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퇴진 안개 정국 속을 아장아장 걷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등록 2016.12.01 09:43수정 2016.12.01 09:4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제 5차 촛불집회(전주)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 안준철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제 5차 촛불집회가 있던 그 다음 날이었다. 아침 산책을 나가려고 밖을 내다보니 안개가 자욱했다. 베란다 앞 주차장부터 동네 야산까지 시야가 온통 잿빛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문득 안개 정국이란 말이 떠올랐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일개의 사인에게 국정을 내맡긴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가 향후 어떻게 가닥을 잡아갈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서다.


눈에 보이는 안개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안개가 더 무섭다. 주권자인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이용하여 '선의'라는 국민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명분을 내세워 사적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던 대통령과 비선 실세들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그대로 거짓 안개 속에 묻혀 버렸다면 어찌할 뻔했는가.

a

제 5차 촛불집회(전주)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 안준철


거짓은 반성을 모른다. 그래서 여전히 안개 정국인 것이다. 자연의 안개는 금세 걷히지만 거짓말로 국민들의 눈을 가려온 무리들의 준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이미 엄청난 범죄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국회에 공을 떠넘기며 탄핵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꼼수 부리기만을 일삼고 있는 대통령에게 일말의 애국심이나 양심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에 능해졌기 때문이다. 국민들에게나 대통령 자신에게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의 시녀라는 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검찰과 정론직필과는 거리가 먼 타락한 보수 언론들도 지금은 촛불 민심이 대변하는 국민적 저항과 자신들의 목전의 이익에 부합하여 국민들과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언제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태도가 돌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사실 저들이 지금처럼만 제 역할을 충실히 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국가적 위기가 초래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a

제 5차 촛불집회(전주)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안준철


위기에 몰린 정부가 국정 교과서와 같은 예민한 사안을 전면으로 내세워 보수의 재집결을 꾀할 수도 있다. 박근혜의 실정으로 박정희 향수가 완전히 사라질 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세간에 떠도는 "딸이 아버지만 못하다"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아직도 박정희의 실체를 잘 모르는 국민들이 태반이다.

a

제 5차 촛불집회(전주)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 안준철


a

제 5차 촛불집회(전주) 내려와! 박근혜! ⓒ 안준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무고하고 선량한 국민들을 간첩으로 둔갑시켜 하나뿐인 고귀한 생명을 빼앗고 가족들을 불행의 나락으로 빠뜨린 엄연한 범죄자다. 최근에 불거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도 독재자의 딸이 아버지에게 배운 한 수가 아니겠는가. 물론 보수 언론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참으로 뼈아픈 것은 국가를 사유화하려는 저들의 추악한 욕망이 전방위적으로 발휘되고 확산되는 동안 이에 저항하는 개인과 사회적 방어력이 너무도 미약했다는 사실이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이화여대에 부정 입학한 후 대학 당국자들과 지도교수들로부터 받은 특혜가 대표적인 사례다.

a

제 5차 촛불집회(전주) 박근혜는 하야하라 ⓒ 안준철


a

제 5차 촛불집회(전주) 국민의 힘! 진실의 힘을 보여주자! 촛불민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 안준철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슬프고도 위험한 일이지만 자본과 권력의 힘은 이만큼이나 세다. 모처럼 전국에서 타오르고 있는 촛불 민심이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과 비선 실세들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의 표출을 넘어서서 존엄한 민주시민으로서의 건강한 사회적 자아를 발현하는 뜨겁디뜨거운 진실의 용광로가 되어야하는 이유다.  

고백하자면, 나는 솔직히 국내의 현실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교육의 정치적 예속에 조금 관심을 기울일 정도랄까? 나는 교직에 있는 동안에도 전교조 활동을 비교적 열심히 한 편이었지만 주 관심 대상은 내가 맡은 학급 반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자기 삶을 사랑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내가 쓴 글도 대부분 나와 직접 소통한 학교 아이들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이따금씩이나마 정치적인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세월호 참사 이후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월호 침몰 직후는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악어의 눈물을 흘릴 때도 아니었다. 그것이 악어의 눈물인지도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인간인 이상 나라를 책임 진 대통령으로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리라. 내가 맨 처음 분노를 느낀 시점은 선거 이후였다. 당시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압승을 하자 대통령은 태도를 돌변한다.

