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연기 잘 한다' 소리도 듣고파..." 잊을 수 없는 노래, 팬텀의 여인

[inter:view] 뮤지컬 <팬텀> 속 뮤즈,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 이지혜

17.01.10 16:22최종업데이트17.01.10 16:22
원고료로 응원

▲ 이지혜만의 '크리스틴 다에' 1990년생 뮤지컬 배우 이지혜는 뮤지컬 <팬텀>의 크리스틴으로 김소현, 김순영 배우와 함께 트리플 캐스팅됐다. "김소현 선배는 누가 봐도 크리스틴이고, 김순영 언니는 이번에 '2016년을 빛낸 성악가 20'에 들었거든요. 저는 그냥 성악 전공한 것밖에 없는데…. (웃음) 그래서 저만의 '날것'을 보여주는 크리스틴을 만들려고 했어요." ⓒ 이정민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수많은 이의 꿈과 낭만이 모이는 이곳. 시골에서 올라온 크리스틴 다에는 어렸을 적 잠깐의 기억을 토대로 이 화려한 파리에 올라온다. 음악적 재능은 있지만, 아직 세공되지 않은 보석, 크리스틴을 필립 드 샹동 백작은 한 번에 알아본다. 거리에서 노래하며 악보를 파는 그녀에게 '재능 낭비'라며 훈련을 받을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오페라 하우스로 들어간다. 비록 그것이 의상 보조에 불과한 자리일지라도.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그 화려함 밑에 모든 추한 것들을 감춰놓은 곳. 어려서부터 끔찍한 외모를 갖고 태어난 에릭은 이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서 유령으로서 살아간다. 언제나 가면을 쓴 그는, 혹시나 이 가면 안을 본 사람을 죽여버릴 정도로 폐쇄적이고 뒤틀린 존재이다. 그 역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장기를 펼칠 수 있는 무대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존재마저 부정당한 채, 오페라 무대의 그림자 예술 감독으로 간간이 개입할 뿐.

그 두 사람이 만난다. 무대 뒤에 가려져 재능을 미처 꽃피지 못하던 여자는 그의 재능을 발아시킬 유일한 남자를, 인생 자체를 부정당한 남자는 자신을 유일하게 인정해줄 여자를.

에릭의 뮤즈, 목말랐던 모성을 충족해줄 존재, 유일한 그리고 영원한 사랑. 결국, 에릭을 파멸시키고 동시에 구원하는 천사. 뮤지컬 <팬텀>의 '크리스틴 다에'는 이토록 다양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크리스틴에 트리플 캐스팅된 배우 중 가장 어린, 그래서 이제 막 파리로 상경한 듯한 크리스틴인 것처럼 반짝이는 배우 이지혜. 그를 지난 2016년 12월 29일에 만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성장하는 크리스틴을 보여주기 위해

▲ 적극적인 크리스틴처럼 인터뷰 시작 전까지만 해도 무척 피곤해보였던 그녀. 하지만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니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청순한 캐릭터를 주로 맡아와서 그런지, 다소 새침할 것이라 생각했던 편견이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그녀는 굉장히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너무 두서없이 아무말한 건 아니죠?" ⓒ 이정민


"<팬텀>은 정말 '큰 산'이었죠. 너무 많이 부담됐고, 많이많이 걱정했는데 만나고 나니 너무 행복하고 매일매일 꿈만 같고…."

<팬텀>을 맡은 소감을 물으니 너무 '전형적인' 답이 나왔다. 심지어 '큰 산' 이야기는 타사 인터뷰에서도 나왔던 대답이었다. 이 점을 지적하니 이지혜는 '빵' 터져서 한참을 웃는다. 그러고는 "진심이니까 반복할 수밖에 없는 거죠!"라고 항변한다. 이 배우, 참 웃음도 많고 밝다. 처음 파리에 올라왔을 때의 크리스틴처럼.

"크리스틴과 첫인사는 잘한 것 같은데, 아직 친해지는 중이에요. 하면서 새로운 게 계속 생겨나고 있거든요. 하나하나씩 '크리스틴은 이랬겠구나', '크리스틴은 저랬겠구나'하면서요. 처음에는 저로 대입해서 생각하려고 했어요. 저를 캐릭터화하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지금은 크리스틴을 제 안에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2016년 11월 26일 개막한 뮤지컬 <팬텀>은 이제 공연 중반을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배우 이지혜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 캐릭터에 대한 공부도, 연기와 노래에 대한 고민도 아직은 '현재진행형'이었다.

