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사원이자 성당인 건축물? 놀랍다

[다섯 부부의 인상파식 여행] 아! 이베리아 반도 ⑦

등록 2016.11.24 15:52수정 2016.11.2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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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도바 구시가지를 향한 문 ⓒ 길동무


그의 고향이 코르도바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여행을 떠나기 얼마 전이다. 일정표에 따라 여행지역을 살피던 중 한 문서에 지나가는 이야기 정도로 적힌 것을 읽었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세네카란 이름을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쓴 책 <화에 대하여>의 한국어 번역본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 중 행복론과 인생론을 설파한 책과 세네카 전기를 다룬 책들 때문이다. 밝히거니와 나는 그의 저서를 어느 것도 사서 읽지 않았다.

책을 사는 일에 인색하지 않음에도 그의 책을 선뜻 내 장서로 선택하지 않았다. 빈약하지만 이유가 있다. 미디어들의 다양한 리뷰들 때문이다. 2천 년 전 로마 시대 인물, 그가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 때문인지 미디어들은 그와 관련 책이 출간되면 대접이 후했다. 리뷰와 서평을 다투어 실었다. 목차와 함께 그 리뷰를 탐독하는 것으로 호기심의 불은 끌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란 지극히 표피적이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고 참모로 이름을 떨쳤으며, 고대 로마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누구나 한 번 읽으면 기억할 예수 그리스도보다 4년 일찍 탄생했다는 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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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고 서서 길동무 코르도바 탐방을 반겨주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동상 ⓒ 길동무


코르도바 탐방으로 들떠있는 세비야의 아침, 싫지 않은 비가 내렸다. 새벽에 흩뿌린 비가 개는가 싶더니 출발 시각에도 여전히 가만가만 대지를 적셨다. 그간 진행한 여행 일정이 비로 인해 방해를 받은 적이 없던 때문일까? 그 촉촉함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길동무도 있다. 분위기 좋은 아침이다. 어쩌면 그 비는 전날 밤 플라멩코 관람으로 인해 한껏 고조되었던 열기, 좀처럼 가시지 않은 그 흥분을 가라앉히는 진정제 역할도 했다.

코르도바(Cordova), 흔히 메스키타(Mezqita)로 대변되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고도다. 이 메스키타는 현존하는 스페인 최대 모스크인데, 안달루시아 지방 가톨릭 주교좌 성당 '코르도바 산타마리아 성당'이란 고유명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 건축물이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슬람 사원과 가톨릭교회가 완벽하게 공존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상황이라 했다. 

이런 연유로 코르도바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탐방하는 곳이 메스키타이다. 길동무 또한 코르도바 여행의 우선순위가 메스키타였다. 그런데 이 무슨 인연인가? 성문을 들어서자마자 세네카의 동상이 한 걸음으로 다가와 길동무를 환영한다. 축축이 젖은 몸이다. 동상과 마주한 순간, 바로 그 순간 찌릿 느껴지는 것이 있다. 2천 년이란 아주 둔중한 두께다. 길동무는 세네카가 안기는 그 육중함으로 코르도바 탐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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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년, 그리고 부침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코르도바 건물의 흔적 ⓒ 길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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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주제로 삼은 리얼리즘 계열 회화가 여기저기 액자 없이 걸린 느낌이던 벽 ⓒ 길동무


그 두께는 골목길에서 스친 벽과 기둥에서도 오버랩 되었다. 시간을 주제로 삼은 리얼리즘 계열 회화가 여기저기 액자 없이 걸린 느낌이다. 창문 너머에 전시된 일반 상품들도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식당 입구도 골목의 간판도 품격이 살아있다. 백자 생활용품과 장식품에 장착된 청화의 비취빛 색조는 매혹을 넘어선 중후함으로 가히 치명적이다. 이전에 보았던 신트라 왕궁이나 페나 성의 그것과는 달라도 아주 달랐다. 명백히 현대의 것인데 왜 그것들에서 세네카의 2천 년 향훈이 물씬 풍길까?

