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민주적 리더십, 우리 국회의원들은 알까

[서평] 리처드 애덤스가 쓴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등록 2016.12.05 11:59수정 2016.12.0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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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어른 책과 어린이 책이 엄격히 구분되는 나라가 있을까? 한국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에는 책 좀 읽으라는 잔소리에 시달리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 책 읽을 시간에 입시 공부를 하라는 잔소리를 듣게 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책을 읽으려면 그야말로 용기를 내야 한다.

나만 해도 고3이 되자 학교 도서실 출입을 금지당했다. 입시 공부에나 매진하라는 것이다. 요새는 책읽기 활동이 학교 수업의 일부이지만 내맘대로 읽는 책과 어른들이 준 도서 목록에서 골라 읽는 책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아이에게 책읽기란 입시 교육의 연장이고 어른에게는 업무의 연장이다.


서구의 어린이책 도서관에 가면 어린이책을 펴들고 아이들과 같이 읽는 어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본을 포함한 대부분의 외국에서 어린이책은 어른과 아이가 같이 읽는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진다. 그에 비해 한국의 어른들은 어린이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도서관에 가도 어른과 아이의 공간 자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어린이책 서가에 가면 아이들이 책 읽는 모습에 부모들이 흡족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책읽기란 입시 교육의 연장에 불과하니, 어서 어른이 되어 지긋지긋한 책읽기에서 해방되기를 얼마나 기다렸겠는가. 반면 자신이 지긋지긋해하던 책을 입 꾹 다물고 읽고 있으니 저놈은 나보단 출세할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지금 한국 부모들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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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 사계절

억지로 책을 읽는 아이들과 입시가 끝나자마자 책은 거들떠보지 않는 어른들 사이에서 아동문학은 늘 찬밥이다. 그러나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책들에서 아동문학은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1972년 리처드 애덤스가 쓴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아래 <워터십 다운>)는 한국에서 유명하지는 않지만 영국의 대표적인 아동문학 고전으로 꼽힌다.

<워터십 다운>은 열한 마리의 토끼들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집을 찾아가는 과정이 주된 줄거리다. 그러나 귀여운 토끼들의 여정은 전혀 서정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집을 떠난 토끼들은 추적과 위험, 갈등에 휩싸여 있으며 자주 생명을 걸어야만 한다.

<워터십 다운>에서는 동심을 추구하는 아동문학 작품에 대한 환상이 모두 부서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신 신화와 예언, 리더십과 팔로어십, 역할분담과 희생에 대한 이야기가 연속된다. 한 마디로 위험에 처한 집단이 살아남기 위한 이야기다.


샌들포드 마을에 사는 토끼 헤이즐은 예언능력이 있는 동생 파이버에게 빨리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헤이즐을 따라 전사 빅윅, 이야기꾼 댄더라이언, 지략가 블랙베리, 굴을 잘 파는 스트로베리, 어린 토끼 에이콘과 핍킨이 같이 가기로 한다. 헤이즐은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이제까지 신통한 예언 능력을 보여 온 파이버는 확신에 차서 하루라도 빨리 고향을 떠나자고 주장한다.

이 파이버라는 예언자 토끼는 그냥 예언을 읊어대는 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무녀들처럼 거품을 물고 바닥에 구르면서 트랜스 상태에 빠진다. 산토끼가 풀발에 뒹구는 모습이 떠올라 귀엽기 짝이 없지만 극중 분위기는 심각하다. 결국 헤이즐은 토끼 무리의 리더가 되어 새로운 둥지를 찾아간다.

이들 토끼들은 무단으로 마을을 빠져나간 책임을 묻는 추적 토끼들에게 쫓기는 한편 운트워크 장군(이라고 불리는 시커먼 토끼)이 독재를 하는 마을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육장 토끼들을 만나기도 한다. 천신만고 끝에 정착할 둥지를 찾지만 다시 떠나야 하는 고생을 하고 한밤중에 적에게 쫓기는 가운데 개천을 건너는 작전을 벌이기도 한다.

