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수도 얼어도 사장님께는 말 못해요

[이주노동자 겨울나기①] 베트남 샤브샤브를 경험하며 신세한탄을 듣다

등록 2017.01.18 14:53수정 2017.01.1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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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겨울은 하얀 눈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 말고는 피하고 싶은 계절이다. 한파가 기승을 부린 요 며칠처럼 영하 날씨에는 움츠린 어깨를 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옷을 몇 벌씩 껴입어도 속살을 파고드는 한기를 피하기는 역부족이고, 공장 문을 여닫을 때마다 맨손에 쩍쩍 달라붙는 쇠붙이는 거머리가 따로 없다.


한낮에도 영하였던 지난 일요일,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 트이가 언 손을 호호거리며 이주노동자 쉼터를 찾아왔다. 찬바람을 맞은 볼은 덕지덕지 여드름 난 사춘기 학생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 장날이에요. 장에 가요."
"아, 오늘이 장이에요? 이렇게 추운데 장에 가요? 사람들이 있을까요?"

"몰라요. 장에 가서 생선 살 거예요."
"무슨 생선요?"

"한국 이름 몰라요. 베트남 샤브샤브 할 거예요. 식사하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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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피아 트이가 재래시장에서 사 온 틸리피아. 역돔이라고도 한다. ⓒ 고기복


샤브샤브라,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탕이 제격이니 '베트남 샤브샤브'가 어떤 음식일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트이는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눈치였다. 장에 간다고 해놓고 미적거리며 나갈 생각을 않는다. 추운 날씨에 다시 나갈 엄두를 못 내나 하면서 물었다.


"너무 춥죠?"
"네. 집에 물 안 나와요. 수도 얼었어요."

트이네 회사는 컨테이너를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다. 플라스틱 사출 업체인 공장 내 주차장 옆에 놓인 3x6m형 컨테이너 숙소 수도가 얼었다는 것이었다. 방은 전기 패널을 깔아 난방하고 있어서 수도가 얼까 싶지만, 한파가 계속되는 날엔 종종 언다고 한다. 작년에는 밤새 살짝 틀어놨던 수돗물 때문에 싱크대가 얼면서 물이 넘쳤다고 한다. 그 일로 누전이 되어 전기 패널을 다시 깔아야 했다.

다른 방 이주노동자들처럼 온풍기를 썼더라면 수도가 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트이는 전기 포트와 같은 전기제품을 숙소에서 쓰지 말라는 회사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 트이가 쓰는 컨테이너에는 TV도 없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회사에서는 트이가 추운데 일을 만든다며 주의를 몇 번이나 줬다고 한다.

쓰지 말라는 전기 포트뿐만 아니라 온열 히터와 전기장판, 전기밥솥 등 온갖 전자제품을 콘센트에 연결해 쓰다 보면 누전 위험이 있게 마련이다. 이주노동자들이 겨울이면 쇠창살이 세로로 덧대진 컨테이너 창문에 비닐이나 뽁뽁이를 붙이기 때문에 화재라도 나면 위험천만인 구조라 회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전기제품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다른 이주노동자들은 사장님이 짠돌이라며 몰래 전기제품을 사용한다.

전기제품 사용을 금지한 대신 회사에서는 외출할 때도 전기 패널을 완전히 끄지 말 것과 수도꼭지를 틀어 놓을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토요일 밤에 수도가 얼어버린 것이었다. 트이는 다른 이주노동자들 숙소는 얼지 않았는데, 또 자기들 방만 수도가 얼었다는 사실을 사장님이 알면 화를 낼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문제를 혼자 해결할 생각으로 이주노동자 쉼터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어떡해요? 물 안 나면? 밥도 못해요."
"드라이기로 수도꼭지를 덥혀주거나 뜨거운 물을 부으면 돼요."
"그렇게 간단해요?"

공산당은 부자, 나는 빚쟁이

언 수도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말에 트이는 밝은 얼굴로 장을 보러 나갔다. 두 시간여 동안 트이는 펄떡펄떡 뛰는 틸라피아(역돔) 세 마리와 봄동, 대파, 청경채, 버섯 등을 잔뜩 사 왔다. 베트남 샤브샤브용 식재료라고 했다. 비닐봉지에 담긴 틸라피아는 어찌나 힘이 좋은지 물밖에 나온 지 한참일 텐데도 펄떡거리고 있었다. 녀석은 비닐을 벗기기 위해 대가리를 내리칠 때까지 활어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덕택에 재래시장에서 틸라피아를 파는 줄 처음 알았다.

수도관은 쉽게 해동할 수 있었다. 덕택에 베트남식 샤브샤브를 준비하는 걸 살펴볼 수 있었다. 널찍한 놋그릇 냄비 바닥에는 사골인지 뼈를 잔뜩 깔아놓은 것이 보였다. 국물을 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비닐과 내장을 제거한 틸라피아에 칼집을 깊게 내고 국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며 트이와 그 친구들이 하는 수다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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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 볶은 콩과 볶은 옥수수, 귤. 볶은 옥수수는 팝콘과 많이 다르다. ⓒ 고기복


그런데 샤브샤브를 먹기 전에 내놓은 요깃거리에 배가 불러 버렸다. 볶은 콩과 옥수수, 귤은 베트남 사람들 입맛이 시골 입맛임을 알게 했다. 조미료가 가미되지 않은 군것질을 하다가 우연히 베트남 화폐 이야기가 나왔다. "이 나이 되도록 벌어놓은 게 없다"는 트이의 나이 겸 신세타령 끝에 이어진 이야기였다. 마흔둘, 트이는 이주노동자로 적지 않은 나이다.

"화폐 인물이 호치민 딱 한 명이네~"
"앞에는 호치민, 뒤에는 다른 거예요."
"그렇긴 한데…좀 특이하네."
"공산당 부자예요. 나는 빚 많아요. 하하. 다 됐어요.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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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화폐 베트남 화폐 앞면은 호치민이 전부 차지하고 있다. ⓒ 고기복


나이를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했던 트이는 남편이 많은 빚을 지고 집을 나간 지 수년째다. 게다가 고향에 있는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고, 작은 오빠는 돈은 벌지 않으면서 식구들 등골만 빼먹는다. 신세를 한탄하는 트이는 당장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고, 한국에서 돈 많이 벌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지인들 때문에 부끄러워도 그러지 못한다. 체면 문화가 강한 베트남 사람의 자존심 같은 거다.

많은 빚에도 웃으며 끓여준 베트남 샤브샤브는 국물 맛이 깊었다.

#이주노동자 #한파 #겨울나기 #베트남 #샤브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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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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