사람이 쌓은 오랜 역사, 깊은 문화는 그 아우라만으로도 늘 이렇게 사람을 주눅들게 한다. 마침내 다다른 메스키타, 문을 들어서자 조화와 지혜의 기운이 엄습한다. 뭘까? 그래 포용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 다진 수용의 실체가 압축되어 뿜어져 나온다. 과연 힘으로 눌러 허물어 버릴 수 없을 만도 했겠다. 아름답고 위대했다. 남기고 수용할 수밖에 없었겠다. 그래서 그것이 지혜가 되고만 역사와 실제가 눈앞에 있다. 모스크와 성당이라는 두 이름으로 당당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고 알고 나면 불편한 진실이란 이런 경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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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의 비췻빛 색조가 매혹을 넘어 중후함으로 가히 치명적이던 백자 공예와 생활 용품. 코르도바의 품격을 가늠할 수 있다. ⓒ 길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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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역사와 다듬은 아름다움이 고고한 빛을 발하는 코르도바 가정집 문 ⓒ 길동무


"메스키타는 아랍어로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곳'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8세기 후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 왕이 바그다드에 버금가는 도시를 코르도바에 세우고자 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그는 후기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사람인데, 당시 서고트족 교회 일부를 구매해서 이슬람 사원으로 개축을 시작했습니다. 9~10세기 동안 세 번이나 증축을 거치면서, 마침내 약 2만 5천 명의 신자들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엄청난 규모가 되었지요."

가이드 이 선생의 메스키타 안내가 시작되었다. 그 육성을 뚫고 아주 먼 곳으로부터 묵언 하나 솟구친다.

"그저, 조금 뒤로 물러나 껄껄 웃어라."

2천 년 전 세네카는 그렇게 말했다. '화를 가라앉히는 방법'을 책으로 써달라고 부탁한 여동생 노바투스에게 쓴 편지에서다. 세네카의 이 충고는 메스키타 안에서 저절로 불거졌다. 화를 가라앉히는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보존의 법칙쯤으로 규정해도 좋을 이유로 뒤로 물러나 껄껄 웃으라 한다. 이젠 굳어 하나가 된 무어인과 기독교인의 건축문화, 부조화의 조화를 보며 세네카는 소리나지 않는 웃음을 웃으라 했다.

무어인의 예술 감각이 남긴 절대미, 메스키타는 세계인이 상찬해 마지않는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과는 또 다른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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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인들의 숨결이 들릴 듯 했던 메스키타 내부 ⓒ 길동무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던 알람브라 아닌가. 그와 다른 뭉클함? 그게 뭐야? 당장 밝혀 봐!"

인정할 수 없다고 거친 숨을 쉬는 사람 있을 것이다. 유물로부터 벌을 받듯 곧추서서 얻은 답은 이렇다. 

"보시게. 부드럽고 섬세함이 세월을 머금으면 이렇게 의연해진다네. 처음에는 그냥 강한 세력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어. 받아들여야 했지. 시간이 지나면서 강한 것과 하나가 될 수 있었어. 불편한 과거 그건 분명 진실이야. 그러나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이 실제도 모두 진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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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키타의 내부. 그날은 일부 공간에서 가톨릭 성물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 길동무


감동이었다. 세비야 대성당 우러러봐야 하던 히랄다 탑의 히스토리가 메스키타에서는 또 그렇게 평온함으로 강인하게 새겨져 있었다. 껄껄 웃기보다는 처연하게 웃는 것이 더 어울리는 역사의 현장, 세네카의 명언, "인생보다 어려운 예술은 없다"가 엄연히 살아있는 곳. 이 명언을 연출이라도 하겠다는 듯 코르도바를 배경으로 싸우고 타협하며 역사를 써낸 영웅호걸들, 거기서 내가 적은 글자는 단 두 자 '감동'이었다.

