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의지할 곳, '여기'뿐인가

[주장] 조선의 고종과 고구려 고발기, 위기 닥치자 외세에 손 내밀어

등록 2016.11.04 21:34수정 2016.11.04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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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너무 빨리 몰락할 경우, 당장 미국과 일본의 한반도 전략에 차질이 생긴다. 미국은 박 대통령 퇴임 전에 사드 배치를 마무리해야 한다. 일본 역시 그 안에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내년 대선이 지나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두 나라 정부는 가급적 박 정권이 있을 때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서 두 나라 입장에서는 박 정권의 조기 몰락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박 정권의 조기 몰락이 두 나라에 손실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두 나라가 박 정권의 몰락을 방지하려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박 대통령이 그것을 이용해 부활을 꿈꿀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 박 대통령은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기존 지지층 대다수도 등을 돌렸다. 친위세력인 친박 역시 곤경에 처해 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도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40년간 믿고 의지해온 최씨 집안은 더 이상 기댈 만한 곳이 아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조건 하에 놓인 통치자들은 조기 몰락의 위기에 직면하면 외세의 도움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입증할 자료는 너무나도 많다. 그런 통치자에게 외세가 악마의 손길을 내밀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역시 입증이 가능하다. 그중 두 가지 사례가 이 글에서 소개된다. 하나는 고구려 때 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사례다. 조선시대 사례부터 소개한다.

나라 밖으로 눈을 돌린, 사면초가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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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반군은 파죽지세 속에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더니 급기야 전주성을 함락했다. 정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당시는 전주와 나주가 전라도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전주와 나주에서 이름을 따서 전라도라 했다.


조선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도. 이곳의 중심지인 전주가 순식간에 반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자 고종 임금은 불안에 떨었다. 반군의 기세로 볼 때, 한양이라고 해서 점령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고종은 하야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고종은 믿을 데가 없었다. 정부군마저 쉽게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더 이상 믿을 데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 안에서는 더 이상 믿을 데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렸다.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기로 한 것이다. 외세를 끌어들여 퇴진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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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그런데 청나라가 파병을 준비하자 일본도 덩달아 파병을 결의했다. 이참에 조선 땅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갈라놓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청나라군도 상륙하고 일본군도 상륙함에 따라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여기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조선은 한동안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다. 고종은 그렇게 해서 일본의 간섭을 받는 왕이 됐지만, 농민군으로부터 정권을 지키고 퇴진 위기를 면했으니 그 점만큼은 다행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로부터 12년 전인 1882년에도 고종은 동일한 행보를 보였다. 한양 주민들과 하급 군인들이 시민군을 이뤄 궁궐을 점령한 임오군란 때도 그랬던 것이다. 시민군이 흥선대원군을 옹립함에 따라 정권을 빼앗긴 그는 청나라 정부에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 파병을 요청했다. 식물 임금의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외국군에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때도 청나라 군대는 기분 좋게 손을 내밀었다. 청나라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뒤 한양에 진입해서 대원군을 납치해 청나라로 보낸 다음, 시민군 주역들을 체포해 사태를 종식시켰다. 그런 뒤에 고종한테 왕권을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그냥 되돌려주지는 않았다. 자국의 간섭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고종은 외세와의 제휴로 식물 임금의 처지를 모면했다. 1894년뿐 아니라 1882년에도 외세의 도움을 빌려 위기를 탈출했던 것이다. 

왕위계승권자 고발기가 왕이 되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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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당시 조선에 상륙하는 일본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고구려가 요동(만주) 땅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서기 2세기였다. 고발기라는 왕위 계승권자가 있었다. 결국 그는 왕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사례는 위기에 몰린 통치자나 왕족들이 외세에 의존하기 쉽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사례를 고종과 함께 소개하는 것이다.

고발기는 고국천태왕의 첫째 동생이다. 고구려 군주의 정식 칭호는 한자로 태왕(太王)이었다. 그래서 고국천왕이라 하지 않고 고국천태왕이라 한 것이다. 고국천태왕에게 아들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고발기는 왕위계승 1순위였다. 거기다가 그는 요동에 대한 관리권까지 갖고 있었다. 왕은 아니지만 왕에 준하는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너무도 황당하게 후계자 지위를 도둑질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양력으로 서기 197년 6월이나 7월이었다. <삼국사기>에는 5월이라 되어 있지만, 그것은 음력이다. 양력으로는 6, 7월이었다. 그 시기의 어느 날 밤중이었다. 왕비 우씨 그러니까 형수가 한밤중에 고발기의 집을 급히 찾아왔다.

