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좀 벗고 살고 싶다, 일년 내내

[공모 - 나는 나대로 산다] 사회가 정한 '여자다움' 훌훌 털어버렸다

등록 2016.12.01 09:35수정 2016.12.0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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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을 하는 게 사회생활의 '기본'이라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다. ⓒ pixabay


"쌤은 회사 생활의 기본도 모르세요? 어떻게 맨얼굴로 출근할 수 있습니까?"
"아니, 회사에 출근하는데 꼭 화장하고 출근하라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사회생활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봅니다."



15년 전, 복지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였다. 정규직 직원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 갑자기 직원은 내게 화장도 안 하고 어떻게 출근을 할 수가 있냐고 따졌다. 난 어안이 벙벙했다. 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화장을 했네, 안 했네를 문제 삼고 있었다. 심지어 그 직원은 여성이었다. 거기다 화장을 하는 게 사회생활의 '기본'이라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15년 전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여학생들은 대부분 옅게라도 화장을 하고 다녔다. 나는 언제나 스킨과 로션을 바르는 것을 끝으로 얼굴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12살 때 엄마와 헤어졌지만 엄마가 화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외출할 때면 엄마는 늘 화장대 앞에서 이것저것을 발랐다. 다 바르고 나면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을 때보다는 훨씬 여성스럽고 예뻐 보였다.

하지만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한번도 엄마처럼 화장하지 않았다. 나는 왜 남들이 다 하는 화장을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는데 뚜렷한 이유는 없다. 그냥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난, 워낙 원판이 좋으니까. 자고로 화장하는 사람들은 원판이 안 되니까, 좋은 원판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라며 말도 안 되는 자화자찬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약도 없는 심각한 '공주병' 증세였다.

내가 이런 공주병을 앓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그 말 때문이다. 어디를 가거나 누구를 만나도 빼놓지 않고 듣는 말, "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피부도 참 좋고요." 이 말은 40대 중반이 넘은 지금까지도 가끔 듣는다. 그러니 내가 중증의 '공주병'에 안 걸릴 리가 있나.

그 말을 가장 많이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그렇게 예쁜지 몰랐다. 남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는 그 말에 세뇌되어 갔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쁜 줄 알고 살았다. 머리가 나쁜 건지, 순진한 건지, 세상에 예쁘게 생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말을 믿었단 말인가.


어느 날, 남편이 남편 친구랑 술을 마시기로 한 자리에 합석했다.

"그 나이에 피부가 참 좋네요."

오랜만에 본 남편 친구가 말했다.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그러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예쁜지 안단 말이야."

헐. 남편은 벌써 알고 있었다, 내 속마음을. 남에게 하는 칭찬이나 듣기 좋은 말은 립서비스 이거나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것을 나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알았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내가 앓았던 그 중증의 공주병, 그건 내가 자초한 게 아니다. 난 억울했다. 여기서 더 나가면 파란 집에 사는 그 사람처럼 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세월이 흐르니 나이도 속일 수 없다. 한 해가 다르게 예의상 해주었던 그 말이 안 들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중증에서 못 벗어난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왜 예전처럼 자주 안 해줄까? 난 아직도 젊은데. 속상했다.

문득 거울을 보았다. 어느새 그 곱던 피부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뭇거뭇한 잡티가 보인다. 그래서 그토록 귀 따갑게 듣던 "피부가 참 곱네요"라는 말을 듣지 못했나 보다. 이만하면 중증의 공주병도 나아야 정상인데 낫기는커녕, 아직도 그 병은 나을 기미가 안 보인다.

"나, 얼굴에 생긴 잡티, 피부과에 가서 다 뺄 거야."

남편에게 말했다.

"보이지도 않는데 뭐가 있다고 그래? 그냥 놔둬. 나는 당신이 화장도 안 하고 생얼로 다니는 거, 그게 좋아서 결혼한 거야."

헐. 우리 집 남자는 취향도 특이하다. 남자들은 원래 화장하고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여자를 더 좋아한다던데 이상하다. 거기다 터프한 내 성격도 마음에 든다고 한다. 뭐, 제 눈에 안경이겠지만.

여성스러운? 남성스러운? 나는 그냥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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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97년, 결혼식 때 모습. 처음으로 화장이라는 것을 했다. (우) 작년에 지역아동센터에서 근무할 때의 모습이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가. ⓒ 문세경


머리는 항상 짧게 자르고, 화장을 안 하고, 치마보다는 바지를 즐겨 입는 나, 이게 나다. 겉으로 드러나는 '나'라는 정체성의 단면은 이게 다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많은 '나'가 있다.

