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 '책'이라는 공통분모로 열리다

[리뷰] 영화 <마거릿과 함께 한 오후>를 보고

16.11.30 17:50최종업데이트16.11.3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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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님과 바람이 누가 더 힘이 센 지 내기를 하였다. 길을 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시합이었다. 바람이 먼저 기세 좋게 나섰다. 외투 그까짓 것 벗기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바람은 입김을 훅하고 불었다. 나그네는 찬바람이 불어오자 외투를 더 단단히 여밀 뿐이었다. 이때 여유 있게 나선 햇님,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자 나그네는 더워서 외투를 벗었다. 결국 내기에서 햇님이 이겼다는 이 이솝우화는 누군가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따뜻한 정(情)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아울러 그것이 강제적인 게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어야 함도 함께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을 지도할 때 자발성을 유도하기 보다는 강제적으로 시킬 때가 많다. 그것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성을 보장 받기도 한다. 하지만 시켜서 하는 것은 좋아서 하는 것보다 변화의 질과 양이 적을 수밖에 없다. 뭐든 억지로 하기 보다는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최고의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좋아서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놀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오래 갈 뿐만 아니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남게 된다. 프랑스 영화 '마거릿과 함께 한 오후'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님과 바람의 내기, 강제성보다는 자발성

영화 <마거릿과 함께 한 오후> 한 장면 ⓒ K.J.B. Production


덩치는 산만큼 크지만 아는 게 많지 않아 늘 멍청이로 놀림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제르맹 샤즈',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를 '멍청이 제르맹'으로 불렀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체 자랐다. 엄마는 제르맹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고 탓을 하며 아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 한 번도 누구의 관심을 받지 못한 체 자란 제르맹은 어른이 되어서도 존재감도 없이 자신을 비하하며 산다.

어찌 보면 제르맹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먹고 마시고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는 읽고 쓸 줄도 잘 못 해서 거의 문맹자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말할 줄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어휘들도 상스럽고 저속해서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마치 허접쓰레기로 뒤죽박죽 채워져 있는 것과 같았다.

제르맹은 단순한 일을 해서 하루하루 먹고 산다. 그가 가진 취미는 공원에 가서 비둘기와 노는 것이다. 그는 비둘기 한 마리 한 마리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름을 붙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게리트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이 변하기 시작한다.

마르게리트는 참새처럼 작고 가녀린 할머니다. 85세인 그녀는 정말이지 섬세하고 연약해서 벤치에 앉아있는 그녀의 두 발은 땅에 채 닿지도 않을 정도로 키가 작은 할머니다. 식물학 박사인 마르그리트는 제르맹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그녀는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 긍정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학식도 높고 교양도 깊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이 비둘기를 매개로 해서 말문을 트게 되고 호감을 느끼면서 우정을 쌓아간다.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이 만났다

마르게리트를 알기 전의 제르맹은 진정으로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다. 여자 친구가 있지만 그녀와의 관계도 단지 육체적인 것에 그칠 뿐 마음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단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부드러움과 애정, 신뢰와 같은 감정들을 말하는 것으로, 제르맹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그런 것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제르맹의 심성이 나빠서 그렇다기보다 자라면서 학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은 비둘기를 통해 친구가 된다. ⓒ K.J.B. Production


햇살 좋은 어느 날 오후, 공원으로 간 제르맹은 연못 옆 벤치에 앉아있는 할머니 한 분을 본다. 꽃무늬 원피스에 분홍색 카디건을 걸친 그 할머니는 자그마하고 아담해서 마치 한 마리 작은 참새 같았다. 제르맹은 늘 하듯이 비둘기를 바라보며 한 마리씩 숫자를 세었다.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 비둘기를 다 세는 건 생각보다 힘들다. 자꾸 틀리게 세는 제르맹을 보던 할머니가 "열아홉 마리"하면서 비둘기의 숫자를 말해준다. 이후 두 사람은 비둘기를 매개로 대화를 시작하게 되고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둘은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제르맹이 속한 세계는 교양과 거리가 멀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어머니는 제르맹이 자신의 인생에 걸림돌이라고 생각을 하고 마지못해 키웠다. 제르맹은 누구에게나 귀찮은 존재였고 삶에서 별로 이렇다 할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는 하찮은 사람이었다. 늘 비난과 힐책을 들으며 자랐던 아이, 번번이 거절만 당하며 자랐던 아이는 더 크게 자랄 수 없는 법이다. 제르맹이 그랬다. 그러나 마르게리트는 달랐다. 그녀는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자랐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다. 식물학 박사인 그녀가 속해 있는 곳은 따뜻하고 교양이 높은 세계였다.

