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종 사상'이라던 유교, 중국에서 다시 뜨는 이유

[중국문화기행 ⑤] 수차례 공격에도 살아남은 공자 사상

등록 2016.12.24 17:28수정 2016.12.2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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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살던 노(魯)나라 시대 대부(신하)들은 제후(왕)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들은 제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는 대부(신하)를 견제하기 위해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는 말을 <논어>에 남겼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이런 말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공자는 사회 안정을 위해, 사회 구성원은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그것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도로 말했을지 몰라도, 후세 통치자와 통치자 주변 일부 학자는 사람은 이미 정해진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넘을 수 없다고 해석해 봉건사회 통치이념으로 이용했습니다.

2000년 이상 중국 통치자들은 공자의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신분이 정해져 있다는 이론으로 교육해 사회를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신분 상승을 위한 경쟁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가 더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일부 학자들은 공자의 사상으로는 사회가 발전하기는커녕 정체돼, 결국은 중국이 망하고 말 거라는 생각에서 공자의 사상을 수 차례 공격합니다. 아래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공자의 사상이 공격받았던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중국사람이 존경하는 진시황제

한국에서 진시황제는 인기가 없습니다. 한국 사람은 진시황제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아방궁'을 떠올리고 유흥과 사치를 일삼은 황제로 기억합니다. 특히 1980, 1990년대 유흥주점이 진시황제나 아방궁을 술집 상호로 사용하는 바람에 더더욱 진시황제의 이미지가 나빠졌습니다.


중국 사람은 진시황제를 존경합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550년 동안 전쟁을 치렀던 시기입니다. 550년 동안의 전쟁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 바로 진시황제입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일반 백성들은 진시황제가 고마웠을 겁니다. 전쟁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병사의 부모와 아내는 아들과 남편이 살아서 집에 돌아온다는 사실에, 전쟁을 끝내준 진시황제를 무척 존경했을 겁니다.

오늘날의 중국 사람도 역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진시황제라고 평가합니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중국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특히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통일 전 전국시대 7개 나라에서 각기 달랐던 중국 문자를 하나의 문자로 통합했기 때문에 지금의 중국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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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7개 나라 문자를 하나로 통일한 진시황제. ⓒ Baidu


진시황제는 문자 외에 사상도 통합했습니다.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하기 100년 전부터 법가사상을 국가 기본이념으로 삼아 나라를 발전시키고 힘을 길렀습니다. 그래서 통일 진나라는 당연히 법가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정했지요.

그런데 통일 후에는 진나라의 지방정부가 됐지만, 통일 전에는 독립 국가였던 지역의 학자들이 유학과 도가 사상을 주장하자 농사와 의료 관련 외의 모든 책을 불태워 버리고 유학과 도가 사상 학자들을 죽입니다. 이 사건을 역사 교과서에서는 분서갱유(焚書坑儒)(기원전 221년)라고 기록합니다.

분서갱유가 있고 나서 한나라 한무제가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자, 이번에는 다시 국가 차원에서 유교 책을 찾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미 불타 버린 유교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지요.

진시황제가 유교 책을 불태우라고 명령하자, 공자의 고향 노(魯) 지역에 사는'문통군'이라는 사람이 유교 책을 과거 공자가 살았던 집 담장에 몰래 숨기고 산으로 도망칩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370년이 지나, 노(魯) 지방정부의 '공왕'이 공자가 살았던 집을 정리하다가 담장에서 유교 책을 발견합니다. 이때 발견된 책이 <논어> <효경> <상서> 등입니다.

곡부시에 있는 공자 기념관 공묘에 바로 이 노벽이 있습니다. 중국답게 벽을 빨간색으로 칠하고, 벽 앞 비석에도 '노비'라는 빨간색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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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에 있는 노비 ⓒ 김기동


식인종 사상으로 공격받은 유교

루쉰(1881~1936)은 소설 <아Q정전>으로 유명합니다. 이밖에 루쉰은 <광인일기>로도 유명세를 떨치죠. 두 소설 모두 30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짧은 소설이니, 관심 있으신 분은 한번 필독해 보세요.

루쉰이 살았던 시기는 중국이 서구세계의 침략 앞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지던 시대입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자 중국 사람들은 중국의 패망 이유를 봉건시대 통치이념이었던 공자 사상과 신유학(한대유학, 이학(한국 성리학)에서 찾았습니다.

현대 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신유학을 만들어 보려던 시도도 있었지만, 이 시기에 2000년간 중국을 통치했던 유교 사상이 마침내 무너집니다. 루쉰의 <아Q정전>이 중국 사람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성 글이라면, <광인일기>는 중국 유교 사상에 대한 비판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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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광인일기> 표지


<광인일기>에서 유교 사상은 정신적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식인종으로 표현되는 중국사상은 중국의 낡은 사회 그중에서도 사회 계급 구조와 가족제도를 지탱하는 유교의 도덕적 위선을 말합니다.

