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의 함석헌이 2016년 '촛불'에게 보내는 글

[단독 공개] 유신으로 무기정간 당한 <씨알의 소리> 12월호 권두언 전문... "참 나라가 열린다"

등록 2016.12.06 14:14수정 2016.12.0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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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말] 해제
나는 1972년 유신이 선포되던 때 오산중학교 교사로 교지 <다섯메> 편집지도를 맡고 있었다. 그해 <다섯메> 11호에 오산의 대선배로 종교인이시며, 사회운동가이신 함석헌 선생님을 원효로 자택으로 찾아뵙고 '오산과 나'라는 제목의 글을 싣고자 청탁 드렸다. 그때 두루마기를 입으신 백발의 함 선생은 내 손을 잡고 흔쾌히 청을 들어주셨다.

선생과 약속한 날 원효로 자택으로 찾아뵙자 매우 겸연쩍은 낯빛으로 미처 쓰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며칠 더 말미를 달라고 하셨다. 다시 약속한 날짜에 자택으로 찾아뵙자 함 선생은 아주 난감한 낯빛을 지우시더니 건넌방 겸 <씨알의 소리> 편집실로 가셨다. 곧 이 원고를 들고 나오셨다.

"박 교원, 이 원고는 <씨알의 소리> 12월호 권두언이요. 근데 유신으로 우리 잡지가 무기정간 당해 실을 수가 없소. 이거라도 가져가시오."

나는 그 옥고를 두 손으로 받아들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때는 유신 계엄령으로 혹독한 동토(凍土)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지도 교사 허남헌 선생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교지 게재 여부를 상의 드리자 우리 두 사람 선에서 전결로 실은 후 교장 선생님에게는 사후에 보고하자고 결론을 내리고 용감하게 실었던 글이다.

이런 뒷이야기가 나의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2부 교단일기(8)에 나가자 캐나다 토론토에 사시는 동포 정현필 선생이 이 기사를 보시고 그 전문을 보고 싶다고 하기에 스캔해 보냈다. 그러자 정 선생은 기존의 <함석헌 전집>에는 없는 옥고로 워드로 쳐 보내면서 내게 교정을 부탁해 다시 보내드린 바 있다.

나는 이 글을 다시 교정보면서 시공을 초월한 명문으로, 바로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금과옥조가 될 복음과 같은 말씀이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 그 전문을 공개하는 바이다.

"겨울은 좋다. 한마음 말없이 서로 비치는 가운데(一心不言相照中)에 참 나라가 열린다."


하늘에 계신 함석헌 선생이 바로 오늘 우리 백성들에게 새나라를 만들라는 복음의 말씀이 아닌가?

겨울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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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3월 원효로 자택에서 ⓒ 바보새 함석헌

겨울이 왔다.

겨울을 지내려면 안팎으로 겨울 준비를 해야 한다. 몸이 밖이요, 마음이 안이다.

자연에는 철이 있다. 그 항상 바뀌는 철 속에서 살아가는 데서 인간이 나왔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철이 들었다"는 말이 있고 영어에는 'Seasoned man'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에나 익숙한 지경에 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 년 사철 중 가장 어려운 것이 겨울이다. 해마다 한 번씩 지내고 이만큼 살아오는 겨울이건만 겨울은 어렵다. 어렵지만 무서워해서는 못 쓴다.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어려워할 줄은 알아야 한다.

남의 일한 결과를 뺏어 호강하고 사는 사람들은 난로와 증기로 덥힌 방안에 꽃과 향기에 싸여 겨울이 뭔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남의 어려움을 알고 그것을 내 어려움으로 여기는 것이 사람이다.

내 손발 가지고 실지로 일해서 사는 씨알에게는 자연의 법칙을 무시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겨울이 오면 어렵지, 어렵지 않은 것 아니다.

