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박근혜 증오비' 세워지는 건 아닐까

'한국군 증오비' 세운 베트남 빈호아 마을... 뼈아픈 역사의 기록

등록 2016.12.26 17:33수정 2016.12.26 17:33
18
원고료로 응원
촛불이 횃불처럼 불타오를 무렵, 한 친지가 이런 탄식을 늘어놓았다.

"박정희 때는 민주화 운동, 그리고 박근혜 땐 퇴진운동. 왜 전 국민이 언제나 운동권이 되어야 하는가!"

비록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절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지난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 가결은 '유신왕국의 종언'을 알리는 기념비적 거사로 기록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소 뜬금없이 비칠지도 모르지만, 이 기회에 유신원조 박정희 시대의 참상을 되돌아보는 것도 적잖은 교훈이 되리라 짐작한다. 특히 '사색'은 없고 '검색'만 판치는 세상에선 더욱 그러하리라.

과거의 실패를 극복하고 그것을 변혁하려는 희망이야말로 매혹적인 인간사회의 역사적 나침반으로 작용한다. 이번 촛불은 한마디로 '현재는 곧 과거요, 미래는 곧 현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만천하에 알린 봉화였다. 따라서 탄핵은 내일을 내다보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단호한 결의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군의 학살, 그 부끄러운 과거
a

베트남 '한국군 증오비' ⓒ 박호성


일찍이 프랑스의 계몽철학자 볼테르도 "미래란 그 시대가 올 때까지는 숨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부득이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미래상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날의 경험은 감추어진 미래를 비추는 데 있어서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빛"이라 역설한 적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를 직시함으로써, 미래의 일을 예견할 수 있는 힘까지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주된 이유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과거를 반추함으로써 미래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에서 지금 박정희 시대를 새로이 조명해본다는 것은 무척 유익한 작업이 되리라 여겨진다. 아직도 유신 작풍이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지 않은가. 북한의 김씨 부자(父子)체제와 남한의 박씨 부녀(父女)정권이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쑥덕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현실이다.


지난 12월 2일 이른 아침, 베트남에서 '빈호아 학살' 50주년 위령제를 올렸다. 400명 이상의 베트남인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가해진 이 학살은 1966년 12월 3일 한국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지, 그것은 민간인 학살의 대명사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널리 명성을 떨치기도 한, 미군에 의한 '밀라이 학살'보다 2년이나 더 빨리 행해진 것이기도 했다.

학살의 땅을 찾은 추모객

지금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진정한 평화를 구축해나가리라 다짐하는 숭고한 노력들이 숙연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한베 평화재단'이다. 한베 평화재단은 학살 50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평화기행단을 꾸렸다. 지난 11월 30일에서 12월 5일까지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과 함께 기행을 함께했다.

10여 년, 선구적으로 베트남과 소통의 문을 겸허히 연 사람들이 있다. 일찍이 잔혹한 학살의 아픔을 체험한 제주도의 작가들은 베트남 꽝아이 성(省) 문인들과 따뜻한 마음의 창을 열었다. 이윽고 지난해에는 <낮에도 꿈꾸는 자가 있다>는 제목의 한국어와 베트남어로 된 '제주·꽝아이 문학교류 기념시집'을 발간해내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다. 베트남인 동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깊이 반성하고 사죄하는 '제주 작가'의 절절한 평화 사랑의 꿈이 이렇게 소박하지만 옹골찬 결실로 나타난 것이다.

먼 제주도에서부터 평화와 양심을 사랑하는 선한 한국인 30여 명이 인천공항으로 모여들었다. 일행은 마치 다세대주택처럼 젊은이들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조국의 민주화'란 이상을 향해서는 다들 열혈청년들이었다. 우리는 11월 마지막 날 이른 아침에 인천공항을 출발하고, 12월 2일에는 빈호아 마을로 들어섰다.

우기가 아닌데도 비는 일상사였다. 우리는 호치민 시의 '전쟁박물관' 등을 거쳐 무엇보다 '빈호아 마을'부터 서둘러 찾았다.

반성의 역사를 쓰는 사람들

a

한국군 증오비에 한국인 참배 행렬. ⓒ 박호성


한베 평화재단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으면서, 베트남과 결혼했다는 '놀림'을 당하기도 하는 구수정 박사는 현지인 뺨치는 유창한 베트남어로 무지몽매한 우리를 헌신적으로 깨우쳐주었다. 베트남에 와서 학위까지 하면서 쉰 살이 되도록, 어떻게 한국과 베트남 관계를 평화롭게 재구축할 것인지 동분서주한 지 벌써 20여 년이 넘었다.

