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계산대 앞에서 고심하는 이유

신용카드 서명에 대한 단상

등록 2017.01.10 15:03수정 2017.01.1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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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우리 가게도 오만 원 이하 무서명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점원과 손님 둘 다 여러모로 편해지긴 했지만, 오만 원 초과 서명마저도 귀찮아하거나 불평을 하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금액에 상관없이 무조건 서명을 해야 하던 때엔 그냥 쭉 긋거나 동그라미 같은 단순한 도형이나 이모티콘, 하트 등을 그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서명해 주세요~" 하면 조금 더 장난스럽게 "네"하고 쓰는 이들도 꽤 있었다.

극소수지만 나름 창의성을 발휘해서 새나 꽃 등의 사물을 '제대로' 그려놓는 예술혼을 발휘하는 이들도 있는데, 신용카드 서명에 익숙지 않은 일부 외국인들이나 어르신들은 컴퓨터 모니터에 직접 서명을 하려 하거나 키패드에 서명하라고 일러줘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펜을 쥔 채 한참을 헤매는 이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귀찮아서 점원에게 대신 해달라고 떠넘기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어떤 가게들은 아르바이트생이 '당연하게' 대신 서명을 해주기도 하지만.

그런 지경이고 보니 신용카드 뒷면에 제대로 서명을 한 후 정확히 서명하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하고, 점원 입장에서도 그걸 일일이 대조하여 서명을 받기가 여러모로 번거롭고 힘든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런 문제로 인해 가끔 신용카드 도난사고가 일어나 형사들이 찾아와 CCTV를 확인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매장 쪽에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 꼭 신용카드 뒷면 서명을 확인해야 한다고 다짐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이태원이라는 지역 특성상 외국인 손님들이 꽤 많은데, 사실 서명에 관해선 아직도 보수적인 편인 외국인들은 그래도 대부분 제대로 하는 편이라 서명 도중에 끊어버리면 상당히 당혹해 하거나 불쾌해한다. 그런데 시간은 걸리더라도 매사에 꼼꼼하고 정확한 국민성을 반영하듯 일본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정확히 쓰는 경우가 많은데, 각종 오류로 인해 재차 삼차 서명을 받을 때도 흔들림 없이 반복해내는 그들의 인내심은 놀라울 정도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국적을 막론하고 전 세계 아이들은 모두 신용카드에 서명하는 행위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다. 쇼핑한 물건들이 온전히 자신들의 소유가 되기 직전에 행해지는 결정적인 짧은 행위에 어떤 짜릿함을 느끼는 것일까? 하지만 막상 부모에게 '서명'이라는 엄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나서는 그냥 찍 긋거나 무의미한 낙서, 아니면 단순한 도형 정도를 그리기 일쑤다.


한 번은 아빠랑 함께 온 한 여자 아이가 무언가를 그려놓았기에 놀리려고 "이거 누구 궁둥이야?" 했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아빠를 보며 "난 하트를 그렸단 말이야..." 하자 아빠 왈 "그러니까 더 잘 그렸어야지..."한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온 그 아이는 서명할 기회를 주자 과거의 치욕을 갚아주겠다는 듯 비장한 각오로 펜을 집더니 정말 제대로 된 새 한 마리를 그려내 감탄을 자아냈다.

요즘은 오만 원 이하 무서명으로 바뀐 후 서명할 기회를 박탈당해 샐쭉한 표정을 짓는 아이가 있으면 장난스레 "엄마, 아빠가 오만 원 넘게 사셔야만 네가 서명할 수 있단다~ 꼭 기억해~"라고 얘기해서 부모의 웃음보를 터트리기도 한다.

각설하고 본인 확인을 위해 필수였던 신용카드 서명이 이제 그 존재 의미를 거의 잃어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용카드 뒷면에 제대로 서명을 해 놓은 경우도 드물고 그걸 일일이 확인하기도 힘들뿐더러, 무엇보다 사람들은 서명하는 행위 자체를 무척 귀찮아한다. 국민들이 귀찮아하고 거부하는 행위를 언제까지 법이라는 잣대로 강요할 수 있을까.

내가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쓰며 서명을 했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만 유지하고 있는 제도인 것 같은데, 사실상 보안 면에서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듯한 기존의 낡은 서명 방식 대신 이제는 핀 번호나 다른 좀 더 편리하고 안전한 새로운 방식이 도입됐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신용카드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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