특히나 극을 여는 첫 신이자 크리스틴의 등장 장면인 '파리의 멜로디'가 그렇다. 부푼 꿈을 안고 파리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파리에 관한 곡을 써서 그 악보를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아름다운 파리의 낭만을 노래하는 크리스틴. 그런데 왜인지 음정이 약간 불안하다. 깨끗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에릭을 만나서 훈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크리스틴의 소리는 더 안정되고, 훌륭해진다. 그래서 긴가민가했다. 배우가 정말로 떨었던 걸까. 아니면 파리에 갓 올라온, 꿈 많지만, 아직 훈련이 안 된 예술가의 소리를 의도한 걸까.

"맞아요! (손뼉 치며) 캐릭터로 승부를 보려고 했던 부분인데…. (웃음) 크리스틴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특히 '파리의 멜로디'와 '비스트로'가 멜로디가 똑같거든요. '파리의 멜로디' 때는 훈련 받지 않은 날 것의 소리를 내려고 하고 '비스트로' 때는 완성된(?) 소리를 들려드리려 하고 있어요. 약간 단순할 수도 있지만, 소리를 통해 극단적인 차이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캐릭터를 풀어봤어요. (웃음)

관객분들이 성장하는 크리스틴을 보면서, 배우와 함께 '내가 키웠다!'는 느낌으로 뿌듯해 하시기를 바라요. '파리의 멜로디' 제가 처음 부르고 나면 '갸우뚱'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크리스틴이 왜 이렇게 노래를 별로, 깨끗하게 못하지?' 그러다가 레슨 받으면서 '오, 잘한다, 잘한다', '성장하고 있어!'라고 느끼시고, 그 다음에 '비스트로'에서는 집중하고 보시는 거죠. 모두가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만…. (웃음) 최소한 앞 열에 앉아 계신 분들이 저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시골에서 올라온 이 소녀의 성장기

▲ 지혜 엠마에서 지혜 크리스틴으로 연극·뮤지컬 배우 중에서는, 자신이 맡았던 필모그래피의 캐릭터가 그대로 별명이 되어 굳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지혜는 데뷔 때의 캐릭터로 굳어졌다. 맑고 고우면서도 자기만의 음색을 지닌 그녀. "성악을 안 해 버릇하면 또 그 소리가 안 나오거든요. <팬텀> 들어가기 전에 예전에 제가 노래했던 걸 반복해서 들으면서 다시 그 소리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 이정민


"크리스틴은 굉장히 열성적인 아이예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 정말 커요. 혼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생계 수단도 해결하면서 꿈을 이루고자 하는 모습이 되게 멋있었어요. 저도 시골에서 올라왔거든요. (웃음) 크리스틴은 굉장히 자기 주도적이잖아요. 성장해가는 과정도, 물론 좋은 선생을 만난 것도 크지만, 특별히 무언가에 의지하거나 기대지 않고 노력하면서 이뤄가잖아요. 크리스틴을 통해서 항상 반성하게 되어요. '더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웃음)"

극 중 크리스틴이 성장하듯이, 배우 이지혜도 크리스틴을 만나 성장하고 있었다. 2012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로 데뷔한 이후 그는 꾸준히 자라왔다. 배우 이지혜의 별명은 여전히 '엠마'이다. '지혜엠마' 줄여서 '졤마'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그. 심지어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jjae_emma'이다. 크리스틴을 맡았음에도 여전히 데뷔작의 캐릭터로 불리는 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전 너무 좋아요. 엠마를 너무 사랑하거든요. 사실 새 작품과 새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애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해요. 근데 엠마는 처음 만난 캐릭터이기도 하고, 두 번 하기도 했기 때문에 애정이 더 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불러주시니까 너무 좋아요."

