윤발은 <영웅본색> 2편을 통해 사내아이들의 서열을 확실하게 정리해준다. 전편을 보고 너도나도 성냥개비를 물고 쌍권총을 차고 다니던 조무래기들은 2편에서 그가 라이터 가스를 들이마시는 장면을 보고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낀다. 그때 한반에 한두 명쯤 그 장면을 따라하는 아이들은 반을 뒤에서 통솔하는 위치에 올라서며 성냥개비 아이들과 확실한 선을 긋는다.

물론, 그러한 장면들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으며 지나친 폭력 장면은 아이들의 심성을 파괴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말이 좋아 홍콩 느와르지 본질로 접근하면 깡패영화 아니냐는 의견도 수긍한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들에게 그만한 우상은 없었다. 개중에 소수는 어둠의 길로 접어들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또래들은 우정과 의리의 표본으로 생각하며 그 시대를 지나왔다.

영화 <영웅본색2> ⓒ 조이앤시네마


언제나 '대인'이었던 그

그리고 그는 몇 년 후, 거의 신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영화로 우리의 호흡을 멈추게 만든다. <첩혈쌍웅>(1989)이라는 주옥같은 영화 속에서 심장이 따뜻한 킬러의 역할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심장이 따뜻한 킬러가 어디 있겠냐만 주윤발은 킬러라는 잔혹함 속에 훈훈한 인간애를 불어넣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영화의 내용에 앞서 <첩혈쌍웅>하면 떠오르는 기억은 배급사의 악덕한 만행이다.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영화를 상·하 두 편으로 나누어 비디오테이프로 만든 것이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는 청소년들은 눈물을 머금고 쌈짓돈을 모아 두 개의 비디오를 빌려야 했다. 그럼에도 주윤발을 볼 수 있다면, 매점에서 꿀빵 하나 덜 사먹는 것 쯤 우리는 감내할 수 있었다.

<첩혈쌍웅> 속 주윤발은 멋있는 경지를 넘어서 감탄스럽다. 세탁소 아저씨가 싫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 총격 장면에 흰 양복을 입고 가는 그에게서 임전무퇴의 정신이 느껴진다. 누군가는 영화의 배경인 하얀 비둘기와 흰 양초에 드레스 코드를 맞추기 위한 그의 평소 성격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피로 물든 흰 양복을 보며 더 이상 세탁이 필요 없는 그의 운명을 감지해내고 한없이 슬퍼했다.

영화 <첩혈쌍웅> 스틸컷 ⓒ 조이앤시네마


어린 시절 너무도 가난해서 중학교를 중퇴하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는 주윤발. 여전히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한 달 용돈으로 10만 원가량을 아내에게서 타 쓴다는 그의 검소함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려운 시절에 신세를 진 사람들의 부탁으로 한해에 열편의 영화를 찍기도 했다는 그에게 우리가 열광했던 것은 그의 다작이 아닌 인간적인 멋스러움이었다.

2년 전 홍콩 시위 때 소신 있는 발언으로 다시 한 번 대인의 진면목을 보여준 주윤발. 블랙리스트(어쩐지 낯이 익다)에 올라 활동이 제한 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돈을 덜 벌면 된다"는 쿨한 멘트로 우리를 감동시켰던 진정한 영웅. 비록 '영웅본색' 에서의 팽팽한 얼굴과 <첩혈쌍웅>에서의 서슬 퍼런 눈빛은 세월의 흐름 앞에 주름지고 무뎌졌지만, 그는 여전히 그때 그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속에 영웅으로 남아 있다. 오죽하면 큰 아들 이름을 영웅으로 지었겠는가?

아무쪼록 그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영웅으로 왔다가 영웅으로 사라지기를 그와 함께 하는 남은 시간 동안 빌어마지 않을 것이다. 주윤발, 부르다가 내가  감격하는 이름이여!

영화 <첩혈쌍웅> ⓒ 조이앤시네마



주윤발 영웅본색 첩혈쌍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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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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