물론 순수한 민간인 차원의 고군분투로 시작했으니, 재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얼마나 극심한 난관들에 봉착했을지 불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이러한 순수한 헌신이 헌신짝 취급당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래서 그녀를 바라보면 절로 숙연해진다. 성녀처럼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공정무역과 공정여행을 통해 베트남과 한국을 잇는 작고 아름다운 통로가 되고자 사회적 기업인 '아맙'(A-MAP)을 설립하여, 국경을 넘어서는 새로운 연대와 지속가능한 지구공동체 구축을 시도한다.

이미 10여 년 전 평화탐방의 기회로 베트남에 왔다가,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각박함을 절감하고 아예 베트남에 주저앉아 평화봉사단의 길을 외로이 걷고 있는 분도 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를 보살펴준 잡무총책 권현우 팀장이 바로 그분이다. 그런데 왜 이분들이 모두 순교자처럼 느껴졌는지...

일행 중 누군가가, 물론 보증할 수는 없지만 대단히 진지한 어투로 "박근혜가 사임하고 한국에 만약 진정한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주 베트남 한국대사 1순위로 구수정 박사를 적극 밀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할 정도였다(다음 한국 대통령 되실 분은 이 점에 특히 유념하시옵길!). 하기야 그녀야말로 한국 외교관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해내지 못할 간곡한 평화사업을 통해 엄청난 국위선양을 혼자서 조용히 이룩해내고 있는 숨은 애국자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학살의 잔혹함

a

베트남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에 있는 사진 촬영 ⓒ 전쟁박물관


꼭 50년 전인 1966년, 베트남인의 표현을 빌리면, '남조선 미제 용병'인 한국군 1개 대대는 '빈호아'를 기습하여 모든 마을에서 소탕작전을 벌였다.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온갖 무기와 수류탄을 앞다투어 퍼부었다. 집을 불태워 살해하기도 했으며, 여든 살 노인을 잡아다 참수하여 그 머리를 들판 한가운데 집어던져 전시하는 절통한 광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학살 후 시신을 오물에 처박기도 했으며, 기름에 불태우기도 했다. 도합 430명으로 집계된 빈호아 마을 학살피해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고, 180여 명은 어린 아이, 109명은 50~80세 노인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살해된 임산부가 7명이나 되었다. 어린애를 산 채로 불 속에 집어 던지기도 했으며, 임부의 배를 가르기까지 했다. 목 졸라 죽이고 목 잘라 죽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베트남인들은 '귀신처럼 악독하다'는 말보다 '따이한처럼 악독하다'는 말을 더 즐겨 쓸 지경이라 한다. 우리 일행은 가는 곳마다 빗물 섞인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우리는 '가혹하고 참담하다'는 말보다 더욱더 예리하게 뼛속을 도려내 줄 억센 어휘를 찾고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 한국군의 학살은 주둔 직후인 66, 68년에 집중되는 추세를 보여, 결국 월남에 상륙하자마자 학살부터 자행한 꼴이 되어버렸다. 물론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극한상황의 불가피한 산물일 수도 있겠지만, 이윽고 총 9천 명 정도에 달하는 베트남인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전쟁 직후 베트남인은 제대로 먹지도 살 집을 짓지도 못하는 가혹한 형편임에도, 이 빈호아 마을에서 가장 먼저 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군 증오비' 건립이었다. 그리고 비문에다가는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고 엄중히 고발함으로써 뼛속 깊이 새겨진 한국에 대한 증오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남조선 미제 용병들'의 만행을 자손 대대로 기억하고 규탄하고자 하는 굳센 결의를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장가에도 한국인의 만행을 반추하도록 만드는 가사를 만들어 붙여 아기들을 재울 정도라 한다. 이런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며 우리 일행은 물바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쏟아지는 빗물이 온몸으로 속속들이 스며들었고, 흘러내리는 눈물로 얼굴은 흥건히 젖어 들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하지만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적잖은 외국인들이 이 마을을 찾았다. 물론 우리 한국인은 그 대열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 한국군 학살 희생자들을 위해 위령비를 세워준 영국인 작가도 있었고,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워준 일본인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살로 인해 손과 발을 잃은 생존자들에게 의족과 의수를 지원한 독일인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정작 이 학살에 대해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할 한국인들의 발걸음은 가장 느렸다. 학살에는 1등이었지만, 위로와 사과에는 꼴찌인 셈이었다. 인간의 큰 죄악은 타인에 대한 증오심이 아니라 무관심이라 이를 수 있다. 우리 한국인은 이러한 무관심으로 일관해온 것이다.