사람이 남의 일해 얻은 결과를 빼앗지 않고는 지나친 향락을 누릴 수는 없고, 향락을 하게 되면 인간성, 곧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마음은 죽어 버린다. 그 때문에 어려움이 도리어 사람을 속으로 자라게 한다.

겨울은 나쁜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속으로 자라는 때다. 그러기 때문에 무서워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서워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싫어해서는 못 쓴다. 그 어려운 겨울을 무서워함 없이, 싫어함 없이 받아들여 견딜 때, 겨울보다도 더 무섭고 봄 여름의 기후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이 우리 속에 일어난다. 그것이, 그 정신이 진화를 가져왔고 역사를 낳았다.

봄은 어찌 멀다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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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의 글 '한 마음 말없이 서로 비치는 가운데' ⓒ 박도


얼마나 좋은가. 닥쳐오는 얼음 바람 앞에 가슴을 헤쳐 내밀고 시원한 목청으로 셸리와 한 가지로.

겨울이 만일 온다면이야
봄은 어찌 멀다 하겠나!
- '서풍의 노래'

하고 불러 볼 때에? 추워도 좋다. 추우면 심장을 더 고동 시키면 그만이지, 심장이 멎으려면 정신으로 불을 지르지. 그만이냐? 겨울 와서 봄 여름의 얕은 아름다움이 없어지면 파리한 가지 사이로 높고 큰 하늘의 아름다움이 뵈지 않는가? 사지가 떨리고 머리가 씽하면 정신 바짝 차려서 내 참 나의 모습이 얼음산보다도 더 엄숙히 뚫려 뵈지 않는가?

木落水盡天涯高 (목락수진천애고)
廻然吾亦見眞吾 (회연오역견진오)
- 朱子의 '讀書樂四首'

잎 떨어지고 물 말라 하늘가 높아질 때
내 마음 환희 뚫려 내 참 나를 내가 본다.

주희(朱熹)의 글귀 아닌가?

마음 하나뿐이다. 마음 하나 닦아내자고 이 천지요, 이 추위 더위요, 이 인생 역사의 고난, 파란(波瀾)이다.

일본의 종이 됐을 때 그것을 어찌 좋다 했을 수 있었겠나? 그것은 우리 민족 살림의 한 겨울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죽지 않고 굽히지 않고 버티어 이기고 나면 그 정신이 꽃보다 더 아름답고 별보다 더 장엄했다. 보려는가?

萬事無求眞理外(만사무구진리외)
一心不言相照中(일심불언상조중)

모든 일에 참밖에 더 찾는 것 없고
한 마음 말없이 서로 비치는 가운데다.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의 글이다. 눈바람보다 더 사나운 일본의 압박 정치와 싸워 나아가는 심정을 그린 것이다. 무슨 법이 나빠서, 무슨 제도가 잘못 돼서 걱정이 아니다. 살아도 참, 죽어도 참, 참을 지키려는 사람에겐 그런 것이 다 문제 아니다.

내가 스스로 자유를 버리지 않는 한 내게는 자유를 뺏을 놈이 세상에 없고, 나 하나가 정의를 지키기만 하면 정의는 천하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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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신부와 함께(1970년대) ⓒ 바보새 함석헌


마음과 정신은 무한히 위대한 것이다

월남 선생이 이 글을 누구에게 써 주었느냐 하면, 어떤 일본 사람에게 써 주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월남 선생의 참이 일본제국주의를 이긴 것이다.

아니다. 월남이 참이 아니다. 참은 참의 참이다. 그러므로, 참을 찾으면 거기 내 편과 원수가 없다. 일본 군대가 아무리 많고 그 정치 힘이 아무리 강해도 한 사람의 일본 사람이 월남을 향해 제 참 마음을 연 사람 있다면 그 일본 군대와 정치는 패한 것이요, 거짓인 것이 들어났다. 이 글을 서로 써주고 써받는 월남과 그 일본 사람 사이에는 국경보다 더 크고 권력보다 더 강한 것이 있었다.