루쉰은 <광인일기>에서 중국 유교 책 글자 행간에는 '식인(食人)'이라는 두 글자가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인종 유교 사상이 중국 사람의 생각을 잡아먹어서 중국사회가 헤어날 길 없는 구조적 병폐에 갇힌 암흑세계가 됐다면서 전통 사상 신유학을 비판합니다.

공묘 비석이 깨지다

저와 친한 중국 친구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직업이 공무원이고 아는 것도 많습니다. 처음에는 학교도 못 다닐 만큼 가난했는데, 본인 스스로 노력해서 지금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주위에 초등학교를 못 다닌 중국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다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중국에서 문화혁명(1966~1976)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은 초등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문화혁명은 모택동이 다시 권력을 획득하려고 일으킨 사상투쟁입니다. 모택동은 지식인이 관료화돼 사회에 문제가 발생한다면서 지식인을 비판했습니다. 문화혁명 기간 모든 교육기관을 없애 버렸죠. 그래서 이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저의 중국 친구들은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겁니다.

문화혁명을 일으킨 모택동은 공산주의 사상을 제외한 기존의 사상과 제도를 모두 부정했는데, 당연히 공자의 사상과 유교도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기존 사상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이런 사상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파괴했습니다.

문화혁명 시기 행동대원이었던 홍위병은 중국 곡부시에 있는 공자 기념관 공묘에 있는 건물과 비석을 파괴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목재로 지은 건물은 보수해서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됐지만, 돌로 만든 비석은 아무리 보수해도 본 모습으로 온전히 되돌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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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에 있는 비석. 왼쪽 비석은 철사로 엮어 놓았고, 오른쪽 비석은 깨진 돌덩이를 붙였다 ⓒ 김기동


공묘에 있는 비석은 대부분 깨졌습니다. 그래서 현재 공묘에서 볼 수 있는 비석은 깨진 돌덩이를 다시 붙여놓은 겁니다. 깨진 돌덩이가 잘 붙지 않으면, 철사로 묶어 놓기도 했습니다.

문화혁명 기간 파손된 공자의 상징 건물이나 돌덩이는 보수하여 부족하나마 본래의 모습을 찾았지만, 한번 훼손된 공자 사상에 기초한 사회 도덕은 쉽게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중국 공자학당에서는 효도를 가르칩니다

중국에서 공자학당은 공자학원이라고도 부릅니다. 영문 명칭은 'Confucius Institute'인데 한국어로 해석하면 '공자교육기관'입니다. 한국 사람은 '공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유학을 떠올리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공자학당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자신의 유학 사상을 알리려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중국 공자학당 누리집을 살펴보면 공자의 사상이나 유학에 관한 내용은 어느 부분에도 없습니다. 공자학당의 업무는 중국어의 보급과 중국어 보급을 위한 필요사항으로 한정돼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장삿속 밝은 중국사람이 공자학당이라는 중국 브랜드를 또 하나 만든 거로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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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자학당을 관리하는 중국 곡부시 공자연구소에 있는 공자 동상 ⓒ 김기동


그런데 중국 정부가 다른 나라에 중국어를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공자학당을 세웠다면, 중국에는 공자학당을 만들 필요가 없을 텐데, 이상하게 중국 국내 각 지역에도 공자학당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공자학당뿐만 아니라, 학교 도서관, 공공 건물, 심지어 호텔 입구에도 공자 동상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이유로 중국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공자를 띄우는지 궁금했습니다.

다행히 몇 달 전 공자 고향 곡부시에 있는 '공자연구소' '공자학당본부 체험학교'에서 중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중국예악대회 공자대제전" 1박 2일 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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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곡부시에 있는 '공자연구소 공자학당본부 체험학교' 입구. ⓒ 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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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학당본부 체험학교'에 참석해 공묘 대성전 앞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 김기동


중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공자학당 프로그램은 곡부시 공자 기념물 공묘, 공부, 공림 방문과 '공자학당본부 체험학교'에서 진행하는 공자 사상 토론회로 구성됩니다.

공자학당에서 중국 대학생들에서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지 궁금한 저도 참석해봤습니다. 공자 사상 토론회의 주제는 '도덕성을 회복하여 부모님에게 효도하자'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문화혁명 기간 자식이 부모의 사상이 불온하다고 고발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실제로 자식의 고발 때문에, 부모가 고초를 겪은 경우는 흔했고, 심하면 부모가 죽기도 했습니다. 가족 간에도 서로 고발하는 세상에서 친척이나 친구를 밀고하는 건 꺼릴 게 없었겠지요. 중국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이런 불신의 시대는 10년간이나 지속했습니다. 자기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 누가 공자의 '인(仁)'을 이야기한다면 정신 나간 놈 취급 받았을 겁니다.

아마도 중국 정부는 이렇게 무너진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 공자를 다시 불러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선 가장 기본적인 부모 효도를 교육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 같고요. 물론 도덕성 회복을 위해 다시 필요해진 공자 사상이 후에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국 #중국문화 #중국여행 #유교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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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사람이야기>,<중국인의 탈무드 증광현문>이 있고, 논문으로 <중국 산동성 중부 도시 한국 관광객 유치 활성화 연구>가 있다.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행위방식의 근저에 있는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중국인과 대화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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