참배를 위해 50년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우리는 결국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공식적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이 조촐한 평화기행조차 불편하게 보는 이들은 누구일까. 코트라에 따르면 베트남은 지난해 한국의 교역 대상국 3위이자 해외투자 대상국 3위다. 중국을 대체하는 생산기지로 주목받고 있는 베트남이 한국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정당한 것을 위해서는 가장 느리게, 반면에 부당한 것을 위해서는 가장 기민하게' 대처하는 자세, 이런 것이야말로 비민주적인 정치 체제의 본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 참배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참으로 진지하고 숙연하게 빗속에서 사죄의 진심을 담은 꽃과 향을 바치며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랬다. 그리고 눈물로 주민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빈호아 주민들의 무거운 빗장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나마 비에 젖은 땅 위에서 엎드려 속죄하며 참배하는 우리들의 진심이 그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신 것이다.

특히 우리는 전교생의 30% 가까이가 민간인 학살희생자 직계 자녀로 구성된, 하지만 일본인이 세워준 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정대협)가 마련해준 장학금을 전달했다.

유일한 생존자

a

베트남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에 있는 학살 장면. ⓒ 전쟁박물관


우리는 유일한 생존자인 도안 응이아씨를 찾기도 했다. 학살 당시 그는 생후 6개월 된 아기였다. 총탄에 쓰러진 엄마의 배 밑에 깔려 간신히 목숨을 건지긴 했으나, 온 몸에 수류탄 파편이 박히고 탄약이 스며든 빗물에 엎드려 있었던 탓에 두 눈이 멀어버렸다. 고아가 되어버렸으나,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그를 살려내고 돌아가며 키웠다. 성인식을 올린 15세 때는 돈을 갹출하여 집을 지어주고, 마을 인민위원회에서는 땅을 넘겨줬다. 그는 이제 두 명의 자녀를 거느린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비록 눈이 보이진 않지만, 그는 빼어난 기타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감긴 두 눈이었지만 환한 표정으로 <자그마한 봄>이란 제목의 곡을 연주하고는 "오늘은 우리 가족이 참으로 슬픈 날이다. 이날만 되면 꼭 비가 온다. 하지만 비 쏟아지는 오늘 우리를 찾아준 당신들이 참으로 고맙다"고 말하며, 쓸쓸히 미소 지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살 피해현장과 피해자 유족들을 찾아가는 곳마다 눈물은 샘솟듯 흘러내렸다. TV 매체를 비롯한 베트남의 여러 매스컴들이 희한한 눈빛으로 희한한 우리 참배단 뒤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참회의 기도를 연일 보도했다.

천여 년에 걸친 혹독한 중국의 지배, 이어진 프랑스의 침탈과 미국의 횡포 등등으로 하루도 편한 날 없이 신음하며 살아온 베트남 민족이지만, 자신감과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 베트남 최고 민중시인인 탄타오는 <홍수 날 결혼식>이란 시에서 "고된 운명을 욕하지 말라, 그대여. 가죽이라도 남았으면 털이 나고, 싹이 남았으면 풀이 돋을지니" 하고 노래한다.

제주의 시인 이종형은 앞에서도 언급한 <낮에도 꿈꾸는 자가 있다> 시집에 투고한 '목비(木碑)가 서 있는 숲'이란 시를 통해 "악착같이 살아서 죽어간 모든 것들의 생몰연대기를 제 몸에 새긴 묘비 앞에서", "허리 꼿꼿한 직립"으로 "이마에 튄 하얀 피 손등으로 닦아내던" 사이공 근처의 옛 전쟁유적지에서 목격한 "깡마른" 한 베트남 "사내"를 읊고 있다.

유일한 생존자 도안 응이아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처와 고통을 강요한 이 세상은 그에게 암흑으로 뒤덮인 공포와 불안의 씨였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 역시 불행을 딛고 "허리 꼿꼿한 직립"으로 '남아 있는 싹'에서 결국 풀을 돋게 한 것이다. 전쟁에서 13명의 아들을 다 잃었지만, 전쟁 직후 미군의 유해부터 찾아 나서는 일에 경건히 매달리기도 한 90세 난 할머니도 있다.

박정희가 파병을 요청한 이유

우리 한국군의 위용은 남달랐다. 놀랍게도 미국의 요청이 있기도 전 6․25 전쟁 종전 직후인 1954년에 이승만은 미국에 파병을 거의 조르다시피 할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5.16 직후인 1961년, 월남전이 공식적으로 발발하기도 전 케네디에게 파병을 청원하였으나 거부당하는 모멸감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후 거의 9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32만 명을 파견했다. 가장 많은 병력에, 그것도 유일한 전투병력이었다. 우리는 왜 이랬을까.

무엇보다 반민주적 정권은 자신의 국민적 정통성 결여를 대외적 의존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경향을 짙게 드러낸다. 반민주적인 정치질서에 대한 국민의 내부적 불만을 대외적 위기를 과장함으로써 억압하려 들기 때문이다.