그렇게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오필리어>를 제외하면 모두 대극장 주연만 맡았다. 나름 '꽃길'만 걸었을 것 같은 이 배우는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며 '성장'에 목말라 했다. 혹시 대극장 위주로 필모그래피를 쌓은 것도 일부러 그 '성장'을 위한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네? (웃음) 절대 아니고요. 진짜 아닌데…. (웃음) 전 소극장도 정말 하고 싶었는데 그런 오디션 기회 자체가 별로 없었어요. 저를 불러주시는 데도 없고…. 저 소극장 진짜 하고 싶어요. 좋은 작품 많잖아요. 그런데 안 불러주셔서…. (웃음) 이거 꼭 적어주세요. '불러주는 데가 없었다.'

이번 <팬텀>이 대극장이기는 하지만, 객석과 무대가 가까운 편인데 제가 객석 코앞까지 무대를 쓰거든요. 그럴 때는 관객들 움직이는 것도 다 느껴져서 색다르거든요. 블루스퀘어가 이 정도인데 소극장은 어떻겠어요. 관객의 반응을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소극장도 꼭 하고 싶어요. 불러주세요!"

▲ 자신의 부족함에 대하여 2013년 <베르테르>의 '롯데'가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뮤지컬을 하지 않으려고까지 했다는 이지혜. 하필이면 당시 더블 캐스팅된 배우가 연기·노래 모두 탁월한 '전미도'여서 더 힘들었다고. 하지만 덕분에 많이 배웠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다시 맡은 롯데에서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으로 팬들 앞에 나설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단점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 발전의 원동력인 건 아닐까. ⓒ 이정민


5년 차를 지나 이제 6년 차가 된 이 배우는 여전히 신인의 자세였다. "이제 신인상 후보에도 안 오르더라고요"라면서 너스레를 떨지만, 아직은 성장 가능성이 더 많은 배우이다. 자신의 가능성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뮤지컬 배우 중에서 연기와 노래 둘 다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배우는 매우 드물다. 이지혜는 연기보다는 노래에 강점이 찍힌 배우이다. 호불호도 갈리고 팬과 안티도 확연하게 나뉘는 편이다.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물어보니 망설이지 않고 답이 나온다.

"후기를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아요. 2013년도 <베르테르> 때 너무 충격 먹어서…. (웃음) 그래도 저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는 알죠. 연기적으로 많이 아쉽죠? (웃음) 물론, 10명이 있으면 10명이 저를 다 좋아할 수는 없죠. 내가 설득시킬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죠. '개취(개인 취향)'의 세계는 넓고도 다양하니까. (웃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최선을 다해 해내면, 모두는 아니어도 저를 안 좋게 보셨던 분 중 일부라도 좋아해 주지 않으실까요. 언젠가 꼭 보여드릴 거예요. (웃음)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고 늘 생각해요. '노래를 괜찮게 하는데, 연기도 괜찮게 하네?'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많이많이많이' 노력해요. 여러 가지로 계속 부딪혀 보고, 욕을 먹으면서도 그런 역할들을 하고…. 사실 소극장에 도전하고 싶은 것도 그런 걸 만나면서 연기적으로 깨고 싶은 게 있어서예요."

그는 아직 단단하게 여물진 못했지만, 자기만의 생동감 있는 아우라를 만들고 있었다. 커팅이 미처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반짝이는 원석처럼.

크리스틴 그리고 에릭

▲ 과거의 인연이 다시 이렇게 <팬텀>에서 에릭 역에 박효신·박은태와 함께 트리플 캐스팅된 전동석, 그리고 크리스틴 역에 트리플 캐스팅된 이지혜. 전동석 배우가 입대했을 당시에, 같은 선생님 밑에서 노래를 수학했다고 한다. 은사께서 타계한 후, 그들은 은사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한 무대'에서 다시 만났다. ⓒ 이정민


"시골에서 왔다. 그리고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저는 입시 때부터 정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왔거든요. 저 대학 입시 때 선생님이 전동석 오빠랑 같은 선생님이에요. 선생님께서 몇 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선생님이 항상 저랑 동석 오빠 작품 하는 걸 보고 싶어 하셨어요.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작은 음악회를 하자고 해서 동석 오빠랑 같이 노래를 불러드렸던 적이 있어요. 그때 선생님께서 너무 좋아하셨거든요. 이번에 기회가 되어서 동석 오빠랑 같이 무대에 서게 됐는데, 올라갈 때마다 선생님 생각 진짜 많이 하게 돼요. 극 중에서 오빠가 또 선생님이다 보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어요."

