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하나예요"라고 했더니 "아들 낳아야겠네"

<여자다운 게 어딨어> 통해 본 나다운 것,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테다

등록 2016.11.30 11:52수정 2016.11.3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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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기준으로 보면 '빵점짜리' 며느리다. 요리도 못하고 청소도 부지런하게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애교가 많은 싹싹한 성격도 아니다. 예쁘게 꾸밀 줄도 몰라서 화장을 하고 가도 어머니에게 "세수는 하고 왔니?"라는 말을 듣는다.

어른들의 바람대로 아들이라도 낳았으면 좋으련만, 딸 하나인 우리에게 '아들'은 늘 숙제 같은 존재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내게 설거지는 차라리 위로가 된다. 설거지라도 해야 그나마 며느리로서의 위신이 서니 말이다. 딱히 뭘 잘 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시댁에 가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든다.


하긴,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손자며느리 다 모여서~'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에서조차 며느리는 아들, 손자 다음 맨 끝에 있는 처지다. 나만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우리 사회는 대부분 며느리에게 가정에 종속적일 것을 기대하고 강요한다.

오죽하면 힘들어하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는 귀 막고 3년, 눈 감고 3년, 입 닫고 3년'이라는 말을 할까. 그렇게 시부모님들은 대부분 고분고분하고 집안일 잘하고 여성스러운 며느리가 오기를 바란다.

"젠더라는 안무를 받은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다. 모든 것은 분장에 지나지 않는다." 122쪽

그런데 만약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기 위한 노력들이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지 못하고 가부장적 사회가 기대하는 어떤 여성으로서 분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고정관념으로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여지도 없이 연기를 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연기로 성립된 인간관계가 과연 얼마나 건전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설령, 그 '여성상'에 도달하여 칭찬을 받고 산다고 할지라도 완벽히 수동적이고 장식적으로 살고 있는 내 모습을 과연 스스로 용인할 수 있을까?


사회는 결혼한 남자에 비해 결혼한 여자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화려한 화장을 하면 경박한 여자로 보는가 하면, 어른들 앞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면 가정교육 못 받은 버릇없는 여자가 된다.

명절날 가사일이나 집안일 역시 남녀가 함께 분담할 수 있는 일임에도 여자에게 모든 일이 집중된다. 특히 며느리에게 바라는 기대감이나 노동의 강도는 거의 폭력에 가까울 정도다. 이로 인한 고부갈등, 시댁 스트레스 등 여러 심리적,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면 이 오래된 제도는 개선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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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다운 게 어딨어> ⓒ 창비

에머 오툴은 책 <여자다운게 어딨어>에서 사회적 권력이 강요하는 '여성성'을 뒤흔든다. 예를 들어, 청순함의 상징인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삭발한 대머리로 사는가 하면, 집안일이 모두 여성에게 전가된다는 현실에 맞서기위해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기도 한다.

여성의 체모는 역겹다는 통념에 저항하기 위해 길게 기른 겨드랑이 털을 방송에서 멋지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녀는 '남녀 간의 문화적 구분이 임의적'이라는 것을 밝히고 여자라서 안 되는 수많은 사회적 족쇄들을 풀고자 하였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동등하게 존중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예쁘장하고 순종적이고 '소녀다운' 앤처럼 외모나 요리, 청소 실력으로 남들의 호감을 사고 싶지 않았다. 조지는 자신의 힘과 용기, 지성으로써 호감을 사고 가치를 평가받기 원했다."  50쪽

여자도, 며느리도 단순히 순종적인 모습을 넘어 '자신의 힘과 용기, 지성'으로써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외모에 자신이 없어도, 요리 실력이 부족해도, 깔끔한 성격이 아니라도 그녀는 충분히 여성으로서 가치 있는 사람이다.

똑똑한 지성인일 수도 있고 리더십이 있을 수도 있고 하다못해 힘이 장사일 수도 있다. 한 명의 오롯한 사람으로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선에 서서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가부장적 체제에서 나온 오래된 틀로 인해 현대의 여성들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굴 것을 암암리에 강요하는 현실, 그런데 이 현실에 맞서고자 하는 철학적 움직임이 있다.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남녀 통념에 대한 구분을 없애고 새롭게 보고자하는 철학적 시도다.

세상을 남, 여, 이분법으로 나누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남·여, 흑·백, 진실과 허구처럼 둘로 쪼개어서는 세상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둘로 나누어보는 것은 사회적 합의와 구조화의 결과물일 뿐 실제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책에 나온 예로 살펴보면 남자와 여자도 두 개의 성으로 딱 쪼개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유방이 발달한 남성, 수염이 나는 여성 등 수많은 촘촘한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있다. 양성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성적 취향도 사람마다 다르게 타고난다.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새롭게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개성과 다양성, 자율성을 중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개성을 가진 사람들을 '남녀'라는 양 극단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서로에게 고통이다. 각종 편견과 고정관념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느라 남모르게 고통 받는 현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날씬한 몸매, 보드라운 피부, 매끄러운 다리를 사수하기 위해 매일매일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가락질 받는다고 생각하니까. 강박적이라고 할 만큼 큰 외모 스트레스는 영양실조, 거식증, 폭식증, 불임 등 건강문제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좀 더 '여자'답게 살려고 하지만 말고 좀 더 자연스럽게, 좀 더 나답게 살 순 없을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조금 뚱뚱하고 깔끔한 성격이 아니면 어떤가. 우리는 '여성'이 되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그 '여성성'조차 사회가 조작한 것이라면 굳이 고통 받으면서까지 거기에 끼워 맞출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으며 지금 이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들이다. 사람을 끄는 진정한 매력은 '여성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여성성'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아 존중감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시작일 것이다.

여자는 외모, 요리, 청소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내 가치는 내가 스스로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여쁜 얼굴은 아니지만 4년제 대학을 다닌 지성인이다. 나는 청소를 못하지만 글 쓰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 나는 요리는 화려하게 못하지만 책을 많이 읽었다. 나는 애교 있는 싹싹한 성격은 아니지만 용기 있는 삶을 살아왔다. 나는 시중드는 것은 잘 못하지만 리더십이 있다는 평을 듣는다. 겨드랑이에 털이 수북하지만 여전히 남편과 사이가 좋다.

며느리로서 사랑받지 못해도 괜찮다. 내가 며느리 역할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것이 부조리한 가부장적 체제를 확대하고 재생산하는데 그지없다면 굳이 앞으로 동조하지 않겠다. 내 자신에 떳떳하고 자신만 있다면 시댁 가서도 괜히 기죽지 않겠다.

근사하게 요리를 내어오지 못해도 괜찮다. 명절날 설거지가 너무 많이 쌓여 있다면 남편에게 같이 하자고 당당하게 요청할 것이다. 의논할 일이 생기면 나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내 의견을 정정당당하게 웃으며 이야기 할 것이다.

나는 나대로 산다. 나는 나답게 살 것이다. 나는 자유로운 내가 좋다.
덧붙이는 글 <나는 나대로 산다> 응모글

여자다운 게 어딨어 -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

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 2016


#여자다운게어딨어 #여성성 #페미니즘 #성별역할 #가사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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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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