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주스 때문에 시작된 20년 세계여행

[서평] <300불로 떠난 이민, 20년 세계일주가 되다>를 읽고

등록 2016.11.02 17:54수정 2016.11.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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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거주형 여행기 <300불로 떠난 이민, 20년 세계일주가 되다>의 책표지. 원치 않은 시련과 실패로 시작된 20 여 년의 세계일주, 그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 다반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말 한 마디는 어떤 극적인 순간을 연출해낸다. 등대처럼 어떤 방향을 알려주고,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해준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는 평소 염두에 둔 적 없던 생각을 떠올리게 하고, 벼르고 별러왔던 어떤 선택에 날개를 달아주기도 한다.

인생에서 '결정적 순간'이란 바로 누군가의 평범한 말 한마디 속에서도 피어난다. 20년 동안 생활 거주형 세계여행을 하는 '이 대책 없는 가족의 여행기'를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전 세계 곳곳을 떠돌며 살아가는 자칭 '휴먼노마드 가족(노마드는 유목민이라는 뜻)'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아내의 한숨 섞인 말 한마디가 있었다.


1997년은 IMF 경제위기로 대한민국이 극심한 몸살을 앓을 때였다. '보너스 자진반납 동의서'나 '감봉'이라는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출근할 직장이 있다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빠듯한 월급으로 살아가려면 생필품 외에는 오렌지 주스 한 병 사먹기도 녹록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장을 보러간 아내는 퇴근 후 돌아온 남편에게 진열대에 도로 두고 온 오렌지 주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내가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두고 온 오렌지 주스가 일깨워준 건 자신이 처한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300불로 떠난 이민, 20년 세계일주가 되다>의 저자 김현성씨는 큰 금융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데도 오렌지 주스 하나 못 사먹는 현실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개인의 노력과는 별개로 회사나 조직의 형편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삶에 대해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대기업 노동자라는 허울 좋은 노예 생활'을 정리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자신의 능력을 회사가 아닌 가족을 위해 써보자'는 생각으로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내자마자 무작정 대학시절 교환학생으로 1년간 머물렀던 멕시코로 단돈 300불을 챙겨 홀로 떠났다. 한국에서 집이 정리되는 동안, 살아갈 기반을 먼저 마련해볼 계획이었다. 만약 그날 오렌지 주스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그들 부부는 한국에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갔을까. 평생 짐을 싸고 푸는 '21세기형 유목민'의 삶을 선택하면서, 빼앗긴 자유를 찾듯 국경을 넘나드는 길 위의 삶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세계여행기'라는 부제가 달렸지만 이 책 속에는 특별한 관광지나 유적지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1998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미국, 중국, 뉴질랜드, 일본 등 7개국에서 살아온 생생한 경험담이 수록돼 있다. 한국 등산과는 다르게 고산지대인 멕시코에선 내려갔다 올라가는 방식의 산행이 일반적이다. 소나기가 내려도 천천히 비를 맞으며 걷는 뉴질랜드 사람들이나, 아들 친구들과 함께 먹은 라멘 값을 낼 때 살인적인 일본 물가에 기절초풍할 뻔 했다는 이야기는 살아보지 않았다면 마주하지 못할 휴먼노마드 가족만의 추억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휴먼노마드 가족이 모아온 특별한 자산이 있다면,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지인들일 것이다. 유목민처럼 세계 도처를 떠돌며 살아가지만, 사는 동안엔 그 나라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낯선 이방인으로 공항에 들어서지만, 떠날 때는 특별한 추억과 현지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이방인이라는 불명예를 씻기 위해서다. 그 결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국의 땅은 언제든 돌아와 푸근히 기댈 고향 같은 곳으로 그들의 기억 속에 머문다.


이를 위해 휴먼노마드 가족만이 지키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휴먼노마드 가족은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중국에서 살 결심을 했던 것도 우연히 길에서 만난 대학 동기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휴먼노마드 가족은 현지에서 일상생활을 하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도 현지에서 조달한다. 집을 구할 때는 살림살이가 기본적으로 갖춰진 집을 빌리고, 부족한 물품은 중고 시장에서 산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현지 학교를 다녀야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동선에 맞춰 집을 구한다.

7개국의 나라를 선택할 때도, 다시 그 나라를 떠날 때도 중간기점으로 한국행을 고집한다. 해외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도 마음의 중심엔 늘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배어있다. 외국 유치원과 학교를 다니면서 형편없어지는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한국어 선생으로 나선 아내의 열혈교육의 배경도 그런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궁금했던 점은 한 가족이 전 세계를 누비며 살아온 경제적인 배경이다. 휴먼노마드 가족들을 향해 쏟아지는 질문사례 중 왜 돌아다니느냐는 물음 다음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 사느냐가 많았다. 앞서 밝혔듯이 유목민의 개척정신을 사랑하는 그들 가족들은 딱히 내일의 밥그릇에 별 관심이 없다. 뭐든 닥치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멕시코에서는 양말 장사로, 미국에서는 식품 창고 하역 노동자로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부지런히 몸을 굴리면, 먹고 살만큼의 수입은 보장됐다.