책읽기는 듣기에서부터

마르거리트와 만나면 제르맹은 기분이 좋아진다. 그를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그녀와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연못 근처의 그 벤치는 마르게리트와 제르맹을 위해 있는 듯했다. 그곳은 어느 결에 학교가 되었고 교실이기도 했다.

마르게리트가 나지막한 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는 진료실을 나오다가 층계참에서 죽은 쥐 한 마리와 맞닥뜨렸다... 다락방에서, 지하실에서, 하수구에서 길게 줄을 지어 비틀거리며 기어 나온 쥐들은 빛을 보자 어지러운지 휘청거리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죽었다......" 마르게리트가 읽어주는 책을 제르맹은 상상하며 따라갔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라는 책을 그렇게 내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읽기는 듣기에서 출발한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게 하려면 우선 책을 읽어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책읽기는 듣기에서부터 시작한다.좋은 청자(聽者)는 곧 좋은 독자(讀者)이기도 한 것이다. 마르게리트가 읽어주는 책을 온 마음을 다해 따라가는 제르맹, 그는 정말이지 훌륭한 독자였다. 그는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책의 내용을 그렸고, 그것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것도 일종의 농사짓기와 같다. 제르맹이 황무지를 일궈 텃밭으로 바꾼 것처럼 마르게리트 역시 무관심 속에 자라 황무지나 매한가지였던 제르맹에게 교양의 씨를 뿌린다. 어린 시절에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자조 섞인 제르맹의 말을 들은 그녀는 '유년 시절에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아직 찾아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는 것과 같아요'라고 말해준다. 그녀는 좋은 면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쓸모없고 멍청한 놈이라고 놀림 받던 제르맹을 마르게리트는 아직 개발할게 많은 사람으로 인식을 전환시켜 준다. 버려진 땅 뙤기에 지나지 않았던 제르맹을 풍성한 텃밭으로 바꾸어 주었다.

마르게리트가 읽던 책을 제르맹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 책은 제르맹 생애 최초의 책이었다. 그것은 또한 풀기 어려운 숙제와도 같았다. 제르맹은 한동안 책을 밀쳐두고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마르게리트가 읽어준 부분을 찾아 더듬대며 따라 읽어 보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그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 세계는 '보물찾기'와도 같은 놀이였다.

책,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던 제르맹은 '책'을 통해 '교양'이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 K.J.B. Production


너무나도 판이한 세계의 두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책'이라는 공통의 세계를 가지게 되었다. 제르맹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보고 마르게리트는 사전을 또 선물로 준다. 베개만큼 크고 두꺼운 사전은 풀기 어려운 문제를 넘어 완전 '미궁'과도 같았다. 제르맹은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의 이름부터 우선 찾아본다. 여자 친구인 '아네트'는 '회향'이라는 단어와 비슷했고, 마르게리트는 꽃 이름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토마토'를 찾아본 제르맹은 실망한다. 사전에는 토마토가 '열매를 얻기 위해 기르는 한 해살이 식물'이라고만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텃밭에만 해도 얼마나 여러 종류의 토마토가 자라는데, 달랑 한 해살이 식물이라고만 하다니, 이것만큼은 사전보다 자신이 훨씬 더 아는 게 많다고 그는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제르맹은 이렇게 생각하는 힘도 은연중에 기르게 되었고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사전은 미궁이었지만 또 그것은 낯선 곳으로 떠나게 해주기도 했다. 모르는 단어를 하나 찾으면 그 단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단어들로 여행을 시켜주었다. 이제 제르맹은 더 이상 멍청이가 아니다. 그는 생각하고 또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모른 체 자랐던 제르맹의 머릿속은 '미개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서도 제대로 된 사랑과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제르맹은 읽고 쓸 줄도 잘 몰랐고 교양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런 그가 서툴지만 진지한 독서를 통해 사려 깊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해님과 바람의 힘겨루기 경주에서 해님이 이겼던 것은 자발성을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흥미를 느껴 스스로 찾아가는 공부는 비록 더디고 힘이 들지만 그 변화의 폭은 깊고도 넓다. 제르맹이 책을 통해 성장해가는 과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모든 교육은 애정과 우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잔잔하게 들려준다. 애정은 사람을 변화 시키고 정성스런 책 읽기는 사람의 머리와 마음을 가꾸어 준다는 것을 제르맹과 마르게리트를 통해 보여준다. 

마거릿과 함께 한 오후 제라르 드빠르디유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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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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