그 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한국을 방문하셨고, 그때 이방인인 그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보인 태도는 우리의 대통령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서 더 마음이 쓰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진 뒤에 여당 위원들이 보여준 비인간적인 태도는 박근혜의 아바타로서 충분히 예상할 만한 것이어서 큰 충격은 없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던 당일 박 대통령의 7시간의 행적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지만 설사 청와대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대통령은 직무유기의 책임을 모면하기는 어렵다. 국민들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중차대한 시간에 보고를 받은 것 외에 대통령으로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단죄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닌가.

a

산책길에 만난 풍경 물방울 다이아보다 더 이쁜 물방울 ⓒ 안준철


이런 어지러운 생각을 잠시 접고 아침 산책을 나섰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길이 드러났다. 나는 안개 속을 아장 아장 걸었다. 허공에 발을 내딛듯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안개 때문만은 아니었다. 환절기가 되면 어김없이 병이 도지는 내 부실한 허리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허리에 이상이 오기 직전의 내 건강 상태는 항상 최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허리 고생은 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몸을 함부로 쓰게 된 것이다. 과욕과 오만이 불러온 결과인 셈이다. 이런 어리석음이 해마다 반복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내가 동네 야산을 자주 찾은 것은 허리가 불편해진 뒤의 일이었다. 나는 아침과 오후 두 차례 산에 올라 흙길을 걸었다. 흙길을 걷는 이유는 흙의 부드러움을 몸에 초대하기 위해서다. 내 몸에서 부드러움(연골)이 빠져나간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그로 인해 많은 고생을 했지만 또한 그로 인해 얻는 것도 많았다. 부드러워야 산다는 것! 부드러워야 몸도 마음도 견딜 수 있다는 것! 모든 생명은 부드러움 속에서 움튼다. 부드러움 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성숙한 시민의식도 부드러움의 또 다른 표현인 비폭력과 평화의 정신 속에서 싹튼 것이 아니겠는가.   

차가 없는 나는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닌다. 차나 자건거를 타고 속도감을 즐기면서 씽씽 달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아직은 걷는 것이 좋다. 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광속의 시대에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속도로 걷다보면 문명의 속도가 조금은 늦추어질 거라는 믿음이 나에게 있다. 성장 신화의 끝은 이미 우리가 목도하는 바다. 하나뿐인 지구의 미래를 위해 원전을 없애야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열심히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한 나라의 이웃들을 위해 다 같이 조금씩 가난해지자는 슬로건은 머리에서만 맴돈다. 경쟁과 탐욕을 부추기는 물질주의가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주범임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오랫동안 길들여진 달콤한 관성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있다. 지금이라도 아장아장 진실을 더듬어서 찾아가는 것이다. 

a

산잭길에서 만난 풍경 아장아장 걷다가 힘들면 의자가에 앉아 쉬었다가 다시 걷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의자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 안준철


요즘도 나는 아장아장 걷는다. 허리가 아직도 온전하지 못한 탓이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으며 야트막한 동네 야산을 구석구석 탐색하며 쏘다니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도 큰 불만은 없을 것 같다. 아장아장 혹은 뒤뚱뒤뚱 산길을 걷다보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가가 된 기분이다. 생명을 다시 부여받은 느낌마저 든다. 아장아장 느린 걸음으로 걷다보면 내가 스치는 사물들도 속도를 늦추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내 더딘 눈길이 닿는 것들과 소통과 대화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지난 계절이 남긴 것들/마른 풀이며, 풀섶에서/열매를 내어주고/혼자 시드는 덩굴이며/바람에 어깨를 다치고 있는 풀잎들이 보인다/햇살이 찾아오지 않는 풀섶 그늘/추운 하늘에 맞닿은 산등성에 핀/꽃을 이운 억새가 보인다/꽃 속 환한 시절에도/사람들 눈길 끌지 못하던 들풀들/내 마음에도 겨울이 오고 있는지/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시효가 끝난 들판에서/하루 또 하루 미루다가/질 시간을 놓쳐버린/겨울 개망초
-졸시, <겨울 개망초>

a

산책길에 만난 풍경 안 보이는 것을이 보인다. 꽃을 이우고 혼자 시드는 겨울 개망초. ⓒ 안준철


아침 산책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묻는다. 최순실이든 박근혜든 돈이 수십억 있을 텐데 왜 더 큰 돈을 욕심을 내고 그러는 거냐고. 물론 아내가 몰라서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겐 권력이 돈이고 돈이 권력이라는 것을. 돈이 있어야 못 가진 자들에게 갑질도 할 수 있고 돈이 없으면 그 반대의 상황에 처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연과 일상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비경제적이고 비인간적이다. 그들의 돈과 권력에 대한 미망과 탐욕은 끝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만다. 그들은 사회의 적이기 전에 개인적으로도 불행하고 비루한 존재들이다. 제대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죽을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진실의 힘을 보여주는 것! 이 안개 정국에 위대한 민주 시민들이 할 일이다.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 #산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