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번째 사망자는 '나이든 사람 받아줘 고맙다'던 늦깎이 취업자

[추모글] 삼성반도체·LCD 78번째 사망자 황O순님을 추모하며

등록 2016.12.20 08:54수정 2016.12.20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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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도체 직업병으로 추정되는 노동자가 지난 8일 사망했습니다. 그와 함께 삼성을 상대로 산재 인정 및 피해보상 요구 활동을 벌인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 추모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말]

10월 7일 "삼성직업병 문제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반올림 농성 1주년 방진복 퍼포먼스&문화제" 도중. ⓒ 반올림


또 한 명의 삼성반도체 노동자가 세상을 떠났다. 2011. 11.부터 2013. 1.까지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일했던 황O순(52) 님이 지난 8일 새벽 한 시경, 악성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반올림에 제보된 삼성반도체·LCD 직업병 피해자 중 78번 째 사망이다.

반도체 공정이 자동화 될수록 화학물질 공급도 밀폐된 설비 안에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노동자들이 화학물질에 직접 노출되는 빈도는 줄어든다. 하지만 여전히 화학물질을 운반·관리하는 일, 설비를 유지보수(PM)하는 일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있어야 하고, 그 일은 보통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맡게 된다. 위험이 외주화 되는 것이다.

고인이 바로 그런 노동자였다. 고인은 한양CMS 소속으로 화성공장 15, 16라인의 CCSS룸에서 근무했다. 한양CMS는 삼성전자 협력업체인 한양ENG의 자회사인데, 지난 7일 삼성반도체 평택 공장에서 일어난 질식사고로 사망한 고 조성호님이 한양ENG 소속이었다.

또한 CCSS룸(Central Chemical Supply System. 화학물질 중앙 공급 시스템)은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취급하는 각종 화학물질들을 보관하고 공급하는 곳인데, 2013년에 두 차례 불산누출 사고가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그 사고로 사망했던 노동자도 협력업체 소속이었다.

고인은 CCSS룸 안의 화학물질 공급설비들을 작동하고 관리하는 일을 했다. 화학물질이 담긴 드럼통을 운반하여 공급 설비에 연결하는 일, 드럼통 위에 고인 화학물질을 닦아내는 일, 드럼통 안으로 들어간 연결 호스를 손을 넣어 빼내는 일, 창고 내부에 흘러나온 화학물질을 청소하는 일 등을 모두 고인이 담당했다.

고인은 업무 중 취급한 화학물질들의 이름 일부(LAL-500, WLC-T, 시너 등)를 기억할 뿐, 각 물질의 성분과 유해성은 알지 못했다. 고인이 근무 중에 회사로부터 받은 교육은 "장갑이랑 마스크를 끼라는게 전부"였다고 한다. 산재 신청 후 회사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해당CCSS룸에서 취급한 화학물질은 총 39종. 그 중 27종은 인체 유해성이 확인된 물질이고, 3종은 발암물질이며, 8종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입사 1년 만에 '피부T세포 림프종' 진단


강남역 8번 출구 반올림 농성장 앞에 '직업병 사망자 76명을 추모한다'는 문구가 세워져 있다. ⓒ 반올림


고인은 비교적 늦은 나이(40대 후반)에 인터넷 구인광고를 보고 입사했다. 잦은 사업 실패로 생계가 막막하던 차에, 나이든 사람을 받아주어 반가웠다고 했다. 하지만 입사한 지 1년 3개월 만에 '피부T세포 림프종' 진단을 받고 일을 그만두었다. 올해 10월에는 추가로 '말초성 T세포 림프종'진단을 받았고, 결국 그 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고인은 2년 2개월 전(2014. 10.) 반올림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했다. 하지만 공단 측은 고인의 사건에 대해 지금까지도 '처리중'이라는 답변만 내놓고 있다.

고인은 삼성전자가 작년 9월에 한시적으로 실시한 보상절차에는 신청조차 할 수 없었다. 삼성이 보상신청 자격을 "2011. 1. 1. 이전 입사자"로 못박았기 때문이다. 반올림은 이러한 보상절차와 기준에 항의하며 지난해 10월부터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지만, 삼성은 지금까지 기존 입장을 고수하며 대화도 거부하고 있다.

결국 정부와 회사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고인은 세상을 떠났다. 질병에 따른 경제적·정신적 고통은 또다시 고스란히 유족들의 몫이 되었다.

고인의 생전 인터뷰 기사(<미디어오늘> 2014. 11. 19.자, "위험하니까 삼성 직원들은 안했겠죠")에 기록된 말들을 옮겨 적으며, 우리의 슬픔과 분노를 대신한다.

"제가 증명을 못해서 산재를 인정 못받을 수는 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반도체 공장 때문인 거 같아요. 이렇게 위험한 일이니까 삼성 직원들은 직접 안 하겠죠. 나이든 사람을 쓴 이유도 그런 거 같아요. 어렵고 위험해도 못 그만두니까요."

"저는 삼성이 공장문 닫아야 한다 그런게 아니에요. 저는 굉장히 열심히 일했고 그런데 얻은게 암이에요. 하청업체 일이라고 미룰게 아니라 이 업무가 없으면 반도체 공장이 안 돌아가거든요. 삼성이 책임을 져야죠. 아픈 사람이 저말고도 많잖아요."

삼성은 고인의 죽음 앞에 무릎꿇고 사죄하라.
삼성은 독단적인 보상기준을 철회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보상 절차를 마련하라.
근로복지공단은 고인의 죽음을 신속하게 산업재해로 인정하라.
삼성은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반올림 #삼성 #반도체 #산업재해
댓글

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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