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동상 앞 박정희 성금 기념비, 왜?

여수 자산공원 '임진란 호국 수군 위령탑'과 '성웅 이순신상'

등록 2016.12.13 12:48수정 2016.12.13 12:48
0
원고료로 응원
a

거북선 그림(거제 칠천량공원 게시물) ⓒ 칠천량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서 일본 침략군을 제압한 우리나라 주사(舟師, 해군)의 주력 부대는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영 수군이었다. 하지만 이순신 수군의 형편도 실제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난중일기> 1594년(선조 27) 1월 21일자는 전라좌수영 수군의 참혹한 고생을 단적으로 증언해준다.

이날 저녁, 녹도(소록도)만호 송여종은 이순신을 찾아와 "병들어 죽은 214명의 시체를 거두어서 묻었습니다." 하고 보고한다. 바로 다음날인 1월 22일에 송여종은 또 다시 "병들어 죽은 217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습니다." 하고 보고한다. 이 기사는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경우 말고도 이렇게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수군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육군보다 훨씬 힘들었던 조선 수군의 복무

본래부터 조선의 수군은 육군에 비해 훨씬 힘들게 복무하였다. 육군에 소속된 사람은 1년에 3개월씩 군역(軍役, 군대 복무)을 담당했지만 수군은 그 두 배인 6개월씩 근무해야 했다. 게다가 수군은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농사를 짓고, 배를 만들고, 성과 궁궐을 쌓는 노동에 동원되는 등 기타 잡역에도 무수히 끌려 다녔다.

결국 권력이나 돈 있는 집안 자제들이 수군에 징집되는 예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뇌물을 쓰고 뒷배를 움직여 아예 군대를 가지 않거나, 적어도 수군에 끌려가는 것은 면했다. 그저 힘없고 가난한 이들만 배를 탔고, 그래서 수군 복무를 피해 도망을 쳐버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조선 수군은 기본 병력도 채우지 못한 채 임진왜란을 맞이했다.'라고 기술한다.

a

여수 자산공원 정상에 서 있는 '성웅 이순신 상'. 사진 오른쪽 아래에 있는 검은색 비석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 성금 기념비' 빗돌이다. ⓒ 정만진


조선 수군이 엉성한 상태로 임진왜란을 맞게 된 데에는 조정의 잘못된 판단도 크게 한몫을 했다. 당시 집권 세력은 섬나라 일본의 군대는 바다 싸움에 능하고, 육전에는 상대적으로 약할 것으로 여겼다. 100년 내내 육지에서 자기들끼리 통일 전쟁을 해온 일본 육군의 대단한 전투력과 조총 등 신무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결정적 오판을 한 것이었다.

일본군이 쳐들어오면 땅으로 끌어올려서 격퇴해야 한다고 믿었던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 수군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는 명령을 수군절도사들에게 내려보낸다. 전쟁이 시작된 바로 그 날인 1592년(선조 25) 4월 14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해도(海道, 바다를 끼고 있는 도)의 주사를 없애고 장사(將士, 장수와 병사)들은 육지에 올라와 싸우고 지키도록 명했는데, 전라수사 이순신이 "수륙(水陸)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하고 반대, 호남의 주사만 홀로 온전히 남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직전 수군 해체를 결정하는 조선 조정

결국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은 일본이 쳐들어오자 스스로 배를 부수어 바다 속에 밀어넣고 땅으로 올라온다. 이순신을 제외하고 선조, 대신들, 원균, 박홍 등은 1430년(세종 12) 4월 14일에 이미 병조참의 박언신이 "육병(陸兵, 육군) 수십 만보다 병선(兵船, 전함) 몇 척이 적을 다스리는 데 낫다는 사실은 (정지, 최무선, 나서 등 고려의 장수들이 10여 척 배로 왜구 대군을 물리친) 경험이 거울이 되어줍니다." 하고 정확하게 짚어준 교훈조차 깡그리 잊었던 것이다.

a

해남 울돌목 관광지에 세워져 있는 철쇄 복원물. ⓒ 정만진


이순신(1545-1598)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조정의 수군 해체 명령을 따르지 않은 예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원칙주의자였던 이순신은 평소에도 옳지 않은 일이면 상관의 지시에 거부하기 일쑤여서 과거 합격 15년이 되도록 종6품 현감(읍장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중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우의정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추천으로 하루아침에 정3품 전라좌수사(해군 소장 수준)에 올랐다. 

