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초등교사가 뽑은 '올해의 그림책' 다섯 권

아이들과 함께 읽어 좋았던 <거짓말>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 외

등록 2016.12.22 19:24수정 2016.12.2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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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이들과 참 많은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가볍게 훑어보기도 하고, 찐하게 토론하면서 읽은 책도 있습니다. 줄글로 된 책이라면 미간부터 찌푸리는 아이도 그림책은 좋아합니다. 시간이 없어 두꺼운 책을 못 읽겠다는 분들께 그림책은 훌륭한 대안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주된 독자인 아이들의 인내심을 고려해서인지 두께가 착합니다. 솔깃하시지요? 자녀들 머리맡에서 읽어주려다가 부모님께서 그림책 마니아가 되신 경우도 꽤 봤습니다.

겨울 방학 계획표 짜는 시즌을 맞이하여 다시 읽어봐도 좋을 '올해의 그림책' 다섯 권을 추려 보고자 합니다. 선정 기준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와 관계가 없고요, 우리 반 아이들과 같이 읽었을 때 뜻깊은 문답이 오갔던 책들입니다. 제 말만 듣고 덜컥 구입하셨다가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책은 술이랑 비슷해서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함께 하는 사람에 따라 맛이 전혀 다릅니다. 제가 시음용 와인처럼 짤막하게 교실에서 나왔던 그림책 썰을 풀어볼 테니 구미가 당기시는 분은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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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 씨드북


첫 번째 책은 <거짓말>입니다. 작가 카트린 그리브는 '거짓말할 줄 모르는 재능을 가진 모든 이'를 위해서 책을 지었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재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네! 결단코 그렇습니다. 우리 반 찬균이는 거짓말을 하려고 하면 눈동자가 둥그레지고 코 끝이 씰룩거립니다. 그리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간지러운 듯 코를 긁지요.

아이들은 저마다 거짓말 동작이 있습니다. "선생님, 저 지금부터 거짓말해요"라고 예비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거짓말할 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목소리 하나 움찔 안 하는 어른들도 옛날에는 가지고 있었던 재능이지요. 이 재능이 좋은 대학 가고, 출세길을 보장해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영혼의 안식을 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제가 꼭 고해성사받는 신부님 같군요. 바로 이야기로 가봅시다.

어느 평범한 날 소녀의 입에서 거짓말이 툭 튀어나옵니다. 처음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거짓말은 새빨간 점이 되어 아이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외면하면 커져있고, 꺼지라고 하면 쫓아오면서 빨간 거짓말은 자꾸 많아집니다. 어느새 방에 꽉 차 버린 붉은색 점들이 소녀를 압박합니다. 주인공은 과연 거짓말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무심코 한 거짓말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설쳐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른이 되어 버린 지금, 내가 적색 색맹에 걸린 건 아닐까 자괴감이 들게 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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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 ⓒ 사계절출판사


다음으로 소개드릴 책은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입니다. 이건 엄마에 관한 책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이후로는 줄곧 집에서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엄마란 말만 들어도 뭉클해집니다. 전화도 자주 안 하면서 생각만 많은 불효자이지요. 제목만 봤을 땐 무슨 내용인지 몰랐습니다. 웬 할머니가 지팡이를 지고 가는 표지와 다정 씨라니 좀 특이한 조합이잖아요? 그래서 우연히 펼쳤는데 손에서 놓을 수가 없게 된 책입니다.

책은 윤석남 작가가 그린 32점의 드로잉과 에세이가 차례로 담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들은 가볍지 않고 울림이 있어요. 제가 하나만 옮겨보겠습니다.

가볍다
너무 가벼워서
깃털보다 가벼워서
답삭 안아 올렸더니
난데없이 눈물 한 방울 투투둑
그걸 보신 우리 엄마
"얘야, 에미야, 우지 마라
그 많던 걱정 근심 다 내려와서
그렇니라" 하신다
아, 어머니

어머니라고 말하고 나니 먹먹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교실에서도 읽어주었습니다. 덩치 큰 담임은 청승맞게 눈가가 촉촉한데 아이들은 덤덤한 눈만 끔뻑거리었습니다. 아직은 반찬 투정하고, 엄마보다 키가 더 컸다고 자랑하고 다닐 나이니까요. 엄마를 생각하면 애틋한 선생과 엄마에게 맘껏 기대고 싶고 어리광 피우고 싶은 학생들의 이야기가 묘하게 뒤섞였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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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의 씽씽 자동차 ⓒ 비룡소


세 번째 책은  <마일즈의 씽씽 자동차>입니다. 개가 차를 몰고 다니는데요, 이 개가 마일즈입니다. 자동차를 갖게 되기 전까지는 마일즈가 좀 까칠했습니다. 우리 동네 개들이 사족을 못쓰는 산책을 싫어했고, 밥 먹기도 귀찮아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개를 키우지 않는 몇몇 학생들은 무슨 개가 상전이냐고 핀잔을 주더군요. 이렇게 사는 개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달래고 계속 읽었습니다.

까다로운 녀석이 좋아하는 거라곤 주인 앨리스가 모는 차를 타고 카페에 가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앨리스가 날마다 마일즈를 태워다닐 수 없으니까 옆집 허디 아저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뚝딱뚝딱! 허디 아저씨는 마일즈를 위해 자동차를 선물로 만들어줍니다. 그 후 마일즈는 가끔 아무도 모르게 앨리스의 아들 노먼과 함께 여행을 떠나요. 물론 운전석은 마일즈 차지고요.

