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생도 하는데 검찰은 왜 못하나?

상명하복 버리고 각자 소명대로 행동해야... 전복되지 않는 질서는 족쇄가 된다

등록 2016.11.01 15:27수정 2016.11.03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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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린 왜 검찰이라는 조직이 철저하게 진실을 가로막고, 정의의 날개를 부러뜨리는 이 시대 절망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new이대생이 거둔 승리의 경험을 모두의 것으로 하자.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각자의 소명을 지키는 것이다
  • new전복되지 않는 질서는 족쇄가 되고 만다. 우린 매일 틀이 되어버린 질서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그 질서가 과연 무엇을 향해 작동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우화다. 각자의 소명을 저버리고 상명하복의 질서에만 복속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고, 알아버렸다. 그들이 무릎 꿇고 복종하던 그 지존의 권력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기꾼 잡범이었단 사실을.

전복하는 세력의 첫 승리, 이화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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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화! 비리척결!" 교수,학생 한목소리 미래라이프대 설립과 '비선실세' 최순실 딸 부정입학 및 학사특혜 관련 논란으로 사퇴요구를 받아온 이화여대 최경희 총장이 19일 오후 교수들의 대규모 사퇴 촉구 기자회견 직전 전격 사퇴를 발표했다. 최 총장의 사퇴 발표에서 불구하고 교수들은 서대문구 이화여대 본관앞에 모여 예정된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발표했다. 기자회견에는 80여일째 본관점거농성중인 학생들을 비롯해 수천명의 학생들이 참여해 교수들을 지지했다. ⓒ 권우성


우린 언젠가부터 지나치게 복종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간혹 있으면 사람들은 짜증을 냈다. 이성에 기반하지 않은 야유로, 돌팔매로 그들을 파묻었다. 그렇게 복종은 점점 한반도 남쪽에서 유일한 삶의 룰이 되어갔다.

그리하여 선출된 적도 없고, 실은 듣도 보도 못한 한무리의 인간들이 이 나라를 온통 쥐고 흔들게 만들었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건, 매우 오래된 우화처럼 낯설게 들리던 이 땅에, 놀라운 소식이 하나 들려왔다.

10월 21일. 지난 7월 28일부터 본관을 점거해 온 학생들이 84일 만에 농성을 풀면서 '이화의 난'이 종결되었다. 대학의 학위 장사를 노골화 하는 미래라이프대 설립에 반대하며 시작된 일명 '이화의 난'은 전대미문의 수평적이고 광범위한 연대의 힘으로 경찰들의 난입을 이겨내고, 교수들의 연대를 이끌어냈다. 뿐인가, 학교 측의 미래라이프대 설립 시도를 백지화했다.

그러나 여전히 '총장 사퇴'라는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있던 시점에 최순실 딸 정유라의 부정입학과 특혜 등이 드러나며 학생들은 다시 일어났다. 권력의 요구에 교육자의 양심을 팔아넘긴 학교와 교수들의 행위를 고발하며 학생들의 투쟁은 재점화 되었다. 마침내 총장은 사퇴를 선언한다. 교수들의 동참까지 이끌어낸 이대생들의 분노는 한국현대사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로 불리는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를 파헤치게 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경쟁의 먹이사슬, 서로의 등을 밟고 올라서도록 설계된 약육강식의 피라미드에서, 학생들은 상아탑이 지켜야 할 원칙을 무기삼아, '벗'을 지켜내고, 나를 성장시키며, 마침내 우리의 존엄을 '해방'시켰다. 주동자를 색출해 내겠다는 경찰에 맞서 5천명의 학생들이 스스로 주동자임을 선언하였고, 권력과 돈에 굴복해 교육자의 양심을 판 교수들을 향해 "권력자 밑에 붙어 비리에 동조하는 당신들이 교육자인가?" 감히 물었다. 


학생과 학교 사이에 3개월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화여대, 그러나 10월 이대의 교정엔 자긍심과 활기가 찰랑거린다. 더 이상 불의에 구차하게 무릎 꿇지 않고, 힘을 갖게 될 먼 미래를 기약하며 오늘의 치욕스런 후퇴에 눈물 삼키지 않아도 된다는 그 값진 경험을 이 캠퍼스의 모든 청년들은 나눠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일찌감치 그것을 잊고 살았던 교수들의 굳은 머릿속까지 그것을 전파시켰다. 그것은 바로, 기쁨을 주는 타자와의 연대의 힘이었다. 