자연인 이지혜와 크리스틴의 교집합에 관해 물었더니 '선생님' 얘기가 나왔다. 중앙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녀가 처음부터 뮤지컬 배우를 꿈꾸지는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오디션을 봤고, 그게 데뷔작이 됐다. 엉겁결에 시작한 뮤지컬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에는 그때 선생님께 배웠던 것들이 바탕이 됐을 터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극 중 선생님인 '에릭'을 만난다. 원석인 자신을 깎아 빛나게 할, 최고의 세공사.

"에릭과의 관계에서, 크리스틴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큰 의미를 가진 것 같아요. 우선은 뮤즈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의 어머니 느낌도 있죠. 그 두 가지를 다 표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고민이 많아요. 특히 에릭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더 마음이 가는 게 있거든요. 어린 에릭이 연기하는 걸 보면, 그다음의 피크닉 신이 겹쳐 보여요. 얼마나 저 어린아이가 힘들었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거든요.

에릭은 나(크리스틴)의 큰 꿈을 열어준 사람이고, 나한테 정말 좋은 선생님인데 내가 이 사람한테 뭘 해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의 아픔을 만져주고,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죠. 아무래도 극이다 보니까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가 많잖아요.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고. 친절하지 못한 부분도 생기고. 저도 제 마음을 조금 더 보여주고 싶고, 에릭과의 얘기들도 더 풀어내고 싶은데 시간상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 짧은 시간에 응축한 감정의 변화 에릭을 향해 사랑을 노래하며 가면 안을 보고 싶어하는 크리스틴. 그 가면을 본 직후 무서워 도망가고, 지하 묘지에서 오페라 하우스로 올라온 후 다시 뉘우치며 그에게 돌아가려 한다. "내게 갑자기 어떤 혼란이 왔을 때, 정말 횡설수설하게 되고 왔다갔다하는 부분들 있잖아요. 아무리 할 수 있다고 100번 말해도 정작 닥쳐왔을 때는 모르는 거니까. 크리스틴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누구나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 이정민


뮤지컬 <팬텀>은 태생적으로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같은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다른 창작진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의 단순 비교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엇보다 결말부로 갈수록 <팬텀>은 서사의 축이 원작에서 크게 휘어 나간다. 비극으로 치닫는 <팬텀>은 결국 '팬텀'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평생 애정을 갈구했던 에릭은, 그 삶의 끝에야 자신을 구원해줄 존재를 만난다. 에릭은 크리스틴의 품에서 영원한 작별의 입맞춤을 나눈다.

"제가 에릭의 가면 벗은 얼굴을 보고 처음에 도망가잖아요. 그 이후로 에릭과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신이 없어요. 마지막에 에릭의 가면을 올렸을 땐, 정말 이 사람한테 미안하다는 말 이상의 뭘 할 수 있겠느냐고 고민해요. 아, 웃는 얼굴로 보내줘야겠다. 너무 눈물이 나기 때문에 울음을 아예 멈출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울상인 모습을 안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겠다…. 울지 않으려는 제 얼굴을 보고 에릭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신은 너무 어려워요. 울지 않기도 어렵고, 말이 없고 노래이기 때문에,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한소절 한소절 꾹꾹 눌러 담아서 부르고 있어요."

또 크리스틴으로 만날 수 있을까

▲ 예고된 비극을 향하여 "에릭이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가 너무 컸기 때문에, 아무리 크리스틴이라고 하더라도 그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자신에게 너무나 큰 것을 준 고마운 사람이잖아요. 에릭에게 큰 상처도 줬고…. 그래도 크리스틴 덕분에, 에릭이 잠시라도 행복했다면 다행이에요." ⓒ 이정민


슬픈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면서도, 노래하는 배우 자신은 눈앞의 캐릭터를 위해 애써 울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넘치려는 감정을 일부러 눌러 담으며 극을 매조 짓는다. 감정도 체력도 소모가 많이 되는 공연을 소화하는 게 여러모로 쉽지 않을 것 같다. 장기 공연될 예정인 <팬텀>은 오는 2월 26일까지 서울 공연을 마친 후 4월까지 지방 투어에 나선다. 과연 끝까지 잘해낼 수 있을까.