월남전 당시 미국은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현대식 무기를 총동원하여 785만 톤의 폭탄을 퍼부었다. 남-북 월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폭격했고, 이 당시 투하된 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참전국 전체가 사용한 폭탄의 무려 세 배에 달하는 많은 양으로, 그 파괴력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탄 640개와 맞먹는 것으로 얼려져 있다. 월남은 무기 시험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병원이든 민가든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이 자행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61%가 고엽제로 채워진 화학무기가 대대적으로 동원되었다. 전체 월남의 1/4에 해당하는 2만 6천 부락에 이를 살포해 '아시아의 허파, 아시아의 아마존'으로 불리던 지역을 송두리째 폐허로 만들었다.

특히 베트남 고엽자 피해자협회가 공표한 피해자 수는 약 300만 명에 달한다. 2013년 1월 14일자 연합뉴스는 고엽제 여파로 인해 매년 전체 베트남 신생아의 2% 정도인 약 2만 5천 명 정도가 기형아로 태어나고 있다고 전한다. 2015년 4월 연합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고엽제 후유증 상이 등급자는 4만 5천 명에 이른다.

예컨대 생후 1개월 된 젖먹이를 포함하여 대부분 노인과 여성과 어린이로 이루어진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1968년 3월 16일의 '밀라이 학살' 이후 그 아름다운 산 마을은 융단폭격으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살아 있지 않은 폐허로 돌변하였다. 하지만 그 학살을 끝낸 미군 '용사'는 훈장을 받기도 하고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베트남인들은 '한국군이 아니라, 차라리 미군한테 학살당하는 게 낫다'고까지 자조할 정도였다 한다.

월남전을 이끌었던 미국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30여 년이 지난 후 회고록을 펴내고, 거기에다가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도 끔찍한 잘못을! 우리는 미래의 후 세대에게 '왜'라고 설명해주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다"고 아프게 술회하고 있다.

사과 없는 한국 정부

a

한국군 증오비에 적힌 학살 희생자 명단 ⓒ 박호성


하지만 여태 우리나라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폐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나 회고가 없다. 어쩌면 그런 '사소한' 대외적인 과거사에 신경 쓸 만큼 국내정세가 평화롭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자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카 역시 그의 주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 역설하고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인 바이런도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라 읊었다. 무엇보다 지금 타오르는 촛불은 이 과거를 직시하라 촉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대한민국은 OECD의 일원일 정도로 선진국으로서의 국력을 세계만방에 떨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역량과 자질은 구석기 시대 수준이다. 현재 진행 중인 촛불혁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역사적인 도약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발효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증오비'가 서는 건 아닐까

현재 네티즌 사이에서는 이런 문답이 유행하고 있다. '다카끼 마사오'(박정희)의 딸의 일본식 이름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물음에, 정답은 '하야하라 꼬끼오'하는 식이다. 이처럼 민중의 힘은 위대하다. 한번은 시골길을 걷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7순이 넘어 보이는 어느 노부부가 정답게 앉아 은행 알을 팔고 있었는데, 좌판 위에 자그마한 팻말이 하나 수줍게 올라앉아 있었다. 거기에 무어라고 쓰여 있었을까.

나는 그걸 보는 순간 어떠한 고매한 철학자가 쓴 글을 읽고도 여태 가져보지 못한 순박하고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 팻말에는 딱 한 마디만 쓰여 있었다, "한국 은행 팝니다"라고. 이른바 '밑바닥 인생'들의 지혜는 이렇게도 경탄스러운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지혜를 살려 과거의 잘못까지 하야시켜야 할 때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잘못을 잘 못 이해하고 있다. 대통령 스스로가 지금껏 한 번도 잘못된 자신의 실정(失政)을 자인한 적이 없다. 다 알다시피, 천주교에서는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 읊으며 가슴을 치는 핵심적인 기도양식이 있다. 놀랍게도 박근혜 대통령은 천주교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나온 천주교 신자임에도 '자신의 큰 탓'을 고해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촛불은 유신시대를 청산하라 다그치고 있다. 자칫하면 <박근혜 증오비> 같은 게 세워질지도 모를 지경이다. 이제야말로 최고 정치지도자가 최고로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선 대내외적으로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사죄할 것은 사죄해나가는 새로운 기풍부터 진작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위안부 폐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간곡한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 막무가내로 박근혜 대통령처럼 버티지 않고 -, 우리부터 보다 가까운 과거에 베트남에 대해 저지른 죄과부터 솔선수범하여 사죄해나간다면, 이는 만용이 될까.
덧붙이는 글 박호성 기자는 서강대 정외과 명예교수입니다.
#베트남 #한국군 증오비 #빈호아 #학살 #박근혜 증오비
댓글1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가 창간될 때부터 신랄한 시대정신과 예리한 작풍에 매료됐습니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와 사회과학대학 학장을 지낸 뒤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어서 강단에 서지는 못하지만, 제게 능력과 기회가 따라준다면 오마이뉴스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