검찰, 가장 높은 곳에서 무릎 꿇고 있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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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검찰 소환에 피켓 시위 벌이는 민중연합당 미르·K스포츠 재단의 강제 모금과 청와대 문건 유출 등 국정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씨가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도착하자, 민중연합당 당원들이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한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국정농단을 해온 최순실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사람들이 일제히 주목한 한 집단이 있다. 그것은 '검찰'이다. 최순실 사건은, 극우언론들, 새누리당 의원들, 심지어 일베까지도 하루 아침에 얼굴색을 바꾸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집회를 진압하러 나선 경찰까지 "나라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여러분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부드러운 말투로 시민들을 대했건만, 대한민국의 검찰이라는 집단만은 그것이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라도 되느냐는 듯, 거드름을 피웠다.

<한겨레>, <JTBC> 등 언론의 대활약으로 세상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게 될 때까지, 그들은 혐의를 받고 있는 그 어느 곳 하나 압수수색하지 않았고, 마침내 문제의 그녀 최순실이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피곤한' 피의자를 이해하여 풀어주는 놀라운 관용을 베풀며 국민을 우롱했다.

그런데 같은 날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중심에 서 있던 검찰 출신의 대통령 비서실장 우병우가 물러난 자리에 또 다른 검사 출신의 최재경이란 자가 내려오는 모습을 본다. 그는 이명박의 BBK를 무혐의로 처리했고, 노무현 측근에 대한 표적 수사를 주도했으며, 이명박의 사돈인 효성그룹의 비자금 사건에도 면죄부를 준 인물이다.

우린 일찍이 삼성이 아주 오래 전부터 검찰 집단에 정기적으로 떡값을 상납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로 기소된 사람은 삼성도 떡검들도 아닌, 그 사실을 폭로한 노회찬 의원과 이상호 기자 뿐. 영화 <자백>은 검사들이 '국정원'과의 협력 하에 얼마나 많은 가짜 간첩들을 제조해 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위조된 서류를 바탕으로 기소했음이 밝혀져도, 그들은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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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민정수석으로 임명된 최재경 변호사 ⓒ 연합뉴스


이쯤되면, 우린 왜 검찰이라는 조직이 철저하게 진실을 가로막고, 정의의 날개를 부러뜨리는 이 시대 절망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법에 따라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검사는 검찰총장의 지휘를 받는 상명하복의 관계에 있지만, 직무상으로는 상사의 보조기관이 아니며, 각자 독립된 국가행정관청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검찰 사무를 행할 권한을 가진다.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이라는, 한 나라의 국가정의를 세우기 위한, 절체절명의 순간, 상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압수수색을 감행하고, 국정원 직원을 체포한 검사가 있었다. 윤석렬. 그는 결국 좌천되어, 수사팀에서 배제되었고, 이후 검찰수사는 모든 것을 덮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에 돌아오는 건 권력에서 배제되는 응징뿐임을 목도하면서, 검사들은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이 검사의 룰임을 재확인한다. 그런데 룰 따르는 것은 동시에 국가정의를 위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국민을 배반하고, 약자를 짓밟고, 권력자와 자본가의 전횡을 도울 때만, 편안한 검사 생활을 할 수 있는 운명을 가졌다. 

노예란 무엇인가. 자신의 의지로 존엄을 지킬 수 없으며, 타인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자들이다. 철저하게 권력과 자본의 채찍에 길들여진 노예들이 바로 이 땅의 검사들이다. 그렇게 처참하게 유린된 권리, 존엄을 어디에선가는 보상받아야겠기에 떡검이 되고 섹검이 되는 것이다. 두둑한 세속적 보상을 누릴지언정 그들은 노예다. 노예의 삶은 불의한 명령에 항거하지 않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윤석렬 검사가 국민들의 지지와 환호를 받으며, 국정원을 수사하다가, 결국 전국민이 보는 앞에서 꺾여버리던 그 순간. 검사들 모두가 살고, 국민적 영웅이 되며, 더러운 노예의 운명을 벗어던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집단 항명이다.

이대생들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윤석렬이라는 '벗', 한줌의 권력집단이 아니라 국민들과 법질서에 충성하기 위해 행동한 동료, 윤석렬을 지키기 위해 함께 집단 항명하였다면, 그들은 법의 정신을 구하고, 5천만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권력의 노예로부터 비로소 해방되었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흘리며, 그를 떨어뜨리려고 수작을 부릴 때, 다시 한 번 검사들은 엎드렸다. 채동욱 총장은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수사와 전두환 전 대통령이 토해내지 않은 수천 억 원의 추징금 징수를 위해 칼을 뽑은 상태였다.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칼을 뽑은 총장과 뜻을 같이하는 검사들이었다면, <조선일보>가 저지른 수많은 만행들을 기소하면서 역공을 펼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권력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검사라는 이름의 노예들은 '연대'가 무엇인지 '항명'이 무엇인지, 아니 어쩌면 '사법정의'가 무엇인지조차 까맣게 모르는 듯, 높은 분들의 의중이 무엇인지만을 헤아리며 고개를 파묻었다.

