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카메라 렌즈가 막아 준 베를린 소매치기

[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32] 사흘 동안 걷고 또 걸었던 런던 도보여행기 ③

등록 2016.12.07 12:36수정 2016.12.07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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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남자친구는
허리가 좋지 않아서
앉아있다 일어설 때면 언제나
에구구구구구구구구 소리를 내지요
나는 그 소리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요

에구구구 I love that sound
에구구구 I like that sound
에구구구 Wanna hear that sound
에구구구 Oh my god i love you


- 요조, '에구구구' 노랫말 중에서

전날 무리한 탓인지 어깨, 허리, 다리가 무겁고 아팠다. 어림잡아 27km 정도 걸었던 것 같다. 한라산 백록담 코스 중 가장 길다는 성판악을 다녀왔을 때가 4만 걸음이었다. 어제 하루 백록담을 올라갔다 내려온 것이다. 런던은 언덕 하나 없는 평지여서 걸을 때는 몰랐는데 자고 일어나니 '에구구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이렇게 두 발로 걸어 다닌 덕분에 런던을 구석구석 볼 수 있었다.

여행 다닌다고 하면 편하게 놀고먹으며 천하태평하게 지낼 것 같지만, 막상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다. 장기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여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휴식이 중요하다고 한다. 천천히 여유롭게 다니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자유롭게 다니는 배낭여행이라고 해도 일정은 있다. 특히나 유럽같이 물가가 비싼 곳에서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편하게 누워 하루쯤 쉬자는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가만히 누워있으면 하루 숙박비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비용 부담이 생겼다. 느긋하게 쉬어가며 다니는 것은 유럽 대륙을 떠나고 난 다음에나 고려해 볼 일이었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급했다. 오늘은 어제 보지 못한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 근위병 교대식을 오늘은 꼭 봐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후에는 베를린행 비행기도 타야 했다. 어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교대식 시간인 11시 30분에 맞춰서 도착했다가는 키 큰 외국인 뒤통수만 보게 될 수도 있었다. 짐을 싸고 아침을 먹는 내내 '에구구구' 하면서 뭉그적거리느라 시간이 많이 흘렀다.

켄싱턴 가든과 하이드 파크를 날다시피 달리는 중에 마주친 멋진 아저씨 ⓒ 한성은


영국은 차량이 좌측 통행을 하다보니 횡단보도에 친절하게 살펴야 할 방향을 안내하고 있었다. ⓒ 한성은


숙소에서 버킹엄 궁전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렸다. 숙소에 배낭을 맡겨놓고 어제는 우아하게 산책했던 캔싱턴 가든(Kensington Gardens)과 하이드 파크(Hyde Park)를 오늘은 날다시피 달렸다. 어제는 공원이 커서 좋았는데, 오늘은 달려도 달려도 끝없이 이어지는 공원이 야속했다. 그러는 사이에 무거웠던 다리는 어느새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걸어서 뭉친 다리는 달려서 푸는 것이었다.


열심히 달려서 버킹엄 궁전 앞에 도착한 시간은 11시였다. 하지만 그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 궁전 앞은 말할 것도 없고 궁전을 둘러싼 모든 인도에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화단과 공원 난간에도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다행히 키 큰 외국인들 사이에 키 작은 외국인들이 섞여 있어서 그들 틈에 섰더니 시야가 조금 확보됐다. 셀카봉에 핸드폰을 끼우고 높이 들어서 겨우 사진을 찍을 수는 있었다. 핸드폰이 나보다 더 좋은 자리에서 호강을 했다.

교대 시간이 되자 차량 통제가 시작됐고 곧이어 도로가 텅 비었다. 저 멀리서 군악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마침내 검은 말을 탄 근위병들이 걸어왔다. 그리고 내 앞으로 줄지어 지나갔다. 그게 다였다. 그렇게 멋지다고 하는 근위병 교대식은 그냥 제복을 입고 말을 탄 군인들이 사람들 앞으로 휙 지나가는 게 전부였다. 이걸 보자고 그렇게 달려왔었나 싶어서 허탈했다.