여행은 조합이다. 퍼즐 맞추기다. '에이~' 할 사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여행은 조합하여 맞추는 데 묘미가 있다. 유럽 여행은 특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복잡한 왕들의 계보나 건축양식을 달달 외우는 것은 시험을 보기 위한 학창시절이나 즐기기 위한 여행 때나 효율이 별로다. 나는 여행기를 쓰면서 조차 그런 단어를 될 수 있으면 피하거나 최소한으로 줄이려 한다. 내 생각과 같다면 읽는 이들 또한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이자 손꼽히는 번역가인 이윤기 선생은 강조한다. "신화를 이해하려면 신화 속 고유명사부터 정복하라." 그렇다. 여행도 조합과 맞추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유명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번 길동무 이베리아 반도 여행에서 이해 대상 단어는 단연코 '무어인'이었다. 기독교 국가이니만큼 그 문화가 단연 압도적이고, 5세기 동안 로마에 합병된 땅이니 로마 문화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도 왜 하필 무어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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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본 메스키타의 종탑. 사이프러스 나무와 키와 미를 견주고 있다. ⓒ 길동무


잠시 무어인(Moor)이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사전의 해석을 요약하면 이렇다.

"무어인은 아라비아인, 베르베르인, 아프리카 흑인 혼혈로 구성 그러나 아랍적 요소가 가장 강함. 인종학적 구분이 아니라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던 아랍계 이슬람교도의 총칭. 스페인에 투우를 전한 것도 무어인. 이베리아 반도 지배 시기에는 그리스도교, 라틴문화와 교류 융합으로 이 기간에 수학, 천문학, 역학, 번역학 등의 발전을 가져왔음. 특히 스페인만의 독자적인 건축양식 무데하르 양식이 꽃핌." 

무어인의 특징은 한마디로 '유연성'이었다. 작금의 중동 사태를 보면서 느끼는 이슬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슬람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폭력을 일삼는 따위는 무어인들의 역사에는 없었다. 그들은 7세기경 성직자들의 부패와 패권싸움, 경제 불안, 페스트 만연에 의한 사회 혼란을 틈타 이베리아 반도를 수중에 넣었다.

무어인들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타 종교에 대해 상당한 관용을 베풀었다. 그들이 지배하는 땅에 사는 그리스도교나 유대인 세력도 인두세를 내기만 하면 더불어 살며 함께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길동무에게 그 점은 쉽게 이해되었다. 지금 사는 인도네시아,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 인도네시아에 많은 종교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카르타 중심지에는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핵심 모스크가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건립 100년을 헤아리는 자카르타 주교좌성당이 위용을 떨치며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종교 상징체는 큰 행사 때마다 서로의 주차장을 기꺼이 내주는 등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 거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는 대형 십자가를 세운 개신교 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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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항해의 원천인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만남을 기념하는 탑 ⓒ 길동무


"무어인들은 의료 기술이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 이베리아 땅이 옥토가 될 수 있게 한 관개 시설 또한 그들이 초석이었다고 합니다. 좋은 기온과 햇빛으로 거둬들이는 이베리아 반도의 특산물 농사에도 무어인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그들은 타협에 능했습니다. 살펴보면 점령지에서 그들이 포용 문화를 펼쳤음이 잘 드러납니다. 심지어 패망하여 물러설 때도 무어인만의 문화가 있었어요."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기간은 무려 8세기다. 초기 5세기를 로마, 그 후 서고트족 지배 3세기, 무어인 지배 이후가 스페인 문화로 대변되는 기독교 문화, 그러므로 나는 이베리아 반도 여행을 위한 퍼즐은 무어인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푸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튼 무어인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다. 메스키타가 준 감동이 큰 점도 있다. 그러나 이유가 분명하다. 코르도바를 느끼려면 또 이베리아 반도 여행을 계속하려면 계속해서 무어인과 즐겁게 동행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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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여왕이 머물렀던 알카사르 궁의 작은 문. 알카사르는 궁전을 뜻하는 아랍어 변형이다. 스페인에는 알카사르란 이름을 가진 유물이 많다. 세비야, 톨레도, 세고비아 등에도 있다. 과거 전략적 요충지요 대도시였음을 의미한다. 참고로 과거 코르도바 전성기에는 이슬람 모스크가 천 개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유일하게 메스키타만 남아있다. ⓒ 길동무


"스페인 사람들의 기질도 무어인 영향을 받았을까요? 이번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가 서양인들과 차별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복나눔씨의 질문이다. 복나눔씨가 진지해지면 상대방은 곤란해진다. 가이드 이 선생의 답은 자연이었다.