매번 구성원의 목숨을 거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헤이즐의 고민도 생생하게 묘사된다. 박진감 넘치는 상황 전개에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가도 문득 폴짝폴짝 뛰어 개천을 건너는 귀여운 토끼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마도 신의 눈에는 이 넓은 지구 위에서 온갖 고생을 하는 인간들도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작가 리처드 애덤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대에서 고립되어 온갖 고생을 하며 빠져나온 경험을 했다. 그때 같이 고립된 전우들을 이끌던 리더의 모습에서 주인공 토끼 헤이즐을 만들었다고 한다. 헤이즐은 결코 강한 리더가 아니었다. 앞장서서 나서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대신 헤이즐은 같이 도망치는 친구 토끼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정찰을 보낼 때, 개천을 건너야 할 때, 불안에 떠는 토끼들을 안심시킬 때 가장 적절한 토끼를 골라 일을 시켰다. 적임자를 찾을 수 없는 낯선 일에만 직접 나섰다. 그렇기에 헤이즐은 농장집에 숨어 들어갔다가 당당하게 인간이 모는 자동차를 타고 돌아오는 영광(?)을 얻게 된다.

이야기꾼 토끼 댄더라이언은 친구 토끼들이 불안에 빠질 때마다 토끼들만의 신화를 들려준다. 신화에 나오는 토끼 영웅 엘 어라이라는 지략을 동원해 동족을 지켜낸다. 용감한 엘 어라이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토끼들은 용기를 얻는다. 빅윅은 뛰어난 전사로, 헤이즐은 위험한 줄 알면서도 빅윅을 생사를 건 전투에 내보낸다. 빅윅도 전투가 자신의 역할이라는 걸 잘 알기에 한 번도 헤이즐에게 불평하지 않는다.

헤이즐은 머리를 써야 하는 장소에 지략이 뛰어난 블랙베리를 보낸다. 대신 블랙베리가 정신을 집중하다가 주변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싸움 잘 하는 에이콘을 딸려준다. 제일 어린 핍킨에게도 역할이 있다. 보호받으며 성장하는 것이 핍킨의 역할이다. 헤이즐은 어린 핍킨이 성장하고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때로 작전에 내보낸다. 어린 세대 없이 집단의 건강성이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 중 고립된 경험에 바탕을 둔 작품이기에 의외로 센 장면도 있다. 극중에서 토끼들이 물어뜯고 할퀴며 싸우거나 토끼굴이 무너지며 수십 마리 토끼들이 한꺼번에 죽기도 한다. 전쟁이 나면 멀쩡한 사람도 연약한 토끼처럼 죽어가기 일쑤이다. 그 위험을 피해 살아남으려면 믿음을 보장하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관계 없이는 역할 분담도 생겨나지 않는다. 집을 떠난 열한 마리 토끼들에게는 법과 제도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에 답답한 관습으로 통치되는 샌들포드 마을과 공포를 자아내는 법이 지배하는 에프라파 마을이 멸망하고, 재능에 따라 역할을 맡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헤이즐의 마을이 번성하게 되는 게 아닐까.

얼핏 보면 헤이즐은 잘 하는 게 없다. 일이 생길 때마다 헤이즐은 친구들을 보낼 뿐이다. 하지만 헤이즐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헤이즐은 언제나 혼자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다른 토끼들처럼 헤이즐도 공포를 느끼지만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친구들이 이성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헤이즐도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 옆에 있어주는 토끼는 사제 역할을 하는 예언자 파이버다. 정치의 핵심은 믿음이고, 그 믿음의 원류를 제공하는 것은 종교이다. 정치와 종교는 알 수 없는 미래에 확신을 갖고 행동할 수 있도록 믿음을 제공하는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최초의 정치인은 종교인이었고 현대 정치의 탄생은 곧 정교분리의 과정이었다. 단군도 사실 무당을 뜻하는 '당골'에서 나온 말이라는 설이 있다).

대부분의 사극 드라마나 의회를 다룬 소설은 정치와 종교가 원래 하나였고, 지금도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면을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아이들이나 읽는 책' <워터십 다운>은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중요하게 본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함께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공동체를 묶어주고 구성원의 희생을 기반으로 앞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믿음이 사라진 한국 사회의 정치인들은 <워터십 다운>의 토끼들만큼이라도 해내길 빈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1

리처드 애덤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사계절,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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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모험을 떠나다

#아동문학 #리더십 #워터십 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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