읍장 수준이던 이순신, 하루아침에 소장 수준으로 승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즉시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아래 군사 시설과 군대 상태를 정비하는 한편, 장수와 병졸들의 복무 태도를 바로잡았다. <난중일기> 1592년 1월 16일자를 보면 이순신은 하급 관리인 아전들과 일개 의병 병사들까지도 엄중하게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날 기사 중에는 '방답(여수 돌산읍 군내리)의 병선을 관리하는 군관(軍官, 중간 장교)과 색리(色吏, 하급 관리)들이 배를 고치지 않았기에 곤장을 쳤다. (중략) 성 밑에 사는 토병(土兵, 의병) 박몽세가 쇄석(鎖石, 쇠사슬 박을 돌)을 뜨러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 피해를 끼쳤기에 곤장 80대를 쳤다.'라는 대목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이 기사는 이순신이 군율을 바로세우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도 말해주지만, 한편으로는 바다 속에 철쇠(鐵鎖, 쇠사슬)을 설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증언이 되기도 한다.

a

여수 선소 유적,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 장소이다. ⓒ 정만진


<신편 한국사>는 이를 두고 '이순신이 군비를 갖추는 데 가장 관심을 쏟은 것은 거북선 건조 문제와 수영 앞바다에 가설한 철쇄 장치였다.'면서 '철쇄 설치는 3월 하순경에 완료된 것으로 보이며, 거북선은 일본군의 침공 직전인 4월 11일에 돛 제작을 끝내고 다음날 선상에서 지자포와 현자포를 시험 발사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윽고 4월 15일, 경상우수사 원균에게서 입본의 전쟁 도발이 시작되었다는 급한 연락이 온다. 

그로부터 20일 후인 5월 4일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군이 경상도로 출동한다. 전쟁이 벌어지고 20일이나 지난 뒤에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이 출전을 했다는 것은, '이순신이 부임한 후 1년간에 걸쳐 전라좌수군은 적침에 대비한 방어 태세를 모두 완비한 셈(<신편 한국사>의 표현)'이라는 일반적 상식에 견줘볼 때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편 한국사>는 '전라좌수군의 출동이 지체된 까닭은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했고, 경상도의 바닷길에 어두웠으며, 도망병이 나오는 등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함부로 경상도 바다까지 출정할 수 없는 전라좌수영 전함

이순신은 경상도 출정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4월 15일에 이어 그 다음날인 4월 16일, 그리고 4월 18일 등등 계속해서 이순신에게 지원 출전을 요청했던 원균이 전라좌수군의 판옥선과 얼굴을 보는 일은 20일이 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뒷날 원균과 이순신 사이에 불화를 낳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이순신은 4월 30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세력이 이처럼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모두 해전으로 막아내지 못하고 적을 마음대로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부산과 동래의 연해안 여러 장수들이 배를 잘 정비하고 바다에서 가득 진을 벌여 엄격한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를 보아 전선을 병법대로 알맞게 진퇴하여 적을 육지에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장계를 보냈다.

이순신으로서는 수군 해체를 명령한 선조와 조정 대신들에게 본인의 의견을 솔직하게 밝힌 보고서였지만, 이 장계 역시 원균이 볼 때에는 자신의 무능을 준엄하게 꾸짖은 질타일 뿐이었다. 이순신보다 다섯 살 많고, 줄곧 벼슬도 더 높았던 원균(1540-1597)은 이 장계로 말미암아 또 다시 이순신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a