이제 와보면 무력(武力)과 정치는 작은 것이고 마음과 정신은 무한히 위대한 것임이 증거됐다. 월남이 어찌 한 월남만이요, 남강(南岡)이 어찌 한 남강만일까? 그것은 무한하고 영원한 참의 한 표현이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달은 한 달이어도 그 비치는 그림자는 억억 만만(億億萬萬)이다. 참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다 있는 참이다. 월남·남강에 비친 참의 달은 온 민족 전체 누구에게도 언제도 들어 있는 참이다. 그것을 어떻게 우리 속에도 살려 내느냐가 문제다.

一心不言相照中(일심불언상조중)이라. 언제 읆조려 봐도 두 줄 눈물 없이는, 떨리는 입술 아니고는 못 부르는 말이다.

일심(一心)이다. 한 마음이다. 네 마음이란 것은 마음이 아니요, 내 마음이란 것도 마음 아니다. 마음엔 네 것 내 것이 없다. 한 마음이 곧 큰마음, 곧 참 마음이다.

불언(不言)이다. 말 없다. 무서워 말을 못하는 것 아니라, 말로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을 움직이고 천지를 움직이고 총칼 하나 아니 쓰고 악을 이기는 참 말이다. 그 말 아닌 말로만 전체의 한 마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소리 없이 일어나는 바다 같은 것이다.

겨울이 오는 것은 꽃 아닌 참 꽃을 속에 피우란 말이요, 자유의 구속이 오는 것은 가짜 자유 아닌, 누구도 무엇으로도 못 막는 참 자유를 속에 얻으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조(相照), 서로 비쳐야 한다. 나는 네 속에 있고, 너는 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내 속에 있는 모든 너, 또 모든 너 속에 있는 나다. 곧 전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서로 비침으로만 살 수 있다. 말을 입으로 못하고 직접 마음으로 할 때 그것이 비침이다. 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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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회복국민선언대회’에 참석한 민주인사들이 함석헌 선생의 선언문 낭독을 경청하고 있다(1974. 11. 27.). ⓒ 바보새 함석헌


참 나라가 열린다

사람은 서로 비칠 줄 아는 것이다. 말하는 것이 사람이지만, 말 아니하고 말하는 것이 정말 더 높은 사람, 곧 정신의 사람이다.

동지 없이는 나라도 없고 인생도 없다. 종교도 철학도 예술도 없다.

서로 비치면 그 빛이 강해진다. 비쳐서 비쳐서 억만 사람을 비치게 될 때 참이다. 중(中)이다. 가운데다. 겉이 아니다. 물건이 아니다. 어디가 아니요, 언제가 아니다. 속이다. 중심이다. 극이다. 무엇이 있는 것 아니다. 그저 그것이다. 비치는 가운데다. 속알이다.

겨울이 왔다, 싸다니지 말고 들어가란 말이다.

바람이 분다. 입을 열어 지껄이지 말란 말이다.

어딜 들어가란 말인가? 지성소(至聖所)로.
(*지성소 : <기독교> 구약 시대에 성전)

왜 지껄이지 말란 말인가? 잠잠한 가운데야 하늘 말씀이 들리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 속에 지성소가 있다. 거기는 이방인은 못 들어간다.

누가 이방인인가? 참 나 아닌 것은 이방인이다.

그것이 옆에 있으면 참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도 침입해서는 아니 되는 내 마음의 지성소에 자유로 내 마음을 불살라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우주의 지성소에 통하는 길을 얻을 수 있다.

겨울은 좋다. 一心不言相照中(일심불언상조중)에 참 나라가 열린다.
덧붙이는 글 함석헌 선생의 글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이 글은 '바보새 함석헌(http://ssialsori.net/bbs/board.php?bo_table=0310&wr_id=85)'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진게재를 허락해 주신 정현필 선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함석헌 #박정희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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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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