사람을 좋아하고,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부당한 차별에 저항하고, 어려운 친구를 나몰라라 하지 않고 등등.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실제로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합해 놓은 것이 나다.

누구누구의 딸, 누구누구의 아내, 누구누구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내 인생의 5할쯤은 온전히 나를 위해 살고 싶고, 그렇게 할 것이다. 무슨 거창한 결심같이 보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이걸 실천하면서 살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남자들은 모른다. 알면 다행이고.

그렇다고 내가 남성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단지, 생물학적 차이가 있다는 걸 인정할 뿐이다.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이나, 더 평등하고 생산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여성스러움이나 남성스러움이 가져오는 명제의 '기준'은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만든다. 여자는 예뻐야 하고, 얌전해야 하고, 출근할 때는 화장해야 하며, 머리가 길어야 하고, 음식을 잘 만들어야 하고, 아이를 잘 돌봐야 하고, 남편 내조를 잘해야 하고, 술 먹으면 아이 낳는 데 지장 있고, 담배 피우면 피부에 안 좋고 등등.

한두 가지도 아니고, 저 많은 기준을 왜 하필이면 여자에게만 갖다 대는지 모르겠다. 문장 앞에 '여자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이어가지 못하는 말들, 나는 어쩌면 그것들에 저항(거창하게 페미니스트라고 하기엔 멀었고)하기 위해 일부러 더 반대 방향으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평범했을 말과 행동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제약이 가해질 때,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나는 한 번도 '내가 남자라면, 더 좋았을 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가끔 남자들이 생리문제를 해결할 때 앞 지퍼만 내리면 된다는 걸 생각하면 참 편하겠다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아니다, 있다. 명절에 시댁에 가서 여자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남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티브이만 보고 있을 때는 나도 남자로 태어나서 저렇게 편하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 있다. 아 참, 또 있다. 매일매일 밖에서 들어오면 "밥 줘"라는 말이 첫 대사인 남자들처럼 나도 남자로 태어나서 "밥 줘"라는 말 좀 실컷 해보고 싶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에서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가장 짧은 꼴찌 국가다. 둘이 좋아서 결혼했고, 아이 낳기로 합의해서 아이 낳았는데 왜 여자는 일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키우고 남편 밥까지 차려야 하는 걸까. 어쩌면 이게 내가 중증의 공주병에 걸려 허우적 거리며 산 세월들 보다 더 불가사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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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색의 브래지어들 ⓒ pixabay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사회가 만들어 낸 기득권 유지 수단이다. 요새는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한여름, 특히 올해처럼 더웠던 여름에 브래지어를 하고 지낸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여름에는 얇은 옷을 입기에 안할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하고 지냈지만, 겨울이 오면 나는 브래지어를 훌훌 벗어 던지고 산다.

언젠가 SNS에서 브래지어에 대해 재미있는 실험을 한 것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한 여성이 여름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시내를 활보하며 다녔다. 사람들의 이목이 얼마나 자신에게 쏠리는가를 봤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모두들 제 갈길만 가더라는 얘기다. 그 만큼 우리는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살고 있다.

한여름에는 옷을 입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덥다. 그런데 꽉끼는 브래지어라니,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를. 나는 이제 더이상 그 미친 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날씨도 추워졌다. 시내를 활보할 일은 없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이목이 신경쓰여 꼭 해야만 하는 걸로 알고 있던 브래지어가 사실은 여성의 가슴을 옥죄고, 실제로 건강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브래지어를 하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벗고 산다. 이제는 겨울 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벗었으면 좋겠다.

참,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 전에 친구한테 한 고백 아닌 고백을 말해야겠다.

"넌 특별히 화장도 안 하고 관리도 안 하는데 그렇게 피부가 좋은 비결이 뭐니?"

친구가 물었다.

"응, 그거 별거 아냐. 난 아침에만 세수하고 저녁엔 세수를 안 하거든. 왜긴 왜겠어? 귀찮아서지. 참! 한 가지 더 알려줄까? 난 담배도 하루에 반 갑은 피워. 거기다 술은 거의 매일 마시지. 그게 비결이야."

나는 이렇게 나대로 산다. 가끔은 '소녀 같다'라는 말도 듣는다. 이 나이에 소녀라는 말은 비록 '욕'일 지라도 말이다.
덧붙이는 글 나는 나대로 산다 기사 공모글 입니다.
#나는 나대로 #여성 #남성 #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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