행사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인산인해였다. ⓒ 한성은


기대했던 근위병 교대식은 궁전 앞마당에서 진행됐고 밖에서는 근위병의 행진만 잠깐 볼 수 있었다. ⓒ 한성은


알고 보니 진짜 근위병 교대식은 궁전 앞마당에서 하는 것이었다. 교대식 영상을 봤지만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었다. 우리나라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이 훨씬 웅장하고 멋있었다. 이건 뭐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영국 여왕, 버킹엄 궁전 같은 이름들이 가진 힘이 관광객들을 이 자리로 모이게 하는 것이었다. 현대사회에서 관광 콘텐츠 개발은 경제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과업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도 하루에 한 번 조선 왕조의 전통 의례를 율곡로를 활용해 더욱 장엄하게 재현해 보인다면 어떨까 싶었다.

근위병 교대식이 끝나고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 시간 여유가 있었는데, 그 순간 온 우주의 기운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흔히 말하는 지름신의 목소리였다. 여행 내내 아이폰으로만 사진을 찍어왔는데 이래저래 아쉬울 때가 참 많았다. 여행 중 찍는 사진은 대부분이 풍경 사진이다. 그런데 아이폰 카메라의 좁은 화각으로는 원하는 장면을 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파노라마 촬영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왜곡도 심하고 노출 조절이 안 돼서 불편했다. 그런데 코번트 가든 앞에 있는 애플 스토어에서 아이폰을 위한 광각 렌즈를 팔고 있었다.

보통 '셀카 렌즈'라고 집게형 저가렌즈를 많이 쓰는데 그 제품은 광학 렌즈를 전문으로 만드는 독일 칼짜이즈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렌즈 가격이 너무 비싸서 지름신의 강림을 마음속 작은 굿판으로 물리쳤었는데 런던에서 시간 여유가 생기자 그분의 목소리가 다시 귀에 울렸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럴듯한 이유도 있었다. 다음 여정은 북유럽 캠핑카 투어인데 그 멋진 북유럽의 풍경을 제대로 담아보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 칼짜이즈 광각 렌즈가 장착된 아이폰이 들려있었다. 터무니없이 비쌌던 이 렌즈는 바로 며칠 후 제대로 된 사진을 찍기도 전에 자기 몫을 훌륭히 해냈다. 나도 몰랐던 소매치기 방지기능이 있었던 것이었다.

다가올 위험도 모른채 구름이 넘실대는 하늘을 보며 독일로 향했다. ⓒ 한성은


벨기에를 경유한 베를린행 비행기는 깜깜한 밤에 베를린 테겔 공항에 도착했다. 솅겐 조약과 관련하여 여권에 입국 도장을 받기 위해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숙소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숙소가 베를린 중앙역 근처라서 대중교통을 탔다. 안내 데스크에서 베를린 중앙역으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니 지도까지 챙겨주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대로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로 갈아타려는데 방향이 뭔가 이상했다. 나는 중앙역(Central Station)이라고 하면 당연히 기차역을 알려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내 데스크 직원은 버스들이 모이는 중앙역을 알려준 것이다. 그곳 이름도 중앙역이었으니 친절한 직원은 제대로 안내를 해준 것이었다.

인터넷도 안 되고 처음 보는 베를린의 지하철은 무시무시하게 복잡했다.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낯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돌이켜봐도 베를린 지하철은 지금까지 여행했던 어떤 도시보다 복잡했다. 시간도 늦어서 지하철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봤는데 대답이 제각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잡하게 환승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서로 짧은 영어로 설명하고 알아듣기에는 힘든 문제였다.

오후 11시 30분의 지하철 역사에는 그야말로 아무도 없었다. ⓒ 한성은


그때였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스윽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라서 주머니를 움켜쥐니 다른 사람의 손이 내 핸드폰을 잡고 있었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고,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느라 정신이 없던 순간에 소매치기가 다가온 것이었다. 그때 칼짜이즈 렌즈가 소매치기를 막아 주었다. 렌즈를 핸드폰에 장착하려면 전용 프레임을 핸드폰에 씌우고 커다란 렌즈를 맞춰 넣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부피가 커지고 꽤나 묵직했다. 소매치기의 손에 핸드폰이 주머니에서 스윽 빠져나가다가 렌즈 때문에 중간에 걸린 것이다.