그때부터였습니다. 까탈스러운 마일즈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앨리스와 노먼은 다루기 힘든 마일즈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줍니다. 그냥 마일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같이 시간을 보내며 즐거운 순간들을 함께 하지요. 순수하게 관심 가져주고, 따뜻하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일즈는 행복해집니다. 대한민국 초등학생들도 마찬가지이겠죠?

사람을 개에 비유하는 게 미안하지만 책장을 덮으며 우린 모두 마일즈가 아닌가 고민했습니다. 누구나 어떤 부분은 예민하고 반대로 쿨하기도 하잖아요? 아이들에게 툭하면 잔소리해대는 저를 보면 마일즈가 한마디 뱉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봐 이선생, 애들 모습 그 자체를 받아주라고. 드라이브하면서 얘기 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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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이 있어요 ⓒ 봄나무


네 번째 책은 요시타케 신스케의 <불만이 있어요>입니다. 저는 16개월 된 딸이 있는데요, 딸이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면 같이 보고 싶은 책입니다. 심청이 닮은 딸이 아빠 눈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빠지는 그런 내용은 절대 아니고요, 딸이 아빠한테 불만을 잔뜩 쏟아냅니다. 아빠의 어설픈 항변이 걸작이니까 잘 지켜보세요.

딸은 지금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은 뭐든 제멋대로 하니까요. 불만을 다 털어놓고 멋대로 못 하게 해야겠다며 아빠 방 문을 콰당! 엽니다.

"왜 어른들은 밤늦도록 안 자면서 아이들한테만 일찍 자라고 하죠?(하나도 안 졸린데!)"
"(소곤소곤) 사실은 다음 크리스마스를 위해서 산타가 조사원을 내려보내는데, 몇 번이나 찾아와서 알아보고 가거든."
"진짜요......?"
"응. 그런데 비밀이다."

아빠의 되지도 않는 답변에 쪼끄만 애기가 팔짱 끼고 심각하게 '정말일까?' 따져봅니다. 인상 팍 쓴 채로요. 우리 딸도 저럴까 싶어 아빠미소를 짓고 있으면 애들이 단체로 한숨을 쉬죠.

"에휴 저걸 믿냐?"

딸의 불만은 계속됩니다. 왜 목욕 시간을 어른들 마음대로 정해 버리는 거죠?, 왜 동생이 잘못했는데도 나만 혼내요? 아... 이쯤 되면 책을 읽어 주다 말고 아이들과 저 사이에 대결 구도가 형성됩니다. 왠지 모르게 담임은 아빠 편에 서게 되고, 아이들은 딸의 구원자가 되어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려 고군분투합니다.

아기를 재워보신 분을 알겠지만 잠 안 드는 아기의 불만은 한정이 없잖아요? 고로 세상의 진실(?)은 조금 늦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딸이랑 티격태격 말싸움만 해도 행복할 전국의 딸바보 아빠들에게 추천하는 책입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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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 보림


마지막 추천 도서는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입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이 책 읽으면서 멧돼지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어요. 여기 도계읍은 온통 주변이 산이라 멧돼지가 진짜로 많이 살고 있거든요. 그럼 지금부터 멧돼지가 왜 지혜로워져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시작부터 멧돼지 가족에게 재앙이 닥칩니다. 자고 일어나니 집이 없어지거든요. 새끼까지 셋 딸린 엄마 멧돼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첫 지침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하루아침에 집이 없어져도 당황하지 말고 새 집을 찾아 나설 것.'

도시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멧돼지 가족. 걷다 힘들자 트럭 짐칸에 올라탑니다. '힘들면 쉬어 갈 것'이라는 지침이 있었거든요. 쭉 가다 빨간 신호등에 차가 서자 새끼부터 차례로 내립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산에서 살던 멧돼지에게 도시는 아수라장입니다. 멘붕에 빠질 어미를 위로하는 세 번째 지침은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닌 것에 감사할 것'입니다. 

수난은 끊이지 않습니다. 뒷골목 쓰레기통을 뒤져 먹이를 찾고, 유리창 너머로 뷔페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봐야 하고, 사나운 경찰에게 쫓기지요. 어쩐지 짠한 감정이 드는 멧돼지 가족이 집 찾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 지침이 힌트가 되겠네요. '친구들을 초대해도 좋음!'

멧돼지처럼 부지런해도 먹고살기 힘든 요즘 시대에 어울리는 책입니다. '지혜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지침서'로 제목을 바꿔도 어색하지 않으니까 가슴에 콱 꽂히는 지침들을 챙겨 가시길 바랄게요!

다섯 권 소개를 모두 마쳤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책들을 꺼내어 보니 또 느낌이 다릅니다. 스토리에 정신이 팔려 놓치고 있던 소소한 부분들도 많이 찾았고요. 역시 그림책은 여러 번 읽는 맛이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그림책이 아이들만 읽는 책인 줄 알았는데 꽤 근사하죠? 그림책 구입하기가 쑥스러워 굳이 조카 선물이라 핑계대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까지 어른이 왜 그림책을 사냐고 물어본 서점 직원은 한 명도 없었거든요.

불만이 있어요

요시타케 신스케 글.그림, 김정화 옮김,
봄나무, 2016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 제1회 보림창작스튜디오 수상작

권정민 글.그림,
보림, 2016


거짓말

카트린 그리브 글, 프레데리크 베르트랑 그림, 권지현 옮김,
씨드북(주), 2016


마일즈의 씽씽 자동차

존 버닝햄 글.그림, 이상희 옮김,
비룡소, 2016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

윤석남.한성옥 지음,
사계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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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교육, 그림책, 육아, 일상 주제로 글을 씁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에디터만 아는 TMI'를 연재합니다.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 2019년 성교육 전문가와 함께 하는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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