밤중에 찾아온 형수는 "삼촌이 왕이 되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뜻밖의 말이었다. 고발기는 형수가 혹시 자기를 쿠데타에 끌어들이려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래서 그 한밤중에 형수를 내쫓았다. 그러면서 "부인이 이렇게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은 예법에 어긋납니다"라며 훈계까지 했다.

다음날 아침, 고발기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어젯밤에 태왕이 숨을 거두었으며 바로 아래 동생인 고연우가 왕비의 지원 하에 태왕이 되었다는 발표를 들은 것이다. 고발기가 물려받아야 할 임금의 지위가 동생에게 넘어간 것이다. 왕비의 '장난'이 있었을 거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위 빼앗긴 데 이어 정치적 고립까지...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발기의 집을 떠난 왕비는 곧바로 고연우의 집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돈독히 한 다음에 고연우의 손을 잡고 궁궐로 돌아갔다. 그렇게 해서 고연우를 태왕으로 만든 우씨는 고연우의 아내가 되었다. 고국천태왕이 죽은 뒤에도 자신과 친정의 권세를 유지하고자 고발기를 끌어들이려 했다가, 여의치 않자 고연우 쪽으로 급선회했던 것이다.

왕권을 빼앗긴 고발기는 군대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했다. 하지만 고연우의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했다. 분위기가 고연우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고연우 쪽에 힘을 실어줬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왕위를 빼앗긴 데 이어 정치적 고립에까지 직면하자, 고발기는 자신이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 고발기는 구한말의 고종과 똑같은 발상을 했다. 외세를 이용해서 보복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고발기는 후한(부활한 한나라)의 지방정권인 요동군으로 달려갔다. 당시 요동의 주인은 고구려이지만, 한나라가 그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 요동군이 있었던 것이다. 고발기는 고구려 측의 요동 관리자였다. 그런 사람이 후한의 요동군을 찾아갔던 것이다.

고발기는 요동군 태수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빼앗긴 왕위를 찾아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훗날의 청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요동군 태수도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요동군은 고발기의 왕위를 찾아주지 않았다. 고발기의 요청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요동 땅 주요 지역을 점령해버렸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고구려가 요동 지배권을 탈환한 것은 약 120년 뒤인 4세기 초반의 미천태왕 때였다. 그 120년간 요동이 고구려 수중에 있었다면, 고구려는 그것을 기반으로 중국 쪽으로 영토를 더 확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외세의 도움을 빌려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고발기의 판단 때문에, 그 120년간을 요동을 되찾는 데 허비하고 말았다.

박근혜가 버텨주는 게 미국-일본 이익에 부합?

고종과 고발기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위기에 처한 통치자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 중에는, 정치적으로 사면초가에 처하게 되면 외세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각국의 통치자나 정부 사이에는 일종의 동업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활용해 국내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려는 사람들이 예로부터 많이 있었다.

박 대통령도 그런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미국과 일본 입장에서는, 그가 건재해야만 사드도 배치하고 한미일 군사정보 시스템도 갖출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얼마든지 유혹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 그래서 지금 그에게는 외세의 유혹이 접근하기 쉽다.

박 대통령은 11월 2일의 신임 국무총리 임명으로 국면 전환을 모색했다. 하지만 국민의 반응은 오히려 냉랭하다. 중고등학생들까지 퇴진과 하야를 외칠 만큼,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최고의 정보를 쥐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미국이 일본과 힘을 합쳐 박 대통령을 돕겠다며 손을 내민다면, 박근혜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그 손을 덥석 잡으려 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것이 실현된다면, 최순실·박근혜는 별다른 단죄도 받지 않고 그들의 임기를 무사히 마치게 될 수도 있다.

박 대통령에게는 개인적으로 할 일이 남아 있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퇴진이나 하야의 길을 걷는 게 그는 개인적으로 억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을 통제하고 있는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위기를 모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최순실 사건이 불거진 직후인 10월 27일부터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는 군사정보 공유를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11월 1일에는 도쿄에서 군사정보 보호협정을 위한 실무 협의도 있었다. 양국 정부는 연내 협정 체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 시스템을 포함해서 사드 배치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도, 박근혜가 어느 정도 버텨주는 게 미국과 일본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한다. 우리 국민들이 최순실·박근혜 뿐 아니라 외세의 동향에 대해서까지 동시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사드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 #고종 #고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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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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