현재 그들 가족은 독일에서 살고 있다. 고등학교는 한곳에서 보내고 싶다는 아들의 바람 때문에 4년째 독일에서 머물고 있는 중이다. 가령 독일만 하더라도 단순 노동자와 전문직 종사자와의 수입이 한국만큼 몇 배의 격차가 나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은 의사가 100을 벌면 웨이터가 10을 버는 구조지만, 독일은 웨이터가 60을 버는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단순노동으로도 충분히 가족을 부양하는 평범한 생활이 보장되는 것이다.

한 곳에서 정착하는 삶도 아니고 여러 나라를 떠돌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다. 생소한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겪게 되는 어려움 앞에서 휴먼노마드 가족들은 겸손하게 낮은 자세로 그 이질감을 받아들인다. 각 나라의 언어나 문화를 배우겠다는 학구열에 노력을 쏟지 않는다면, 그 사회 속의 구성원으로 온전히 정착할 수 없다.

길 위에서 자란 휴먼노마드 아이들은 어느덧 자라 성인식을 치를 날도 몇 해 남지 않았다. 어느 날 TV를 보고 있는데 아들이 휴먼노마드 여행에 대해 자기 생각을 말한다. <정글의 법칙>은 휴먼노마드 여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방송프로그램이라 사전 답사도 가고, 계획이 적혀 있는 대본에 현지 통역사나 가이드도 있지만, 휴먼노마드 가족의 여행에는 무조건 떠난다는 단 하나의 원칙 밖에 없다고.

그 원칙을 지킨 덕분에 20여 년의 세계일주가 가능했다. 처음부터 휴먼노마드 가족은 20여 년의 세계일주를 꿈꾸지 않았다. 처음 떠난 멕시코에서 벌인 넥타이원단사업이 승승장구했다면, 전재산을 탕진한 빈털털이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업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미국으로 떠나자는 즉흥적인 결정에 비행기 티켓을 끊지 않았다면, 휴먼노마드라는 '신인류의 부족'은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작정하고 20년 세계일주에 나섰다면, 단언컨대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휴먼노마드 가족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곳을 바라보며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동행자로 낯선 길을 걸어왔을 뿐이다.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어보니 어느덧 '20년 동안의 세계 여행'이라는 거창한 타이틀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휴먼노마드의 족장'이라고 자부하는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평생 꿈을 꾸고 노력하고 이루고 또 꾸고 이루어도 다람쥐 쳇바퀴요, 못 이루어도 쳇바퀴 위의 일뿐이라고 생각한다. 난 다람쥐가 되고 싶지 않았고, 평생 꿈 숙제를 풀다가 죽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현재 삶을 충분히 즐기고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돌아본 나, 그 모습이 나의 꿈이다. (중략) 하여간 꿈같은 건 잘 때나 꾸는 거지 눈 떠 있는 현실에선 즐겁게 살자는 것, 그게 바로 내 꿈인 셈이다." (77쪽)


떠나기 전이 제일 두렵지 공항에 도착하면 곧 알게 되는 세상의 법칙이 있다고, 저자는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모든 문제는 겪어서 버텨내면 다 해결되는 법이다. 모든 해답은 삶의 현장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하기보다 움직이고, 미래보다 현재를 중시하며, 거창한 꿈보다 오늘 하루 동안 누릴 작은 행복을 위해 살았다. 그날 오렌지 주스 이야기를 해 이 생고생이 시작됐다는 아내의 장난 섞인 농담을 들을 때면, 문득 자신의 마음에 불을 지펴준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어느 마트에서 파는 오렌지 주스가 불러일으킨 20년 세계여행. 시작은 아주 평범한 곳에서부터 비롯된다. 떠나고 싶다면 혹은 저지르고 싶다면, 무릇 그 출발점은 고단한 일상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 당신의 귓가를 맴도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기를.

평범한 말 한마디 속에 박혀 있는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보다 더한 축복은 없으리. 혹시 아는가. 곁에 있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오렌지 주스 같은 상큼한 향기가 배어있을지. 오렌지 빛이 넘실거리는 우리만의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300불로 떠난 이민, 20년 세계일주가 되다> 김현성 글/ 이명환 그림/ 다반/ 값 16000원

300불로 떠난 이민, 20년 세계일주가 되다 - 대책 없는 가족의 생활 거주형 세계여행기

김현성 지음, 이명환 그림,
다반, 2016


#김현성 #세계일주 #<300불로 떠난 이민, #20년 세계일주가 되다> #휴먼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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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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