그들은 살면서 한 번도 노조 활동을 해보거나, 타인과 연대하여 공동선을 실현하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질서의 전복이 주는 기쁨을 누려봤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우리의 학교 교육은 저항이나 연대의 미덕을 가르치지 않고, 노조가 있는 직장에서 생활해 본 경험을 가져 봤을 가능성이 적을 테니.

군대의 상명하복 원칙은 검찰을 작동시키는 유일한 룰이었을 것이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외쳤던 윤석렬처럼, 그들이 복종하는 대상이 법이고, 5천만 국민이 주인인 국가였다면, 그 복종의 정신 또한 존중해 줄만 하지만, 그들이 복종하는 대상은 오로지 권력을 쥔 한 줌의 무리일 뿐이다. 

나는 우리나라 사법부가 왜 그토록 노조에 대해 악의적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상명하복의 질서 밖에 알지 못하는 그들의 머리로는, 노조라는 집단의 존재 자체가 불경스러우며, 그들의 모든 합법적인 활동을 기본적으로 불경한 하극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3권이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는 기업주들이 파업기간 발생한 손실을 노조에 손해배상 청구하도록 허락한다. 이 나라 헌법은 그렇게 검사와 판사들에 의해 철저히 왜곡된다. 노조가 기업주에게 돈을 물어주면서 파업을 해야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대한민국뿐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1936년의 총파업

프랑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역사 교과서에서 1936년의 총파업은 매우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진다. 1936년은 프랑스 근현대사에서 가장 좌파에 속하는 정치세력 인민전선 (Front Populaire)이 집권한 때였다.

<빵, 평화, 자유>를 슬로건으로 한 이들이 집권 한 직후, 전국적으로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르아브르, 브레게 등 지방의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점점 수도권 지역으로 올라와 공장뿐 아니라, 백화점들까지 총파업에 들어갔다. 250만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이 총파업으로 건설, 기계, 자동차 업계가 마비되었다. 무려 두달 동안. 그리고 마침내 이들이 얻어낸 것은 '모든' 노동자에게 허락되는 보편적인 15일의 유급 휴가였다.

이 휴가는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온 노동자들의 요구로 현재 연 5주로 늘어났다. 학생들에게도 9주 동안 공부한 후에는 어김없이 2주 동안의 방학이 주어진다. 부모들은 5주간의 휴가를 아이들의 방학에 맞추어 쪼개고, 그렇게 해서 이 사람들은 일년 내내 여러 번 휴가를 즐긴다. 휴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을 짜는 일을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긴다.

모든 아이들은 이 휴가가 노동자의 파업을 통해 얻어졌다는 것과 국민들의 평화와 자유를 슬로건으로 내건 정부라 할지라도 노동자의 권리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실력 행사를 통해서만 달성된다는 것을 교과서를 통해 배운다.

지금도 프랑스 교사들은 교육부가 교사단체와 협의 없이 강압적인 개혁을 단행하려 할 때, 항의의 뜻으로 파업을 단행한다. 프랑스에서는 "내일 선생님 파업한대"라는 말을 1년에도 서너 번 들을 수 있을 만큼 일상적이다. 하여 이 나라에서는 판사들에게도, 경찰들에게도 노조가 있으며, 수시로 파업을 감행한다. '연대' 하는 힘으로 항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명하복을 버리고 각자의 소명을 지킨 자들

이대생이 거둔 승리의 경험을 모두의 것으로 하자.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각자의 소명을 지키는 것이다. 학교는 학문의 전당이어야 하고, 학생들의 성과는 각자의 노력에 의해서 평가 받아야 한다는 간명한 명제로 그들은 하나 되어 싸웠다.

천여 명의 경찰이 난입하여 그들을 위협했고, 주동자 색출을 준동하였으나, 그들은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주모자들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동그란 원으로 이름을 표기했던 사발통문의 지혜로 그 분열의 준동을 이겨냈다.

인간에겐 각자가 선택한 소명이 있다. 언론인에겐 진실을 전하겠다는 소명이, 학생들에겐 학문을 탐구하겠다는, 국회의원에겐 소외된 민의를 받들어 국회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소명이. 또 법률가들에겐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의 정신을 지키겠다는 소명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모든 소명을 저버리고, 오로지 단 하나의 룰, 상명하복에 사로잡혀 행동해 왔다는 현실이 우리를 이렇게 처참한 지경으로 끌어내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어디서 내려왔는지도 모르는 강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들만 득실거린 결과, 죽은 사이비 종교 지도자의 지배를 받기에 이른 것이다.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손에 넣는 행운은 JTBC가 아닌 다른 언론사에서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무조사라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국민들에게 기어이 알려야겠다는 결단은 언론인의 소명을 저버리지 않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소명을 지킨 이대생들이 거악과 싸워 이긴 첫 승리자였다면, 또 다른 소명을 지킬 줄 알았던 JTBC의 언론인들은 난파해 가던 대한민국호에 구명정을 던져주었다.