"제가 스페인에서 26년여를 살면서 느낀 것인데 이들의 기질은 비교적 깔끔합니다. 기본적인 예의만 지켜주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지요. 인종 차별을 한다는 것은 느끼지 못했어요. 아시듯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순정한 문화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정열적이고 낭만을 좋아한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요. 그것이 무어인의 영향이라 말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딱 하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리적 특성이 아닐까요?"

서양인의 동양인 차별, 이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동무가 여행 중 실감한 사실이기도 하다. 특히 아프리카 4개국 여행 중 흑인들이 드러내는 차별은 불쾌한 수준이었는데, 인종차별은 국가나 인종의 문화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향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무어인의 지배하던 코르도바는 1236년 카스티야의 왕 페르난도 3세에게 정복되어 그리스도교 국가인 스페인에 합병됩니다. 그 후 스페인의 국토 회복운동이 진행되면서 메스키타에 승리의 상징처럼 가톨릭 성당이 사원 중앙에 만들어지지요. 1523년입니다."

가이드 이 선생은 설명하면서도 연신 발걸음을 옮긴다. 시간이 됐다는 의미다. 볼 것 많고 느낄 것 많은 곳에서도 그의 역할은 가끔 악역이다. 그것이 그가 맡은 일이다. 그래야 진행이 된다. 그날은 마침 메스키타 내부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성물(聖物)전시였다. 무어인의 향기 물씬한 곳에 전시된 가톨릭 성물들, 나름 멋진 조화였다. 

그러나 자세히 관람할 시간은 짧았다. 중세 유럽의 대도시 코르도바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스페인 서해로 흐르며 콜럼버스 대 항해를 재촉한 과달키비르 강, 이 강을 가로지른 로마교, 특히 콜럼버스 항해의 원천인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가 처음 만났다는 알카사르 궁도 길동무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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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키비르 강을 가로지른 로마교, 멀리서 봐도 메시키타의 위용이 놀랍다. ⓒ 길동무


'풍요롭고 귀한 도시'라는 의미의 코르도바, 코르도바는 그라나다 무어인의 원조이자 알람브라 태동의 힘이다. 한때 세계 이슬람공동체 지도자 칼리파가 코르도바에 있음을 선언한 위용의 도시다. 여성 필경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곳이며, 필사본으로만 100만 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다니 그 문화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유럽과 동양 전역에서 찬사를 받았다는 보석과 가죽제품, 견직물 등의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고품질의 포도주, 훌륭한 말, 아름다운 여성 등으로 유명한 코르도바, 그 이야기를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다시 이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제 넘은 희망도 하나 남긴다. 메스키타 안에서 무슬림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협상 중이라 했다. 가톨릭과 무슬림이 한 공간 안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이 전무후무한 일이 과연 가능할까? "사람이 사는 곳엔 어디나 사랑의 희망이 싹튼다"고 외친 세네카의 명언이 생생한 곳 코르도바, 그러므로 멋진 결과로 나타날 것을 믿는다. 풍요롭고 귀한 코르도바, 이미 2천 년의 역사를 예약한 코르도바여!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안녕! 
덧붙이는 글 여행을 위해 ‘길동무’란 이름으로 뭉친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 다섯 부부의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 이야기입니다.
#코르도바 #세네카 #메스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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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2015년 5월 인사동에서 산을 주재로 개인전을 열고 17번째 책 <山情無限> 발간. 2016,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현재 자카르타 남쪽 보고르 산마을에 작은 서원을 일구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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