"사실 감기 기운이 아직 좀 있어요. 지금 감기에 안 걸린 배우가 없을 정도예요. 공연장이 실내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먼지도 많고, 독감도 유행이고…. 독감 주사를 미리 맞았는데, 맞아도 감기는 걸릴 수 있으니까요. 워낙 초고음을 내는 역할이다 보니까 조금만 목이 안 좋아도 소리가 탁하게 나오거든요. 이 공연만큼 소리적으로 부담되는 역할을 해본 적이 없어요.

4월까지면 환절기가 딱 걸쳐있으니까 더더욱 걱정되죠. 그래서 매일 땀 흘리면서 운동하고, 신 들어가기 전에도 복근 운동하고 들어가요. 항상 했던 만큼 컨디션을 잘 유지하면서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캐스팅 교체 없이 풀로 소화하는 것, 큰 무리 없이 인사하고 잘 보내는 게 이번 <팬텀>의 목표예요. 그래야 또 크리스틴을 만날 수 있겠죠?"

질문하지 않았는데 먼저 크리스틴을 '또' 만나고 싶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전에는 매체 인터뷰 때마다 입버릇처럼 <베르테르>의 롯데를 다시 하고 싶다던 그녀였다. 그리고 '말하는 대로' 2013-2014에 이어 2015-2016시즌에 다시 롯데를 맡았다. "사실 서른이 넘고 더 원숙해졌을 때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는 얘기였는데, 소속사에서 너무 빨리 수락했더라고요"하면서 웃는다. 그렇다면, 크리스틴은?

"너무 하고 싶죠. 크리스틴은 정말 제가 소리가 나오는 그 날까지 하고 싶어요. (웃음) 제가 너무 좋아하는 음역의 노래를 할 수 있고, 저에게 맞는 역할이니까…. 저에게 맞는 음역을 맡은 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맡았으니까, 당연히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부담이 더 커졌던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속 시원함을 느끼면서 하고 있어요. 힘닿는 데까지! 크리스틴 하겠습니다!"

<팬텀>의 삼연, 사연, 오연이 될 때까지 크리스틴을 하고 싶다고 동석한 홍보팀 직원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그녀. 어디 배역이 배우가 원한다는 이유로 다시 할 수 있을까. 이지혜의 크리스틴을 본 주변의 코멘트도 꽤 중요할 터이다.

"로버트(연출·각색)가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칭찬해줘서 너무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 사실 처음에는 제가 어떻게 하나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어요. 만나자마자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같이 연습하면서 동료분들께서 저를 점점 믿어주시는 게, 마음을 열어주시는 게 느껴졌어요. '비스트로' 때 다 같이 응원의 에너지를 받아요. 마이크가 꺼져 있을 때도, (복화술로) '파이팅, 파이팅'해주세요. 눈 마주치면 키스 날려주시기도 하고…. (웃음) 그런 게 다 힘이 돼요."

이지혜를 무결점의 배우라고 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베테랑도 신인도 아닌 그 어디쯤에서 그녀는 어딘가 부족하고, 어딘가 아쉬운 점을 지닌 채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파리의 멜로디' 때의 '갸우뚱'을 '비스트로'에서 환호로 바꾸듯이, 결국 성장하며 동료의 신뢰를 얻었듯이 그녀는 아직 발전하고 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배우 중 하나인 이지혜. 그녀가 얼마나 성장할지 그 폭을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이지혜의 크리스틴을 봐 둘 가치가 있다.

▲ <팬텀>의 크리스틴, 이지혜 장기공연 중인 뮤지컬 <팬텀>은, 연말·연초 극장가 대목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 중 하나이다. 뮤지컬 <팬텀>의 주인공은 분명 에릭이지만, 그 에릭의 서사를 뒷받침하며 옆에서 빛나게 해주는 게 바로 크리스틴이다.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하는 그녀만의 노래에 귀 기울여 보자. ⓒ 이정민



팬텀 이지혜 크리스틴 졤마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