이순신이 경상도 바다로의 출정을 앞두고 회의를 했던 진해루 자리에 세워진 진남루의 현판 ⓒ 정만진


이순신이 경상도 바다로 출정을 결심하게 되는 데에는 부하 장수들의 뜨거운 전투 의욕이 큰 보탬이 되었다. 실제로 출동을 하는 5월 4일보다 불과 이틀 전인 5월 2일까지만 해도 이순신은 결심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녹도만호 정운, 방담첨사 이순신, 흥양현감 배흥립, 군관 송희립 등은 5월 1일 진해루(鎭海樓, 현재의 진남관 자리)에 모였을 때 죽기로 싸우겠다면서, 신속히 경상도로 나아가자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일부 장수들이 전라좌수영 관할이 아닌 경상도까지 나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자 송희립은 "영남도 우리 조선의 땅이오. 적을 치는 데 전라도와 경상도에 무슨 차이가 있겠소. 경상도에 쳐들어온 적의 선봉을 꺾으면 전라도는 자연스레 보전될 수 있을 것이오." 하고 역설했다.

특히 5월 3일 정운은 혼자 이순신을 찾아와 출정 직전 최후의 대화를 나누었다. 정운은 "전라우수군(이억기의 전라우수영 수군)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적이 이미 서울까지 박두했으니 분함을 이길 수 없소. (지금 출정을 미루다가) 기회를 놓치면 뒷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외다." 하면서 목소리를 드높였다. 이윽고 이순신은 내일(5월 4일) 새벽 출진을 명령했다. 다시 한번 짚어보건대, 이순신이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을 결심하는 데에는 부하 장수들의 굳건한 전투 의지가 결정적 뒷받침이 되었다.

전라좌수영 장수들의 의기, 이순신의 큰 힘 되었다

5월 4일,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주전함인 판옥선 24척과 작은 협선 15척, 그리고 포작선(고기잡이배) 46척을 이끌고 거제 앞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이틀 뒤인 5월 6일 경상우수사 원균의 판옥선 4척, 협선 2척과 한산도에서 만났고, 마침내 7일 아침 옥포에서 최초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26척의 일본 전함을 부수었고, 이어 합포와 적진포에서도 16척의 적선을 불살라 없앴다. 처음 맞붙은 옥포해전의 결과는 조선 수군에게 자신감을 안겨주었고, 일본 수군에게 낭패감을 안겨주어 향후 바다에서의 전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 이억기의 전라우수군까지 가세한 3도 연합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 해전에서 적선 70여 척을 불살랐다. 또 일본 수군 장수 래도통구(來島通久, 구르시마 미치히사) 등 일본군 3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아군의 피해는 13명 전사자, 34명 부상에 지나지 않았다. 

a

한산도에서 바라본 육지 방면의 바다 ⓒ 정만진


일본 수군의 연패 소식을 들은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은 협판안치(脇坂安治,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귀가융(九鬼嘉隆, 구키 요사다카), 가등희명(加藤嘉明, 가토 요시아키라) 등에게 하루 빨리 연합 부대를 이끌고 가서 조선 수군을 격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혼자 큰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에 젖은 협판안치가 7월 8일 혼자서 73척의 전함을 이끌고 거제도 견내량으로 달려왔다. 조선 수군은 크고 무거운 판옥선이 전투하기에 좋은 한산도 넓은 앞바다로 이들을 유인, 60여 척 침몰시켰다. 이어 안골포 해전에서 구귀가융과 가등가명의 수군까지 무참하게 격파, 일본 수군의 존재를 거의 없애버렸다.

이제 일본군은 서해 바다를 통해 군수품과 군대를 한양과 평양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량미를 조달하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도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한 채 발이 묶였다. 전쟁 전체의 흐름을 바꾼 한산도 승리, 그래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순신 스스로의 평가 "최고의 승리는 부산포 해전"

1592년 바다 싸움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는 부산포 해전이었다. 9월 1일과 2일의 이 해전에서도 아군은 적선을 100여 척이나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은 장계 '부산파왜병장(釜山破倭兵狀)'에서 스스로 부산포전투를 두고 "그 동안 4 차례 출전하여 10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장수와 군사들의 공로로 말하자면 이번 부산 싸움보다 더 큰 승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자평했다. 그만큼 부산포전투는 대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산포 전투에서 이순신은 녹도만호 정운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a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다대포의 정운 순의비. ⓒ 정만진