지난 토요일 광화문 집회 직전, 우상호 더불어 민주당 원대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민심 들끓는 것 이해하지만, (탄핵 또는 하야) 상황 발생하면 혼란 가중되고, 경제위기로 서민 피해 볼 것... 탄핵, 하야 촉구에 동참할 생각 없다." 이것은 소명을 저버린 국회의원의 명징한 자백이다. 그는 이제 국민 위에 군림하는 정치인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급격한 변혁도 원치 않는다는, 알량한 기득권자의 창백한 고백에 다름아니다.

자신의 소명을 간직한 국회의원이라면 당장 실천해야 할 일은 탄핵이다. 2004년, 탄핵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끌어내려던 자들은 국민의 명령을 실천한 것이 아니었고, 정치적 보복의 야망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 저지른 폭거였다. 정작 온 국민이 입 모아 탄핵이나 하야를 열망할 때, 그들은 국민의 목소리를 들을 줄 모른다. 한 번도 그들은 아래로 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격렬한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낸 1968년 혁명 때, 당시 제 2당이던 공산당은, 학생.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이 혁명에 반대했다. 즉각적으론 35%의 최저임금 인상과 10%의 기본급 이상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영역에서 68혁명이 미친 영향은 이 가시적 성과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권위적 사회 질서 전체를 거부하고, 미시적인 인간관계 전반에 걸친 질서의 전복이 68혁명과 그 뒤를 이은 10년 동안 이뤄졌다. 이것은 현대 프랑스를 구축하는 새로운 힘의 원천이 되었다.

우리로서는 공산당이 제2당이었단 사실 자체가 놀랍지만, 1946년 해방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그들은 제1당의 지위를 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 위에 군림하는 지위를 획득한 그들은 변화를 거부했고, 이후 공산당은 급격히 세를 잃고 3% 안팎의 지지율로 연명하는 구닥다리 군소정당으로 전락해갔다. 그러니, 더불어민주당의 실망스런 행보에 딱히 놀랄 것도 없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지역구도의 피해자인 동시에 영원한 2인자라는 지위를 획득한 이들은 이대로 만족한다는 뜻이니까.

의회는 한 번도 사회적 변혁의 주체가 된 적이 없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하지 않는 그 어떤 정치인도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그 카드는 당장 버려야 한다. 맘에 들지 않는 정당은 갈아치워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뜻을 대변해 준 적이 없다면, 그들이 비록 몸집 큰 정당이었다 해도, 바로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럴 때에만 이 간접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있다.

전복되지 않는 질서는 족쇄가 된다

우리가 살면서 민주주의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순간이 딱 두 번 있다. 하나는 투표소에서 그리고 또 하나는 집회장에서다.

5만의 군중이 모일 때, 나의 몸은 5만분의 1을 이루는 단 하나의 몸일 뿐이다. 투표소에서 나의 주권을 행사할 때, 내 표는 결코 10표, 20표가 될 수 없다. 재산의 많고 적고를 떠나, 사회적 영향력이 크고 작고를 떠나, n/1로 정확히 계산되는 집회장에서의 나라는 몸. 투표소에서 내가 행사 하는 표. 그것처럼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순간은 없다. 

연대의 힘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 일상적 파업의 모습을 경험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 상명하복의 질서로부터 튕겨나가는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하다. 투표는 당장 눈앞에 없으니, 그 첫 번째 장이 집회다.

많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말한다. 물론, 오늘 우리가 처한 꼴은 한없이 부끄럽다. 그러나 더 부끄러운 일은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나라가 뒤집어지지 않는 것이다.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이 일었고 그것을 수사하려는 검사가 있었는데, 그가 한순간 좌천되고, 그걸 전국민이 지켜보면서도 조용히 또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이다.

노동자의 대표 한상균씨가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파업하고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8년형을 선고한 검사들이 있고, 기어이 그 노동자의 대표가 5년 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 중인데도, 나라가 조용하다는 사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세상엔 언제나 탐욕스럽고 불의한 무리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들을 벌하지 않고, 그들이 자자손손 활개 치도록 내버려두며,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부끄럽다.

박근혜와 최씨 일가. 박근혜를 대선 후보로 밀어넣은 새누리당이라는 정치세력을 끌어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상적인 권력의 요구에 낱낱이 항명하여야 한다.

전복되지 않는 질서는 족쇄가 되고 만다. 우린 매일 틀이 되어버린 질서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그 질서가 과연 무엇을 향해 작동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등불 삼아. 내 옆에서 같이 불의에 몸을 떨고 있는 나의 벗과 연대하여.
#목수정 #최순실_게이트 #이대 #윤석렬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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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글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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