소매치기는 여자였다. 옆에는 건장한 남자가 같이 서 있었다. 일단 손은 잡았고 소매치기는 막았다.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눈을 들어서 소매치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씨익 웃으며 그냥 돌아서 가버렸다. 렌즈가 장착된 채로는 들고 다니기도 불편하고 어디 주머니에 넣기도 불편했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소매치기도 훔쳐가지 못했던 것이다. 참으로 기특한 칼짜이즈 렌즈였다.

소매치기 방지 기능이 있는 비싼 핸드폰 렌즈 덕분에 핸드폰을 지킬 수 있었다. ⓒ 한성은


결국 친절한 대학생을 만나 지하철 막차와 막차를 연결하고, 막연하게 방향만 확인하고 시내버스를 타는 모험을 한 끝에 12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를린의 첫인상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아침 해가 뜨면 렌터카 사무실로 가서 캠핑카를 타고 베를린을 떠나야 했다. 배낭도 풀지 않고 호스텔 도미토리 침대에 누웠다. 언제나 그렇듯 국가 간 이동은 참 우여곡절이 많이 생긴다. 그래도 큰 사고 없이, 택시도 안 타고 잘 도착했으니 이것도 나중에는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어제부터 제대로 먹지 못해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근처 슈퍼마켓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플라톤이 말하던 이데아가 그곳에 있었다. 맥주의 나라 독일이니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 맥주 코너로 갔다. 듣던 대로 수십 가지의 맥주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500cc 맥주 한 캔이 30센트(400원)였다. 종류마다 가격이 달랐지만 1유로(1300원)면 가장 비싼 맥주를 살 수 있었다. EU의 결속력이 강화되고, 유로화를 단일 통화로 사용하게 되면서 독일이 가장 큰 혜택을 입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물가가 이 정도로 차이가 나는 줄은 몰랐다.

베를린 슈퍼마켓에서만큼은 먹고 싶은 것들을 실컷 먹어도 부담이 없었다. ⓒ 한성은


독일로 이민자가 몰리는 이유도 쉽게 이해가 됐다. 독일에도 내가 모르는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물가가 안정되어 있어서 적어도 먹는 문제 만큼은 다른 나라에 비해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맥주 뿐만 아니라 생수, 빵, 고기, 소시지 등등 식료품 가격이 정말 저렴했다. 몰타에서는 센트 동전이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웠었다. 어학원과 숙소가 번화가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물가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북유럽 캠핑카 여행의 시작을 독일로 잡은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전체 여정이 길어지는 문제가 있지만, 여행 경비 차이가 워낙 많이 났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 달 치 식료품을 모두 사서 차에 싣고 출발하겠다는 계획이긴 했지만, 독일 물가를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라 사실 걱정도 많이 했었다. 독일 물가가 예상보다 높다거나 북유럽 물가가 예상보다 낮다면 모든 계획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독일 물가는 예상보다 훨씬 낮았고, 북유럽 물가는 그동안 들었던 것과 비슷했다.

베를린의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하늘 색도 참 예뻤다. 어젯밤의 일들은 고소한 소시지와 시원한 맥주 한 캔에 밀려 잊어버렸다. 소시지 한 팩을 사서 그냥 먹고, 프라이팬에 구워서 먹고,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었다.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배부르게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솟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찾은 베를린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또다시 울컥하기도 했지만 괜찮았다. 오늘은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날이니까. 타박타박 걸으며 어젯밤 나를 외면했던 베를린 중앙역으로 가서 베를린 외곽에 있는 DRM 캠핑카 사무실로 가는 기차를 탔다.

전날 밤 사건의 발단인 베를린 중앙역(Hauptbahnhof) ⓒ 한성은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런던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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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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