해가 바뀌어 1593년 2월, 조선 수군은 5차 출동을 하여 웅포에서 적과 싸웠다. 하지만 그 이후, 군대를 지원하여 평양성 탈환에는 큰 도움을 주었지만 더 이상 싸우려 들지 않는 명나라 때문에 조선 수군은 승리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 일본군이 중국땅 요동으로 난입할 가능성 없어졌다고 여긴 명은 조선 조정을 제쳐둔 채 일본 측이 제안한 강화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명은, 일본군이 4월 20일 한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할 때 조선군이 추격하려 하자 제독 이여송을 앞세워 가로막았고, 이순신이 1594년 2월 당항포의 적을 공격하여 30척가량의 일본 전함을 불태우는 등 조선군이 일본군을 치는 일이 발생했을 때에도 '공격 금지'의 패문(牌文, 나무에 새긴 명령문)을 내려 저지했다.

당시 일본군은 전쟁 초기 병력의 절반가량을 잃은 채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약 1년 전 부산에 상륙했을 때 1만8,00명이었던 소서행장의 1군은 이제 7천여 명밖에 남지 않았고, 가등청정의 2군 등도 대략 마찬가지였다. 20여 만 명을 헤아리던 일본군은 12만여명으로 크게 줄어 있었다. 적들은 전쟁 재개에 필요한 준비를 위해 시간이 필요했고, 명은 평양과 한양을 수복했으므로 참전의 명분과 성과에서 충분한 실익을 얻었다고 판단했으므로,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협상 자리에 앉았다.

전쟁도 아니고 휴전도, 종전도 아닌 시간들

전쟁도 아니고 휴전도 아니고 종전도 아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그 동안 일본군들은 남해안에 왜성을 쌓은 채 주둔하는 한편, 일부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머물렀다. 조선 수군도 밭을 갈아 군량미를 축적하고, 배를 수리하는 등 비전투적인 일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애당초 성립될 수 없는 협상이었다. 일본은 한양과 그 이남 땅을 자신들에게 양도할 것, 조선의 왕자 두 명을 인질로 보낼 것, 명 황제의 딸을 일본왕의 후처로 보낼 것, 일본 배의 명나라 왕래를 허락할 것 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협상은 깨어지고, 1597년 다시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정유재란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재란 직전 이순신 제거 작전에 돌입했고,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다. 1596년 12월 1일, 소서행장은 줄곧 강화를 반대해 온 가등청정이 1-2월에 바다를 건너온다면서, 수전에 능한 조선이 그를 부산 앞바다에서 죽이면 평화가 이룩될 것이라고 조선측에 알려왔다.   

a

칠천량 바다, 이순신에 이어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이곳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 포위, 매복 공격에 당해 100선에 이르는 배를 잃고 본인도 마침내 전사한다. ⓒ 정만진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을 명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부산과 남해안 일대에 주둔하는 기존의 일본군과,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는 재침략군 가운데에 들어갔다가는 포위되어 전멸을 면하지 못할 게 뻔했으므로 선조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몇 차례나 왕명을 내려도 이순신이 듣지 않고, 그 와중인 1월 12일과 13일에 가등청정은 이미 부산에 상륙하자 분노한 선조는 1월 23일 어전회의에서 "왜추(倭酋, 소서행장)가 모든 것을 손바닥 보이듯이 가르쳐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내지 못했다. 우리나라야말로 천하에 용렬한 나라다. 우리나라는 왜추보다도 못하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라고 부르짖은 뒤 2월 6일 이순신 체포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감옥에 갇혀 고문까지 당하는 등 고초를 겪다가 4월 1일 벼슬 없는 일반 군사 신분으로 풀려난다. 이른바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 된 것이다. 수군통제사는 원균이 맡았다. 하지만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 100여 척은 7월 16일 새벽, 칠천량 바다와 인근 섬을 뒤덮은 채 기습 공격을 해온 일본군에 당해 전멸해 버렸다.

칠천량에서 전멸하는 조선 수군

이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주요 장수들이 전투 중에 죽고, 원균 본인도 남해도에 내려 도망치던 중 일본 매복군에 걸려 비명횡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간신히 탈출시킨 12척의 판옥선이 이제 조선 수군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칠천량은 조선 수군 최대의 패전과 죽음이 서린 한 많은 바다로 우리 역사에 남게 되었다.  

a

임진란 호국 수군 위령탑(여수 자산공원) ⓒ 정만진


다시 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은 기적의 명량해전 대첩을 이루지만,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본인도 전사하고 만다. 정운, 이억기, 최호 등 장수들, 주로 칠천량에서 전몰한 엄청난 병사들에 이어 마침내 이순신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전국 수많은 곳에 이순신을 기리는 비가 세워지고, 사당이 건립되어 추모하고, 후대에는 동상도 만들어졌지만, 여수 자산공원에는 이순신 동상만이 아니라 '임진란 호국 수군 위령탑'이 있다. 여수항을 사이에 두고 돌산공원까지 해상 케이블카도 운영되므로, 이순신이 출정할 때마다 지나쳤던 바다도 구경할 겸 자산공원을 오른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숲길이 이어진다. 100m나 갔을까, 왼쪽으로 오르막 오솔길이 나타난다. 그 바로 위에 임진란호국수군위령탑이 있다. 탑 좌우로 큰 북이 있고, 병사들이 그 북소리에 맞춰 무기를 들고 뛰어나가는 모습이 탑신에 부조되어 있다. 탑은 판옥선을 형상화한 듯 오른쪽인 앞이 하늘로 치솟으며 뾰족하고, 전체적으로 물 위에 뜬 배처럼 느껴진다. 이 탑에 몇 만 수군 전몰 위령들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아득하다. 

a

여수 자산공원의 이순신 장군 동상, 명칭은 '성웅 이순신 상'이다. ⓒ 정만진

이순신 동상 앞에 있는 이상한 비석

위령탑에 참배를 마친 뒤 조금 더 올라가니 '성웅 이순신 상'이라는 이름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동상 앞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제목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 성금 기념비'이다. 며칠 전 1970년대에 중학생이었던 사람이 노래로 불러준 '10월 유신의 노래'가 떠오른다. 그는 동요 '산토끼'의 곡조를 차용한 '10월 유신의 노래'를 빨리 암기해서 부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매를 많이 맞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눈시울이 젖었다.

'10월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하듯이
남북통일 되고요
우리 몸에 알맞은
민주 제도 만들어
우리 모두 뭉쳐서
박대통령 밀어요
근대화에 목마른 자
바가지를 믿어요'

바가지를 믿어요? 노랫말 전체가 너무나 유치하여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특히 '바가지' 운운은 조금 가사가 이상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그의 기억력이 40년을 지탱하지 못해서 빚어진 결과일 듯하다. 그렇다고 정확한 가사를 찾아보는 노력까지 할 일은 아닌 듯 여겨져 그냥 동상만 바라본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성금 기념비'를 앞에 둔 이순신이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a

자산공원의 애기섬 학살 안내판 ⓒ 정만진


돌아서서 자산공원을 내려온다. 위령비 쪽이 아닌, 관리사무소 뒤 다목적전망대 방향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하늘 위로 케이블카가 오가고 있다. 문득 위령탑으로 가는 산책로의 바다쪽 길섶에 '애기섬 학살지'라는 이름의 작은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1949년 6월 5일부터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좌익 성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는데, 여수의 보도연맹원들을 거의가 여순사건 관련자들이었다. 보도연맹은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으로,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으나 통상 보도연맹으로 불렸다. 1949년 말까지 가입자는 전국적으로 30만 명에 달했으며, 결성 목적은 좌익 세력을 통제, 회유하려는 것이었다.

여수의 경우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원들을 여수경찰서 무덕관에 집결시킨 후에 경남 남해도 남단에 있는 애기섬으로 끌고 가 총살, 수장하였으며, 남면, 화정면, 삼산면의 섬 지역은 주변의 무인도나 바다에서 처형 후 수장하였다. 당시 특무대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애기섬 희생자는 약 120명 이내로 추정된다.'

임진란순국수군위령탑이 있는 곳이 저만큼 올려다 보인다. 숲에 가려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위령탑 위로는 10월 유신의 노래가 애기섬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 모든 것이 비극이다.

a

두술목에서 바라본 애기섬 방향의 풍경 ⓒ 정만진


#진주 #자산공원 #여수 #난중일기 #정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